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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Jun 01. 2024

지나간 인연과 추억에게 건네는 인사

영화 <로봇 드림(Robot Dreams, 2024)>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인공 '도그'는 평범한 현대인을 대표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도시 속 혼자의 삶은 익숙하고 편리하지만 외롭다. 옆 건물의 행복한 커플의 모습을 본 뒤 우울감이 커진 도그는 때마침 보게 된 TV 광고 속의 '로봇'을 주문한다. 로봇이 도그의 삶에 나타난 이후 도그의 삶은 완전히 바뀐다. 일상은 여전히 평범하지만 함께 하는 모든 것이 소중한 추억이 되고, 로봇의 따뜻한 미소가 자연스레 도그의 공허를 채워준다. 그러나 좋았던 시간은 잠시, 어느 날 해변에 갔다가 함께 수영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 뒤 낮잠을 자고 깨어났을 때 로봇은 몸에 이상이 생겨 꼼짝을 못하게 된다. 고칠 방법을 찾으려 도그가 잠시 바깥에 다녀온 사이에 해수욕장이 내년 6월 개장일까지 출입이 원천 금지되면서, 함께한 시간보다 훨씬 긴 이별을 맞이하게 된다.


   로봇은 그 자리에 꼼짝없이 누워 세 번의 꿈을 꾼다. 첫번째는 우연히 바다를 통해 해변에 닿게 된 토끼들이 자신을 고쳐줘서,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내용이다. 그러나 문을 계속 두드려봐도 도그는 나오지 않는다. 꿈에서 깨어나 눈을 뜨고 보게 된 현실에서는 토끼들이 자신들의 필요를 위해 로봇의 다리를 잘라내고 있다. 그 뒤 미안한 기색도 없이 철저한 무관심 속에서 떠나간다.

   계절은 흘러 겨울이 오고, 눈이 내린다. 로봇은 생전 처음 보는 눈을 보며 여느 때처럼 맑은 미소를 짓지만, 그런 순수한 마음을 알 리 없는 눈은 계속 세차게 내려 로봇의 몸체가 안 보일 정도로 덮어 버린다. 장면이 전환되어 눈 속에서 벗어난 로봇은 다시 도그의 집 근처로 찾아가는데, 도그가 자신과 비슷하게 생긴 새로운 로봇과 함께 손을 잡고 집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멀리서 보게 된다. 자신이 다른 존재로 대체되었다는 사실에 큰 상처를 입은 순간, 현실로 돌아오며 다시 꿈에서 깨어난다.

   또 다른 꿈에서 로봇은 겨울을 담고 있는 프레임에서 아예 나와 반대로 돌린 뒤 봄이 담긴 프레임으로 스스로 뛰어들어간다. 도그와 함께 봤던 애니메이션 속에 등장했던 곳이다. 거대한 꽃들과 함께 탭댄스를 추는데, 꽃들의 움직임이 로봇이 사랑했던 도그의 다양한 표정들을 흉내내어 만들어낸다. 세 번의 로봇 드림(robot dreams)을 통해 떠나간 도그를 그리워하는 로봇의 마음이 가장 담담한 방식으로 절절히 그려지는 동안, 도그는 로봇에게 닿을 방법을 찾지 못한다. 결국 로봇은 고물상에 맡겨져 잔인하게 조각난다.


   도그는 자신의 자리에서 로봇을 되찾아오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럼에도 끝내 1년 이상 해수욕장이 재개장하기만을 기다려야 하게 되자, 도그는 로봇을 데리러가겠다는 다짐을 간직한 채 로봇이 없는 자신의 삶에 적응하며 계속해서 살아간다. 할로윈데이 풍습도 즐기고, 새로운 친구를 만들고자 스포츠 모임에도 참여해보고, 연날리기 취미도 가져본다. 그러는 동안 새로운 인연을 만나 추억을 쌓기도 하지만, 마음이 같지 않았던 상대는 쉽게 떠나간다. 계절이 지나 겨울이 오고, 도그는 앞집 꼬마가 만들다 만 눈사람을 마저 완성시킨 뒤 그 눈사람이 살아 움직이는 꿈을 꾸는데, 끝내 눈사람이 로봇의 얼굴로 변하는 순간 왈칵 솟구치는 그리움과 함께 잠에서 깬다. 여전히 방은 어둡고 쓸쓸하다.

   마침내 해수욕장 재개장 날이 오고, 만반의 준비를 한 도그는 담담하면서도 초조한 모습으로 해수욕장으로 향하지만, 로봇은 거기 없다. 로봇의 잘려나간 한 쪽 다리만을 고이 안고 돌아온 도그는, 마침내 새로운 로봇을 들인다.

   한편 로봇 역시 고물상에서 우연히 새로운 인연 '라스칼'을 만나 다시금 살게 된다. 라스칼은 사라진 부품을 새로운 것으로 대체해 로봇에게 생명을 되찾아주고, 그의 집에서 라스칼이 좋아하는 것들을 함께 한다. 도그와도 그랬던 것처럼. 로봇은 차츰 새로운 일상 속에서 행복해지고, 라스칼을 사랑하게 된다.

