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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ㅁㄱㅍㅇ Jun 16. 2021

<위로공단>(2015)

기록되지 못한 역사를 기록하다




<위로공단>(2015) 임흥순 감독




‘역사는 기록되는 것이 아니라 선택된다.’라는 말은 잔인하면서도 비겁하다. 기록된 역사를 바탕으로 세워진 사회는 결국 기록되지 않은 사건들에 대한 면죄부를 발행한다.











트위터에 ‘오늘 일하다 죽은 노동자들(@laborhell_korea)’라는 이름의 계정이 있다. 여기엔 매일 각종 노동 현장에서 사망한 노동자들의 기사가 공유된다. 그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선 하루 7명, 일 년에 2천여 명이 ‘일하다 죽는’다. K-pop, 스마트폰, 반도체 등 문화, 기술 측면에서 놀라울만한 경제 성장을 달성하고 있는 2021년의 대한민국에선 1분기에만 238명의 노동자가 산재로 사망하였다.(출처) 이러한 상황을 ‘지옥’으로 묘사하고 있는 프로필 설명에는 경고문이 붙어있다. ‘일하다 죽었지만 기사 한 줄 안 나온 노동자가 훨씬 더 많습니다.’ 




<위로공단> 중




영화 <위로공단>(2015)은 60년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비인도적인 근무 환경과 터무니없이 낮은 임금, 작업 과정에서 발생하는 유독 물질, 상사나 고객으로부터의 폭언, 폭행 등에 피해받고, 저항하며, 가끔 이기고 대부분 지는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담는다.


그들이 노동을 회상하는 일은 대부분 눈물로 끝을 맺는다. 지나간 일에 흔들리는 자신에 멋쩍게 웃기도 하지만 그때의 정신적, 육체적 상처는 여전히 그들의 몸과 마음속에 아로새겨져 있다. 학교를 졸업하고 희망에 부풀어 상경했던 소녀는 몇십 년이 지난 후에야 묻는다. ‘왜 그랬냐’고. 세계를 놀라게 한 경제 발전 뒤에는 ‘그렇게까지 했어야만 했냐’는 노동자의 질문이 기록되지 않은 채 남아있다.  




<위로공단> 중




한국인들이 미얀마 군부독재에서 데자부를 느끼듯, 영화는 캄보디아 의류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들에게서 50년 전 한국의 여공들과 같은 목소리를 찾는다. 그들은 얼마에 팔리는지도 모르는 수출용 의류 한 벌을 아마도 그 가격의 몇십 분의 일도 안 되는 돈을 받고 만들어낸다. 그들의 삶은 눈을 가린 포스터 속 인물처럼 이해불가, 정보부족이다.  




<위로공단> 중




여성 노동자들에게는 종종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조건이 따라붙는다. 이 조건은 전통적인 ‘여성스러움’을 전제로 하는데, 순종적이어야 하나 수동적이어서는 안 되며, 성실해야 하나 적은 임금도 군말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 가정적이어야 하나 집안일이 업무에 영향을 끼쳐서는 안 된다. ‘용모 단정’해야 하며 이는 고객을 만날 일이 전혀 없는 직종에도 적용된다. 다양한 조건만큼, 다양한 이유로 여성 노동자들은 해고된다.  








<위로공단> 중




노동이 전부인 사회에서 파업을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최근 택배 노조원들은 살인적인 업무량과 낮은 임금에 반발해 파업을 시작했다. 위에 언급한 트위터 계정에도 하루 10시간 이상을 근무하다 쓰러진 택배 노동자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바로 오늘(6월 14일) 자 기사에도 주 평균 80~90시간을 일하던 40대 택배 노동자가 뇌출혈로 의식불명 상태에 빠졌다.


파업은 기계가, 마네킹이 되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악착같이 모으던 임금을 포기할 만큼(노조법 상 파업 참가자에게는 사용자의 임금지급의무가 없다), 목숨을 걸고 ‘사람답게 살겠다’는 선언이다.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노동자는 노동하기 위해 파업하고, 살기 위해 죽는다.  




<위로공단> 중




영화는 노동자들의 얼굴과 목소리에 다양한 이미지를 결합한다. 숲, 길거리, 도시의 밤을 배경으로 개미, 손수레, 자동차들이 지나간다. 그리고 그 안엔 여성이 있다. 특히, 두 여성이 있다. 숲을 헤매는 이들의 역할명은 ‘자매’이다. 눈이 가려진 채 홀로 거리를 헤매던 소녀는 또 다른 소녀에 의해 인도된다. 마지막으로 ‘업는 여자’가 ‘업힌 여자’를 업는다.


곳곳에 걸린 거울에 비친 얼굴들은 죽은 노동자들의 얼굴과 겹쳐 보인다. 그들의 영정사진은 사원증의 사진과 같다. 이들의 얼굴을 앞에 두고, 남은 이들은 투쟁한다. 그들을 ‘업고 간’다.  








<위로공단> 중




어떻게든 기록하려는 이들이 있다. 연극을 만들고, 버선발로 뛰쳐나와 사진을 찍고, 아카이브를 뒤지는 사람들이 있다. 영화는 그들 모두를 담고, 또 그들 중 하나가 된다. 누구도 잊혀지지 않도록, 변명이 되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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