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되지 않는 삷을 위한 작은 습관
직장생활만 20년을 바라보는 나이에서 내가 아직도 지키고 있는 철칙이 하나 있다. 바로 내 이력서를 매년 업데이트하는 것이다. 혹시 현재 직업이나 직장이 맘에 들지 않아서 이직을 생각하고 있냐고 물으신다면 그건 아니다. 저는 지금 회사에서 상당히 중요한 포지션을 맞고 있고, 재미있고 즐겁게 근무하고 있다.
나는 현재 직장이 5번째 직장이다. 요즘에는 이직이 다들 당연시되는 분위기였지만, 사실 다른 동년배 직장인들과 비교해 보면 나는 이직이 좀 많은 편이었다. 사실 현 직장으로 이직하기 전까지는 이력서를 업데이트했던 주된 이유는 나에게 맞는 직장과 업종을 찾기 위해 이력서를 작성했다. "어떻게 하면 조금 더 내 커리어를 잘 보일 수 있을까?"에 모든 초첨이 맞추어져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무엇을 위해 일하고,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을까?"라는 관점에서 이력서를 업데이트하고 있다. 이력서를 매년 업데이트하면 몇 가지 장점이 있는데,
첫째로, 내가 매년 성장하고 있는가를 객관적인 시점에서 평가할 수 있다. 어떤 해는 정말 정신없이 바쁘게 지내왔는데도 불구하고 쓸 내용이 별로 없을 때가 있다. 내가 일본에 주재원으로 막 부임했을 때, 정말 식사도 제대로 못할 정도로 일본 사업에 적응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냈었다. 그런데 실제로 연말에 가서 내가 무엇을 했는가를 적는데 쓸 수 있는 내용이 별로 없어서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즉, 이력서에는 본인이 했던 업무를 적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든 성과를 적는 것이라서 의외로 한 해를 돌아보면 냉정하게 자신의 성과를 쓰기가 어려울 때가 많이 있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다음 해에 어떤 업무에 좀 더 집중해서 성과를 만들어야 되겠다는 다짐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둘째로, 나의 직장 정체성에 대해서 고민해 볼 수 있게 된다. 직장에서 재미있고 능동적으로 근무하고 있는 직원들의 특징을 보면 직장에서 본인의 커리어에 대한 비전, 정체성이 분명한 사람들이 많다. 이러한 정체성을 잃게 되면, 직장생황이 무료해지고,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끌려다니게 되고, 결국 이직을 고민하게 되거나, 나이가 많으면 희망퇴직, 명예퇴직으로 내몰리는 경우가 많아지게 된다. 보통 직장 정체성이 있는 사람들은 직장에서 10~20년 다녔을 때, 본인의 강점, 성과를 명쾌하게 요약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자신만의 스토리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이다.
얼마 전 내가 직장동료하고 이야기하면서 본인의 직장 정체성이 무엇이냐고 물은 적이 있는데, 그 친구 답변이 본인의 직장생활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Nomard"라고 대답해서 다소 놀란 적이 있다. 그 친구도 한 직장에서 15년을 일한 그래도 회사에서 인정받는 친구인데, 이제까지 본인의 이력서를 한 번도 작성해 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Nomard란 그 친구가 여러 지역, 여러 회사, 여러 부서를 경험해서 본인 스스로를 어떤 업무도 적응가능한 사람이라고 정의한 것으로 보이는데, 어떻게 보면, 정말 정신없이 살아겠구나 느끼면서 어떻게 보면 본인의 철학이 아니라, 회사에 의존해서 떠다니는 사람을 살았구나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었다. 의미 있는 회사 생활을 위해서는 본인의 가치, 철학도 명확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이력서를 매년 써보면, 본인이 어떠한 정체성을 회사에서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게 되고, 이를 통해 본인이 향후 나아가야 할 방향도 예측할 수 있게 된다.
셋째로, 나의 미래를 고민하게 되고, 꿈을 그릴 수 있게 된다. 이력서는 과거의 행적을 기록하는 수단만이 되지 않는다. 이를 통해 나의 강점/약점이 파악하게 되고, 향후 나의 정체성을 보다 명확하기 위해서는 어떤 진로, 커리어로 나아가야 될지를 명확하게 해 준다. 나는 커리어를 마케팅으로 시작했지만, 회사에서 임원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현장영업 경험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일부러 그런 업무를 자원해서 경험했다. 그리고 일본 주재원 생활이 길어지면서, 스스로 커리어가 제약된다는 것을 깨닫고 다른 지역으로 업무 경험을 확대하기 위한 방안을 직장 내에서 준비해 왔었다. 내가 직장생활을 오래 하면서 깨달은 것은 회사에서는 반드시 본인이 원하는 기회를 제공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다만 이를 위한 본인의 의지, 노력이 따라 준다는 전제가 있지만...
이처럼 매년 이력서를 작성하는 것은 직장에서 본인의 가치, 의미를 확인하고 더 나아가서 본인의 미래를 보다 명확하게 그리기 위한 나침반과 같은 역할을 해준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 명예퇴직을 앞둔 선배가 저에게 이력서를 작성해야 되니 템플릿하나만 보내달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그분에게 이력서를 작성한 적이 없었냐고 물었는데, 한 직장에서 30년 다니면서 단 한 번도 이직할 생각도 없었고, 그래서 쓸 필요도 없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본인 스스로가 어떻게 이력서를 써야 될지 막막하다고 이야기를 했다. 나는 정말 안정적이고, 좋은 직장에 다니고 있을수록 반드시 이력서를 매년 업데이트해 봐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그러한 직장에서 건강하고 더 오래 다닐 수 있고, 나와서도 좋은 직장을 빨리 찾을 수 있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