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간 분명히 지나가니까
연극회 스탭들 개인사진 촬영이 있어 학교에 갔었다. 각자의 일정이 한 시간 텀으로 잡혀있었으나 사진 촬영이 금방금방 쉽게 끝나 여력이 된다면 시간을 당겨 와달라는 공지가 있었다. 예정된 시간에 맞추어 집에서 버스를 타고 올라오고 있던 나는 강남 터미널에서 내리자마자 뛰면서 지하철을 두 번 갈아탔지만 어쩔 수 없이 늦었다.
안경과 마스크를 바닥에 내려놓은 뒤 태연한 척 렌즈를 바라봤다. 대기하고 있던 한 스탭 분이 잔머리를 정리해주었다. 내 촬영 역시 1분 남짓으로 끝났고, 내가 마지막 촬영이었기에 기다리고 계셨던 분들이 뒷정리를 하면서 내게 일정이 없다면 같이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가겠냐고 물었다. 굳이 따라가고 싶지는 않았지만, 거절하고 싶지도 않았기에 그러자고 했다.
이제 별 새삼스럽지도 않지만 어느새 나는 고학번이었고, 나보다 예술 쪽으로 훨씬 익숙한 사람들일 것이라 짐작했던 네 명의 사람들 중 세 명은 20학번들이었다.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마주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카메라를 담당해주신 분은 졸업생으로, 원래 연극을 하다가 공무원 시험을 시작할 생각을 하고 있다고 했다. 작년에 만났던 영화과 친구의 고단한 얼굴이 오랜만에 스쳐갔다. 배우 빼고 해볼 만한 것들은 다 시도해보았지만 결국엔 현실의 벽을 만났다고 했다. 나이가 들수록 주변의 친구들과의 연봉 차이를 실감하게 되었고, 경제적 궁핍을 견디고 버틸 정도로 예술을 사랑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나 역시 내 얘기를 안 할 수 없었기에 이렇게 고학번이 되어서 연극회에 들어온 이유에 대해 설명해야 했다. 원래는 행정고시를 준비했고, 근접한 점수로 떨어졌을 만큼 정말 열심히 했었다고, 그런데 작년 2차 시험 이후에 이걸 또 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이 많았고, 나를 스스로 더 괴롭게 만들고 있다는 생각에 그만두기로 했다고. 이 정도의 요약본을 최근 꽤 되풀이 했던 것 같다. 영화제 자원봉사에서도, 오랜만에 연락한 친구들에게도, 그리고 이런 자리에서도. 그만큼 시간이 흘러 내게 히스토리가 생겼다는 이야기고, 또 한편으로 히스토리를 설명해야 할 만큼 지금의 내 상황과 행동이 일반적이지 않다는 의미일 것이다.
근접한 점수로 떨어졌다, 2차, 와 같은 문장과 단어를 말할 때 내 안에서 의구심이 조금씩 고개를 든다. 내가 왜 이걸 얘기할까? 얼만큼 열심히 했었는지에 대한 근거를 말하고 싶은 걸까, 아니면 능력이 안돼서 포기한 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걸까. 둘 다인 건 맞다. 전자의 명분으로 이야기하지만 아마 청자는 후자의 의도를 어느 정도 떠올릴 것이다. 아, 능력이 부족한 건 아니구나. 또는 능력이 부족한 건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싶구나. 나는 진솔하고 담백하려 하지만 동시에 구차해보이지 않기 위한 균형을 잡으려 애쓴다. 아마 앞으로의 일 년동안 이런 순간들을 몇 번은 마주해야겠지.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있는 세 명의 20학번들은 짐짓 진지하기도, 답답해하기도 한다.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할까 하면서. 졸업생 선배와 내가 하는 말들을 들으며 그렇구나, 하며 끄덕인다. 내가 영화제에 모인 사람들과 연극하는 사람들을 그나마 가까이서 보게 되면서 얻은 게 있다면, 그들에 대한 열등감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내심 '그들'이 부러웠다. 열정과 재미를 쫓아 20대의 시간을 보내는 청춘들. 생의 구차함이 끼어들 자리가 없이 반짝거리는 상상 속의 모습들. 날카로운 시각으로 예술을 논하는 순수함 같은 것.
그러나 당연하게도 그들 역시 그리 반짝이지는 않았다. 그들이 논하는 예술이나 정신세계는 그리 고차원적이지 않았고, 그들의 삶 역시 부박한 현실과 깊숙이 결부되어 꿈이라는 것이 형형한 모습으로 존재하지 못했다. 그저 다들 불안을 감추고 단순해지려 애쓰며 살아가고 있을 따름이다.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드니까 그저 해볼 뿐이었다.
우리 모두가 조금씩 도피하고, 조금씩 마주하면서 살아간다. 그냥 아직 들어가야 할 문을 정하지 못하고 여러 개의 문을 두드리기도 해보고 살짝 들어갔다 다시 되돌아 나오기도 하면서 복도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아니면 이미 들어가 문을 닫기는 했으나 나와야 할 지 문고리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그런 존재들이 모두 청춘이 아닌가 싶다. 가장 초라하지만 다른 문으로 들어갈 가능성을 품고 있는 존재. 하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선택하고 문을 걸어잠그는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그 문으로 들어올 다른 청춘들을 위한 길을 준비하면서.
이외에도 내가 좋아하는 철학과 교수님이 사실은 국문학과 출신이며 젊은 날에는 소설을 쓰기도 하셨다고, 그래서 국문과 교수님들이 조금 놀리는 투로 수업시간에 그 이야기를 하곤 하신다는 재밌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느 한 명의 다음 약속 시간에 맞추어 가게 밖으로 나왔고 처음 만난 그들과 별 아쉬움 없이 흩어졌다. 이야기 도중 IP사업 관련한 말이 나왔는데 나는 IT로 잘못 알아듣고 요새 그 분야에 관심이 있다고 말했고, 그분은 관련하여 좀 더 설명을 해주었다. 나는 내가 잘못 알아들은 사실을 알아챘지만 굳이 바로잡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귀기울였다. 그 사람은 아마 내가 행정고시를 포기하고 연극회에 들어왔으며, 진로 고민을 하고 있고, 나이에 비해 어려보이는 얼굴을 가졌고, IP사업에 관심 있는 사람 정도로 여기며 돌아갔을 것이다. 첫인상과 짧은 시간 나눈 몇 마디 대화로 내린 단순한 정의에 내가 갇힐 것만 같아, 이런 짧은 만남을 순순히 즐기지는 못한다. 돌아오는 길 마주한 한강의 수면 위로 어른거리는 붉은 노을이 꽤 쓸쓸해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