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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ㅁㄱㅍㅇ Oct 01. 2021

괴담이라는 '특권'

캔디맨과 프랑켄슈타인은 왜 괴물이 되었나




처녀 귀신, 고아 귀신, 관심 병사 귀신 등등.. 괴담에 자주 등장하는 이 '괴물'들에겐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모두 소수자들, 낯선 존재들, 사회에 받아들여지지 못한 '비정상'의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도망가다 결국 붙잡혀 밧줄로 꽁꽁 묶인 채 가만히 들어 보면 다들 이승을 떠나지 못할 만한 억울하거나 슬픈 사연을 가지고 있는데, 이 가슴 아픈 이야기들이 주로 다른 장르가 아닌 괴담을 통해 전해지는 경향은 오래전부터 존재해왔다. 어쩔 수 없지, 이들이 로맨스물이나 히어로물의 주인공이 되기는 쉽지 않으니까.





얼마 전 개봉한 영화 <캔디맨>은 적지 않은 관객들로부터 '너무 정치적이다'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제작에 참여한 조던 필 감독이 전작 <겟아웃>, <어스> 등에서 인종문제를 다뤘던 전적이 겹쳐져서 이 부분이 더 주목받고 있는 느낌도 없지 않다.


하지만 이 영화의 원작 정도 되는 작품인 버나드 로즈 감독의 <캔디맨>(1992) 역시 다분히 '정치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기 때문에 개인적으론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것이 문제시된다는 것 자체가 공포스럽다.




캔디맨이라는 도시 전설은 탄생 배경 자체가 '인종차별로 인한 억울한 죽음'이다. 그는 18세기 인물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고, 그림 그리는 재능이 있어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로 유명세를 떨쳤다. 한 지주로부터 자신의 딸의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의뢰를 받고 작업을 시작한 그는 곧 지주의 딸과 사랑에 빠지게 되고 이것이 알려지자 캔디맨은 오른손이 잘리고 온몸에 꿀이 발린 채 벌떼에 던져져 끔찍하게 살해당한다.


인종간 결혼은 물론이고 말을 섞거나 같이 버스를 타는 것마저 법적으로 금지되었던, 심지어는 한 인종이 다른 인종의 노예였던 시기가 있었다는 사실에 대한 언급을 아직까지도 불편해한다는 것은 우리가 이 문제를 아직 완전히 해결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회의 잔여물들을 제거하기 위해 괴담은 탄생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피해자들은 기꺼이 되살아난다. '괴물'이 되지 않고는 누구도 그들의 말을 들어주지 않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영국의 여성 작가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은 최초의 SF 소설이자 '괴물'의 대명사 정도 되는 캐릭터를 탄생시킨 소설이다.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각진 머리에 나사 두 개를 꽂고 있는 이미지의 프랑켄슈타인은 사실 원작에선 다른 이름이 없이 그저 '괴물'이라고 불린다. 프랑켄슈타인은 이 괴물을 만들고 도망친 과학자의 이름이지만 어느샌가 이 둘이 합쳐졌다는 것은 이제 꽤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사실 뭐라고 부르든 상관은 없지만, 나는 메리 셸리가 괴물에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는 것 자체가 의미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소설 속에서 '괴물'은 프랑켄슈타인 박사에 의해 갑자기 세상에 태어난다. 갓난아기와 다를 바 없이 미지의 세상을 마주하게 된 '괴물'이지만 그를 보호해 줄 보호자도, 거센 비를 가려줄 지붕도 없다. 정처 없이 헤매던 괴물은 사람들을 만나지만 그들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기 바쁘다. 순전히 그의 흉측한 외모 때문이다.


괴물은 자신이 타고난 외모만으로 모두의 경멸을 받고 곤경에 처하는 것에 억울해 하지만 누구도 멈춰 서서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 결국 그는 사람을 해치고 집에 불을 지르는 등 '괴물'의 방식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인간을 창조해 신에 대적하려던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끝끝내 괴물에게 이름을 지어주지 않는다. 그를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이름으로 남겨진 괴물에겐 그가 원작 소설에서 스스로 글자를 깨우쳤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겼으며 가족의 형태를 이룬 사람들을 보고 감동했다는 설정은 남아있지 않다.




괴담은 안전을 위한 경고에서 시작되어 유희를 위한 이야기로 만들어진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인간을 닮은 괴물이 등장하는 괴담들을 즐길 수 있다는 건 특권이자 사치다. 이들은 공포스런 이야기에서 긴장감과 짜릿함을 느끼는 동시에 공포의 대상이 되는 '괴물들'에 자신이 속하지 않음에 안도할 수 있다.


반면 괴물이 되기 전 온갖 차별과 억압을 당하는 찌질한 캐릭터에서 자신을 발견하고야 만 이들은 결국 '괴물'의 방식이 아니고선 자신의 상황을 알리지도, 억울함을 해소하지도 못함을 다시 한번 확인할 뿐이다. (<캐리>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트라우마를 자극했을까!)




'캔디맨'이나 '프랑켄슈타인' 같은 이야기에서 우리가 발견해야 할 것은 그 안에 숨겨진 차별과 혐오의 본질이다. 또한 미디어에서 너무도 쉽게 악마화 되는 대상들에 대해 잠시 멈춰 한번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라는 작은 목소리를 듣게 될지도 모른다.





표지 출처 : 'Branimir Balogovic' from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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