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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y Jun 14. 2024

숙제하듯 사는 삶의 고단함

갭이어 진단으로 돌아본 나

출근하는 날에는 보통 6시에 일어난다. 미리 정해둔 출근 시간에 늦지 않게 준비해야 한다. 고민을 줄이기 위해 전달 미리 정해 둔 옷을 꺼내 입고, 최소한의 동선으로 움직여 밥을 준비하고 먹는다. 이어 설거지, 아이의 물통 채우기를 거쳐 내가 먹을 비타민을 털어 넣으며 주방 작업을 후루룩 끝낸다. 몸단장을 마친 후 나보다 늦게 일을 나가는 아내와 2-3분 잡담을 마치고 문을 나섰다. 잡담의 주제는 주로 ‘오늘 저녁 뭐 먹지?’와 같은 지극히 현실적인 것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4층에 내려 주차장 자동문을 나서는 순간, 턱 숨이 막혔다. 마치 숙제하듯 무언가를 하나씩 끝내 놓고 회사로 향하는 내 모습이 안쓰러웠다.


실은 어젯밤 아내가 갑자기 보내 준 링크가 있었다.


‘갭이어?’


Gap Year. 위키백과에 따르면 학업을 병행하거나 잠시 중단하고 봉사, 여행, 진로 탐색, 교육, 인턴, 창업 등 다양한 활동을 직접 체험하고 이를 통해 향후 자신이 나아갈 방향을 설정하는 시간이라고 한다. 학생이 아닌 직장인 입장에서 보기엔 참 좋은 말이지만 현실성 없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하던 일을 멈추고 봉사나 여행을 맘대로 할 수 없는 40대의 나이가 갖는 무게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얼른 링크에 나온 대로 자기 평가를 했다. 궁금하니까.



내 점수는 61점. 점수가 높을수록 갭이어가 필요하단다. 점수 자체 보다도 ‘갭이어 필요도’라고 나온 설명에 괜히 울컥하는 마음이 올라왔다.


“갭이어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현재의 삶에 변화와 도전이 필요함을 느끼는 시기입니다.반면 생각과 감정을 무시한 채, ‘이렇게 살아도 괜찮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매일 신경 쓸 것이 많지만 남들도 다 이 나이에 비슷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대충 느끼고 있거나, 긴가민가한 무언가를 정확히 정제된 언어로 표현해 줄 때 갑자기 치고 올라오는 무엇이 있다. 그랬다. 이렇게 살아도 괜찮긴 하다는 마음이 주는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어쩌면 그걸 느끼고는 있었지만 설명에 있는 말마따나 ‘생각과 감정을 무시한 채’ 살고 있는 시기이기도 했다. 자꾸 생각해 봤자 극적으로 바뀌기 어렵다는 것, 감정에 충실하려고 하면 극단적으로 인생의 허무가 가까이 다가올 것을 알고 있기에. 그러니 감정은 배제한 채 주어진 과제를 매일 정해진 시간과 내용에 맞게 착착 해결하는 것으로 자기 합리화를 추구하며 지낸 것은 아니었던가.


갭이어가 추천하는 활동은 한 달 살기 또는 투어였다. 인생에 대한 기대가 적어 행복을 찾지 못하는 상태라고 해버리니 공감이 되면서도 짜증이 났다. 아니 지금의 삶이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행복 없는 삶이라고 인정하기는 싫은 것이다! 그 정도는 아니라고!! 그러나 잠시 휴식이 필요하다는 것에는 맞장구를 친다. 회사와 집이라는 중심을 두고 여러 관계의 유지에 쓰는 에너지의 피곤함이나, 쉬지 않고 한 방향으로만 가고 있는 지루한 일상이 주는 위험성을 잘 알고 있다.


마침 회사를 20년 근속했다고 휴가가 나온다. 긴 휴가를 쓸 계획은 9월이다. 몇 달 남았지만 시간은 쏜살같아 곧 아이슬란드행 비행기를 타고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만, 지금 주어지는 매일의 숙제들을 잘 견뎌내 보련다. 상상만으로도 힘이 생긴다. 그래, 내게는 갭이어가 필요한 것이 맞아. 일 년을 쉴 수는 없어도 잠깐 주어 질 나만의 시간을 설래는 맘으로 기다리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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