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대 볼륨으로 들을 것.' 데이빗 보위의 [Ziggy stardust] 앨범에 적힌 문구
산책의 계절이 돌아온다. 산책의 계절이란 가벼운 차림에 헤드셋을 끼고 30분 이상 걸을 수 있는 시기를 의미하는데, 대표적으로 가을, 겨울, 봄이 있다. 그러면 여름은? 여름에 노래를 듣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이열치열 페스티벌에 가거나 성 캐리어께서 수호하시는 라이브 바에 가는 것. (여름의 콘서트는 견딜 수 없다!) 더위에 약한 나는 성인이 된 후 여름의 기억이라곤 앞서 말한 장소에서 손가락을 튕긴 일뿐이다. 그러던 2020년, 판데믹이 시작됐다.
공연계는 패닉에 빠졌다. 페스티벌이나 라이브 공연은 물론, 제한된 인원만 동원하는 음악 방송마저 줄줄이 취소됐다. 존재만으로 거리두기 수칙을 위반하는 아이돌 그룹이 속출했다. 아무런 추억도, 기억도 없이 한 번의 하지가 지나갔다.
그렇게 반년이 지나니 다들 견디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뮤지션들은 줌이나 유튜브로 합주와 콘서트를 하기 시작했고, 시도 때도 없이 끊기는 와이파이와 조악한 음향 장비의 시련을 지나, 2020년 논택트 펜타포트 무대에 선 자우림의 선포로 우리는 절망의 쓰레기산 위에 다시 섬을 세웠다.
Olivia Dean - Live at The Jazz Cafe
내가 올리비아 딘을 처음 본 것은 위의 재즈 카페 라이브 영상이었다. 마침내 관객과 마주한 채 맥주 한 잔을 놓고 공연을 즐길 수 있는 시기가 오자,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 무대 아래로 몰려들었다. 공연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은 불안감을 잊은 듯, 암흑 속에서 환호하며 신호를 기다린다. 곧 그 기대감을 충족시키는 비非일상적인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자줏빛 조명 아래 오늘 밤의 주인공이자 조연, 손님이자 호스트가 등장한다.
올리비아 딘은 좋은 퍼포머다. 듣는 이의 입술과 심장 사이에 낮게 울리는 목소리와 진중한 영국 악센트로 내뱉는 가사, 지루할 틈 없는 다채로운 악기 연주도 그렇지만, 관객과 악기 세션까지 편하게 해주는 특유의 말솜씨 때문이다. 솔직하고 장난스러우면서, 간결한 멘트는 라이브 공연에서만 느낄 수 있는 특별한 유대감을 준다. 공연 경험에는 의외로 공연자의 귀여움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라이브의 훌륭한 점은 필요한 악기가 전부 있다는 점이다. 첫 곡이 끝나고 나서 딘은 ‘평소 라이브에 사용하지 못했던 (트럼펫, 트럼본, 색소폰) 금관악기가 있어 좋다'며 ‘오늘 여러분은 이 곡이 의도한 그대로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we can hear it as it’s supposed to be tonight)’고 말한다.
‘소파 런던 라이브’ 등 여러 라이브 공연 영상을 보면, 딘의 셋리스트는 대부분 ‘Echo’로 시작해 ‘Reason to stay’로 끝난다. 둘 다 맥시멀한 빅밴드 스타일의 연주가 돋보이는 곡으로, 각각 묵직한 타이틀과 발랄한 엔딩 크레딧 역할을 톡톡히 한다. (소파 라이브는 드러머와의 하모니도 감상 포인트다!)
David August Boiler Room Berlin Live Set
어떤 장르든 제대로 된 악기 연주를 들으려면 까다로운 조건을 만족해야 한다. 적절한 방음과 증폭이 가능한 설비, 적절한 동료 관객, 마지막으로 악기와 연주자를 위한 적절한 공간까지. 그리고 그걸 방구석에서 들으려면 공연장에 가득한 소음 사이로, 필요한 선율만 뽑아 내 귀로 전달해 주는 신들린 믹싱 기술까지 있어야 한다.
판데믹 이전에도 음향, 배경 등에 공을 들여 제작한 감각적인 라이브 영상은 많았다. 좋아하는 것 몇 가지만 소개하자면, Cercle이 제작한 볼리비아 유우니 사막에서의 FJK의 라이브와 David August의 베를린 Boiler Room 라이브 셋 등이 있다. 보일러 룸은 클럽에서 진행되는 EDM 공연이 주를 이루는데, David August의 라이브 셋도 EDM이기는 하지만, 고요하게 시작해 점점 고조되는 몽환적인 곡으로 채워져 있어서 박자에 맞춰 춤을 추다 보면 조용한 무아지경에 이를 수 있다.
