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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y Mar 09. 2024

재밌는 얘기 좀 해줘요.

요 며칠 몸이 좀 좋지 않아 빌빌 거렸다. 하필 회사에서 새로운 일을 배우는 시기와 맞물려 아주 곤욕스러웠다. 하루 이틀 쉬면 훨씬 빠르게 회복될 것 같았지만, 그 며칠의 시간을 빠짐으로써 메워야 하는 학습 진도를 놓치기 싫었다. 그래서 꾸역꾸역 회사를 나가는 대신 집에 돌아와서는 별 하는 일 없이 누워 있기를 반복했다.


집에서 하는 일의 범위와 규모를 최소화하며 있다 보니 평소엔 별 것 아닌 일상이 은근히 눈에 들어왔다. 특히 퇴근과 퇴원(아이는 하교 후에 학원 투어를 마치고 돌아오니 퇴원일 것이다) 후에 가족을 보면, 서로 각자의 것에 바빴다. 숙제가 많은 아이는 늦은 저녁 후에 어쩔 수 없이 학교와 학원의 숙제를 해치우느라 자기 방에 들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아내는 아내대로 지친 하루의 끝에 내 한 몸 쉴 곳, 늘어지게 있을 시간이 바로 저녁 밖에 없으니 때로는-아니 실은 꽤 많이-소파에 앉아 핸드폰을 들여다보거나 넷플릭스로 좋아하는 시리즈의 시청 그 이상도 이하도 하지 않을 때가 많았다. 큰 집 안에서 자기 영역을 각자 차지하고 시간을 보내고 있노라면, 어느 날은 서로 몇 마디 말의 대화만 형식적으로 오고 갈 뿐이었다. 잠자리에 들기 위해 홀로 방 안에 들어오다가, ‘이렇게 지내면 말 없는 사람들이 될 수도 있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 두려운 마음도 들었다.


올해 그 무섭다는 중학교 2학년이 되어버린 아들의 습관성 요청이 있다. 함께 저녁을 먹거나 또는 과일 간식을 먹다가도 종종 ‘재밌는 얘기 해 줘’ 할 때가 많다. 재밌는 얘기가 어딨냐, 핀잔을 주듯 말하다가도 오늘 하루 무슨 일이 있었지 싶어 곰곰이 생각해 보기도 하고, 이 녀석의 질문에 대답을 해주기 위해 출퇴근을 하다가 만난 별별 사소한 사건들이나, 회사의 일들을 일부러 기억하고 있다가 묻기도 전에 해주는 경우도 생겼다. 보아하니 아내도 마찬가지다. 귀찮아하면서도 직장에서 매일 생기는 크고 작은 일들이 있으니 그걸 대뜸 말해 준다. ‘너도 학교에서 별일 없었니?’로 이어지는 당연한 질문에 대해 아들의 대답은 ‘없어’의 단답일 때가 많다. 그래도 자꾸 닦달하면 누가 이랬다, 어떤 선생님이 저랬다, OO는 이상하다로 이어지는 대화의 시간들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하여 이야기보따리를 내놓으라는 무려 사춘기 남학생의 요구가 나이 값에 맞는 건가 싶다가도, 이런 질문 하나 덕분에 어쩌면 적막할지도 모르는 식탁의 분위기가 살아나는구나 싶어 되려 아이에게 감사하다. 물론 이 친구가 그런 사려 깊은 마음에서 시작한 질문이 아니란 건 지나치게 분명하지만, 의도와 다르더라도 결과가 좋으니 일단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겠다.



비단 가족 사이의 대화만 그러하랴. 우리 많은 일상의 행위들이 대게 의지를 가지고 일부러 행하지 않으면 상호 작용이란 것이 불가능하지 않은가. 저절로 일어나는 관계의 형성은 없다. 그러고 보니 내가 좋아하는 한 동료도 늘 만나면 밑도 끝도 없이 ‘뭐 재밌는 거 없어요?’라고 대화를 시작하는 버릇이 있다. 매번 반복되는 일상, 재미보다는 그저 짜증 나고 불편한 현실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기 십상임에도, 재밌는 것을 잠시 고민해 보도록 유도하는 질문은, 그 자체로 꽤나 유용하고 실용적이며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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