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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동아빠 구재학 Apr 06. 2024

내 인생의 새옹지마

오늘의 고통이 내일의 복이 되는 전화위복(轉禍爲福)

변방에서 말을 기르던 노인의 말이 사라졌다. 마을 사람들은 참 안 됐다고 위로했다. 하지만 노인은 "어쩌면 이 일이 복이 될지 누가 알겠소?"라고 했다. 몇 달 뒤 사라졌던 말이 암컷 한 마리를 데리고 돌아왔다. 마을 사람들이 참 잘됐다고 하자, 노인은 "어쩌면 해가 될지 누가 알겠소?"라고 했다. 얼마 후 노인의 아들이 새 말을 길들이다가 낙마해서 다리가 부러졌다. 마을 사람들이 위로를 하니 노인은 이렇게 말했다. "어쩌면 이 일이 복이 될지 누가 알겠소?" 얼마 뒤 오랑캐가 쳐들어와 전쟁이 났다. 마을의 젊은이들이 강제로 전쟁터로 끌려가 목숨을 잃었지만, 노인의 아들은 다리를 다친 덕분에 전쟁에 나가지 않아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인생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 했던가? 나에게도 인생을 뒤바꾼 새옹지마가 있었다.




어릴 적 내 꿈은 건축가였다.

건물의 평면도나 입체도를 보는 게 좋았다. 친구 집에 놀러 가면 집의 구조를 살펴보고 '나 같으면 이렇게 설계했을 텐데'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 우리 집은 형편이 좋지 않았다. 인문계보다는 돈을 벌기 위해 실업계 고등학교 진학을 고민하면서 혼자 울기도 했었다. 우여곡절 끝에 인문계에 진학한 나는 전문경영인이 되어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고 생각했고, 그러기 위해 경영학과에 진학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대학교에 진학하고 보니 경영학과가 아니어도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동안 잊고 있었던 어릴 적 꿈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그러나, 군대에서 3년이라는 시간을 그냥 보내기는 싫어서 ROTC를 선택했고 남들보다 바쁜 시간을 보내면서 어릴 적 꿈은 그저 가슴에만 품고 살았다.


4학년 1학기, 복수전공을 신청할 수 있는 시기가 되었을 때 나는 내 꿈을 위한 도전을 해보기로 했다.

그리고는 과감하게 건축공학과에 복수전공 신청서를 제출했다.

서류전형을 통과하고 면접을 보러 갔다. 그동안 도서관에서 관련 책을 탐독하며 면접을 준비해 왔기에 떨리지만 자신이 있었다. 드디어 내 이름이 호명되고 문을 들어서자 자리에 앉아있던 교수님이 말씀하셨다.

"자네는 들어올 필요 없으니 그냥 나가게."

당황한 나는 교수님께 물어봤다.

"지금 면접 보러 왔는데 왜 나갑니까?"

"자네는 안 뽑을 거니까 면접 볼 필요 없네."

"예? 저를 보지도 않으셨는데, 왜 안 뽑겠다고 하시는 거죠?"

"경영대생은 기초가 없어서 공부를 할 수 없으니 뽑을 수가 없네."

"공대생들은 경영대에서 부전공도 하고 복수전공도 하는데, 왜 저희는 안 되나요?"

"경영대는 기초가 없어도 아무나 들을 수 있지만, 공대는 기초가 없으면 따라올 수가 없네."

"..."

이때 옆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조교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작게 속삭였다.

"어차피 면접은 어려울 것 같고 밖에 다른 학생들도 많이 기다리고 있으니, 나중에 교수님 사무실로 찾아뵙는 게 좋겠네요."

듣고 보니 그 말이 맞는 것 같아서 일단 그 방을 나왔다.

하지만, 복도에서 기다리는 동안 가슴에서 커다란 무언가가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한 시간 정도가 지났을 때 면접이 끝났고 교수님이 나오셨다. 나는 조용히 교수님 뒤를 따라갔고, 교수님 방 앞에 이르렀을 때 "교수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라며 말을 건넸다. 그러자 교수님은 "아까 그 일이라면 나는 더할 말이 없네. 혹시 다른 용건이 있다면 들어오게." 나는 "예, 용건이 있으니 들어가겠습니다."라고 말하고 교수실로 들어갔다.