   

   헤어져 있는 동안 그들의 주변에는 정말 나쁜 인연도 많았지만, 드물게 간혹 좋은 인연 역시 찾아왔다. 나쁘지도 좋지도 않은, 스쳐간 인연도 있었다. 그들과 함께 각자의 삶 속에서 다른 경험을 쌓으며 상처는 더디게 회복되고, 조금씩 다른 존재가 되어갔다. 서로가 아니면 안 될 것만 같았고, 만난 시간보다 더 긴 시간 동안 서로를 찾아 헤맸지만, 돌고 돌아 또 다른 좋은 인연을 만난 뒤에는 반드시 서로가 아니어도 된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가끔씩 떠오르는 추억으로 인해 그리워는 할지라도 아파하지는 않으면서, 각자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저 둘이 언젠가 다시 만나긴 할텐데, 어떤 기적을 통해 만나 그간의 그리움을 표현하는 모습을 그려낼 수 있을까 생각했다. 부서진 로봇을 구해내고 다시 생명을 불어넣는 역할을 당연히 간접적으로나마 도그가 할 것이라고, 그걸 뻔하지 않게 그려내는 것이 중요할 것이라고 은연 중에 생각했다. 안일한 생각이었다. 로봇을 되살린 건 라스칼이었고, 도그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 로봇 역시 도그가 삶의 우울과 권태에서 벗어나도록 적절한 시기에 손을 잡아주지 못했다.

   로봇과 도그가 서로를 얼마나 사랑했던 간에, 지나간 추억과 사랑은 실질적으로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지 못했다. 다시금 그들을 살게 한 것은 새로운 인연이었다. 생각해보면 생을 통틀어 찾아오는, 정말 대단하고 유일한 운명 같은 인연은 없는 지도 모른다. 그저 매일의 삶에 찾아온 인연들을 기쁘게 맞이하면서, 계속되는 삶을 살아내는 것만이 각자의 운명일 뿐이다.



   새로운 인연 라스칼과 행복하게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던 어느 날, 마침내 로봇은 집 안의 창문을 통해 우연히 길을 지나가는 도그와 그 옆의 새 로봇을 본다. 기쁘면서도 마음 아픈 복합적인 감정과 더불어, 어떻게든 그를 만나야 한다는 다급함에 사로잡힌다. 곧장 길을 내달려 간신히 도그의 어깨를 붙잡고, 뒤돌아본 도그는 약간 달라진 로봇의 외양에 놀란 듯한 기색이지만 망설임 없이 둘은 와락 끌어안는다. 도그 옆의 새 로봇은 조금 슬픈 표정을 지어보이고, 쫓아나온 라스칼이 로봇의 어깨를 두드려 뒤돌아보면 그 순간, 창문 앞의 현실로 돌아온다. 아, 이것 역시... 영화 속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로봇의 꿈이었다.

   현실에서 로봇은 새 인연을 만나 행복해보이는 도그에게 달려가는 것이 맞는지 고민하며, 과거와는 달라진 자신의 모습을 내려다본다. 지금 달려가면 조금은 달라진 모습임에도 나를 알아봐줄 것을 알지만, 나를 내치지 않을 것임을 알지만, 그토록 그리워했던 너를 다시 한 번 품에 안아볼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봇은 도그를 향해 달려가는 대신, 멀리서나마 도그가 가장 좋아했던 노래(September(Earth, Wind & Fire))를 크게 트는 것을 선택한다. 묻지 못한 질문이 노래를 통해 대신 흘러나온다. ‘Do you remember?’

   도그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그때 그 음악에 반응하고, 각자의 자리에서 동시에 그때 그 춤을 춘다. 어렴풋하게 로봇의 모습을 본 도그는 다급히 그쪽을 향해 시선을 돌려보지만 로봇은 보이지 않도록 숨어버린 뒤였다. 잠시나마 예전으로 돌아가 행복한 얼굴로 추억의 춤을 출 때에, 로봇이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잘 가. 정말 많이 사랑했어!'

   영화는 각자의 인연과 각자의 자리에서 지금의 춤을 추는 것으로 엔딩을 맺는다.


   라라랜드 속 회상 장면이 자연스레 떠오르는 결말이었다. 다른 점은, 라라랜드가 '우리가 그때 이랬다면'을 상상한다면, 로봇드림은 '내가 지금 이렇게 한다면'을 상상한다는 것이다. 로봇은 '해수욕장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그래서 우리가 계속 함께 했다면' 가능했을 모습을 상상하지 않는다. 지나온 과거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되 지금을 바꿀지 말지를 고민한다. 그리고 과거의 사랑을 간직하면서도 현재의 사랑에게 상처 주지 않는 선택을 한다.

   아마도 가볍게나마 인사라도 건넨다거나 친구로 지낼 수 없는 것은, 그만큼 진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일 것이다. 서로에게 유일한 존재가 될 수 없게 됐다는 사실만으로도 상처 입을 수밖에 없을 만큼. 한편 최선을 다해 사랑했기 때문에 미련 없이 웃으며 과거를 흘려보낼 수 있고, 지금 찾아온 인연을 충실히 사랑할 수 있기도 할 것이다.

   한때는 유일하길 바랐던 지나간 인연과의 추억을 떠올리는 것은, 때로 사랑이 부질 없는 것이 아닌지 의심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런 우리에게 영화 '로봇드림'은 지난 시절 그 자체의 소중함과 아름다움을 일깨워준다. 사랑했던 마음을 고이 간직하고도 또 다시 사랑할 수 있다는 용기를, 과거를 기억하면서도 새로운 삶을 기쁘게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사랑스러운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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