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것이 힘일까 병일까
아는 게 힘이라는 말이 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아는 건 병이기도 하다. 이것도 맞는 말이다.
어설프게 알면 모르니만 못하게 되므로.
작법을 배우거나 생각을 전개하는 법을 익힐수록 사고를 글로 옮기는 게 어려워지고 있다.
나는 현재 모든 문장이 거슬리기 시작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가볍게 생각을 그대로 서술하는 것에도 어려움을 느낀다. 단지 생각->말->텍스트 치환의 과정일 뿐인데 눈에 보이는 텍스트까지 오는 데 한참이 걸린다.
예전에는 한 시간을 주면 삼천 자도 썼고 오천 자도 썼다. 일단 생각은 없어도 빨리 쓸 수 있다는 건 장점이다. 지치지 않을 수 있으니까. 오래 앉아 있으면 일단 지쳐서 쓰기가 싫거든.
글 쓰는 건 누가 엉덩이를 오래 붙이고 앉아 있을 수 있는가를 겨루는 일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는데, 나도 과거에는 그 말에 100% 공감했다. 일단 앉아만 있으면 그럴듯한 결괏값이 나오곤 했으니까. 애초에 빨리 쓰는데 시간만 많으면 양 불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제 그게 안 된다. 앉아 있으면 그냥 앉아 있는 사람이 될 뿐이다.
문장이 하나도 나오질 않는다. 차라리 빨리 사고를 정리해서 쓰고 싶은데, 아뿔싸. 나는 이제 빨리 쓸 수가 없다. 아주 환장할 노릇이다.
어설프게 알고 있으려니 답답해서 이것저것 찾아보면 시간이 저 혼자서 저만치를 달려가 있다. 차라리 그냥 쓸까, 하고 앉으면 머리가 하얗게 변한다. 나는 능숙한 필자까지는 아니어도 미숙한 필자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어째 갈수록 미숙해지는 것 같다.
하지만 초조함이 심하지는 않다. 고민이 영 무용하지는 않을 것 같다는 막연한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이번 학기 들은 국어교육론 강의에서, 능숙한 필자는 수정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료 조사나 개선에 시간을 오래 투자하는 것이라는 말을 하더라. 그런 걸 보면 나는 그냥 능숙해지려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는 단계에 있는 것일수도 있겠다 싶어서 위로가 된다.
이번 학기 워낙 '내 생각'을 '검증된 자료'와 함께 논리적으로 전개해야 하는 연구 과제가 많았는데 여태까지의 리포트가 조사 결과에 대한 정리 및 개념 인식 확인 과정에 가까웠다면 이제는 정말 고학년다운 과제가 쏟아져서 약간 지옥을 맛봤다. 일단 자료 검증에 투자하는 시간이 엄청나게 늘었고(요구하는 디테일이 너무 많아졌다) 내 생각을 텍스트로 구체화해서 남들이 봐도 유치하지 않게 느끼도록 잘 전개하는 방법을 생각하는 것도 어려웠다. 할 수만 있다면 AI에게 자아를 의탁하고 싶을 정도였다. 너라면 이 난잡한 생각을 1초만에 싹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었겠지.
하지만 그럴 수 없는 건 나도 안다.
그냥 조금 부족하더라도 열심히 사고하고 사유해서 옮겨 적는 일 하나에도 끙끙대는 한심한 인간으로 살아야지. 그게 성장의 길이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