"교수님의 아들이 이런 상황을 맞았다면 교수님의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내 아들이 이런 상황이라면 가슴이 아프겠지. 하지만, 나는 지금 사적인 신분이 아니라 공적인 신분으로 이 자리에 있네."

"그럼, 제가 건축공학을 공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건축공학은 기초가 없으면 공부하기 힘든 학문이니, 학력고사를 봐서 재입학을 하는 것이 최선이네."

이 말을 듣고 나는 어이가 없었다.

"교수님, 제가 ROTC 단복을 입고 있는 것이 안보이십니까? 저는 졸업하면 장교로 임관해서 군대에 가야 하는데 학력고사를 다시 보라는 말씀은 너무 비현실적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자네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자네가 속한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게."


교수님은 약속이 있다며 나가셨고, 나는 이대로 물러설 수가 없어 교수님 뒤를 따라나섰다.

교수님의 뒤를 얼마쯤 따라다녔을까.. 어느덧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해가 질 무렵 비를 맞으며 교수님의 뒤를 따르는데, 교수님이 함께 걷는 동료교수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내 귀에 들렸다.

"안된다고 알아듣게 얘기를 했는데, 고집을 꺽질 않고 계속 저러네.."

그때 여자 교수님이 고개를 돌려 안쓰러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고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때 깨달았다. '이렇게 해서 될 일이 아니다.'


나는 교수님의 말씀대로 내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기 위해 노력했고, 1996년 7월에 전역과 동시에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기업에 입사했다.

하지만, 이따금씩 신입사원으로서 내가 하던 업무가 의미 없게 느껴질 때마다 그때 만약 건축공학과 복수전공에 합격했더라면 어땠을까 생각을 하며 아쉬워하곤 했다.


1997년 12월, 외환 위기로 인한 초유의 국가부도사태가 발생했다.

한국뿐 아니라 아시아 금융 위기로 전 세계가 영향을 받을 정도로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그 여파로 수많은 회사들이 문을 닫았고, 재계 상위권의 대기업 그룹들과 금융기관들이 공중분해되기도 했다. 수많은 샐러리맨들이 직장을 잃었고, 많은 회사들이 대졸 신입사원 공채 합격을 취소했다.


그때 그 교수님이 떠올랐다.

만약 내가 그때 합격을 했더라면 나는 아직 학교를 다니고 있을 것이고, 1998년 6월에 졸업할 것이었다. 그랬더라면 나는 취업은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고, 복수전공을 하느라 나이가 들어 변변한 직장을 구하는 것은 포기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동안 원망만 해왔던 그 교수님께 큰 은혜를 입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살다 보면, 당시에는 세상을 잃은 것처럼 억장이 무너지는 순간들이 있지만 나중에 돌이켜보면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되는 경우가 많다. 살면서 산전수전을 겪으신 선배님들이 여유가 있어 보이는 것은 오늘의 어려움이 내일의 복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기 때문일 것이다.

후배들이 가끔 나에게 절대로 흔들리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고 말하곤 하지만, 사실 나도 마음속은 그렇지 않다. 아직도 작은 일에 흔들리고 상처받는다. 그리고, 어쩌면 여유 있어 보이는 선배들도 사실은 나와 같을지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나만 쫄보는 아니구나'라는 생각에 위안이 되기도 한다.


불교에서 "인생은 고통의 바다(苦海)"라고 했던가..

즐거움은 잠시이고, 많은 시간을 고통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라고 한다.

하지만, 살다 보면 억장이 무너지는 고통스런 일이 전화위복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살게 되는 거다. 항상 고통만 있다면 어찌 살 수 있을까. 오늘의 고통이 내일의 복이 될 수도 있다는 희망이 있기에 살 수 있는 거다.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인생은 새옹지마(塞翁之馬)다. 내일이면 좋아질 거야."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구창모의 '아득히 먼 곳'을 부르는 故 이선균. 전화위복이 될 것이라 믿고 조금만 더 버텨주었으면 어땠을까.. 아득히 먼 곳에서 부디 평안하시길..


* 대문사진 출처 : 한국비경촬영단&포토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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