가장 유명한 게 Tiny Desk 아닌가 싶은데 무려 2008년부터 시작된 이 라이브 공연은 사무실 정도의 비좁은 공간에서 벌어지는 아늑한 공연을 추구한다. 그런데 이제는 아주 비싼 가수들이 나오는... (토크쇼 Hot ones도 그렇지만 뭐든 진득하게 하면 성공하는 것 같다.) 최근 타이니 데스크 코리아가 런칭되어 김창완 밴드와 선우정아로 문을 열었다. 특히 김창완 밴드 오프닝의 태평소 연주가 인상적인데, 아까도 말했듯 이런 악기들은 아무 때나 들을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Travis Scott - CIRCUS MAXIMUS
확실히 몇 년 새 도자 캣, 아리아나 그란데 등 팝스타들이 뮤직비디오 급의 세트 디자인에서 진행하는 라이브 영상을 내놓는 경우가 늘어났다. 트래비스 스캇은 최근 앨범 [Utopia]를 발매하며 1시간 15분짜리 영화를 만들어 극장 프리미어를 열기도 했다.(TKN 생각났는데 그 감독은 참여 안 했더라) 전에는 고가의 콘서트에서만 볼 수 있던 구경거리를 온라인으로 공개하고, 이에 대한 투자를 늘리는 양상 자체가 코로나 시기를 거치며 모든 것을 온라인으로 남길 수 있으며, 남겨야 한다는 강박이 생겼기 때문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전 세계적인 격리 트라우마를 통해 예술의 새로운 길이 열렸다고 말한다면 그 시기를 낭만화하는 것 같아 거부감이 들지만 어쩔 수 없다. 낭만화는 생존 전략이니까.
스튜디오에서의 깔끔한 라이브나 뮤직비디오처럼 만든 화려한 라이브 영상도 좋지만, 이런 영상들은 아무래도 편집과 후보정이 들어갔다는 점에서 현장감이 떨어진다. 관객을 앞에 두고, 악기와 연주자, 코러스를 군대처럼 대동하고 공연하는 영상이 훨씬 좋다. 연주자들과 조율하고, 관객과 소통하고, 중간중간 물(혹은 술)을 마시는 침묵도 좋지만, 무엇보다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훨씬 행복해 보인다는 점에서 그렇다.
직접 라이브 공연을 보는 기회는 그야말로 행운인데, 무대 설치와 튜닝을 기다리는 의미 없는 함성 박수 등 지루한 과정을 하나하나 눈에 담다 보면, 온라인 영상에서 편집된 것이 무엇인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난 공연을 즐길수록 점점 더 작고 느린 무대를 사랑하게 된다. 스튜디오에선 들을 수 없었던 숨소리를 사랑하게 된다. 완벽한 음을 내기 위해 찌푸려진 얼굴 근육을 사랑하게 된다. 수백 번은 되뇌었을 가사를 마치 처음 내뱉는 듯 상처받는 표정을 사랑하게 된다. 쉽게 헤아리기 힘든 감정에 벅차올라 흘러내리는 그들의 눈물을 사랑하게 된다.
Olivia Dean - Dive
올리비아 딘으로 시작했으니 올리비아 딘으로 마무리하겠다. 올해 6월, 그의 데뷔 앨범 [Messy]가 발매됐다. 장르는 팝 소울이라고 하는데, 난 사실 장르 구분을 어려워해서 '이런 장르입니다'하면 '그런 것 같기도...'하고 만다. (어릴 적 남무성 만화를 정독한 게 무색하다...) 대부분 부드러운 이지 리스닝 곡이라 가볍게 들어보기 좋은 앨범. 예전엔 구성이 복잡하고 강렬한 음악을 좋아했는데 일을 하다 보니 그런 걸 들을 기력이 없다...
앨범에서 가장 좋아하는 곡을 꼽자면 'Dive'인데 '당신에게 푹 빠질 준비가 됐다'는 가사처럼 '사랑할 자유'를 누리고 있는 화자의 목소리가 사랑스러운 곡이다. 뮤직비디오 역시 그 감정을 효과적으로 담고 있어 마음에 든다. 최근 바다에 다녀와서인지 모래사장만 보면 마음이 울렁거린다. 이외에도 Float, Ladies room 등 좋아하는 곡들을 플레이리스트에 담아놨으니 꼭 들어주길 바라...
올리비아 딘은 뜬다...
비교적 최근에 나온 앨범을 소개하며 나의 음악 감상 여정을 소개하는 시리즈의 첫걸음이다. 아이디어는 무궁무진한데, 몇 편이나 쓸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될 수만 있다면 영원히 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