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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님 Aug 19. 2021

만사 귀찮은 J의 계획적 삶

어설픈 J의 귀차니즘 일기

12월이 되면 다이어리, 매월 말일이 되면 월간 플래너, 매주 월요일이면 주간 체크리스트를 새로 뜯는 나는 MBTI 검사를 할 때마다 다른 것은 바뀌어도 'TJ'만은 절대 변하지 않는 '파워 J'형 인간이다. 그러니까 난 이런 사람이다. 학기가 끝나기 전부터 방학 계획을 세우고 방학용 플래너를 따로 사는 사람. 계획을 짤 때가 제일 즐겁고 실전에 돌입하기 전 모든 계획이 짜여 있어야 만족하는 사람. 매일의 할 일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어야 안심하는 사람.


하지만 모두가 그렇듯이 사람은 계획만으론 살아갈 수 없다. 살다보면 변수도 생기고, 잊고 있던 중요한 일이 떠오를 때도 있으며 갑자기 생긴 약속에 스케줄을 조정해야 하는 일도 생기기 마련이다. 물론 나는 그런 상황을 정말로 싫어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건 반드시 존재한다.


무엇보다 가장 큰 변수는 사실 외부 요인보다는 내부 요인에 있다.

그놈의 귀찮음.


아무리 계획을 어기기 싫어도 더 자고 싶고 놀고 싶은 날은 항상 있다. 한 시간 뒤에 시작해도 충분히 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으면 굳이 '내가 6시에 일어날 필요가 있나?' 싶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한 번 귀찮아지기 시작하면 이제 모든 게 귀찮아진다. 매일 아침 하던 체조도 하기 싫고, 잘 하고 있던 필사도 하루 정도 빼먹고 싶고, 강의를 듣는 것도 싫고 문제는 조금만 풀어도 될 것 같다. 일기 하루쯤 빼먹는다고 죽는 건 아닐 거고 그럼 다꾸 같은 걸 하느라 있지도 않은 디자인적 감각을 한계치까지 끌어올릴 필요도 없겠지. 그럼 그냥 하루 종일 잠이나 자버릴까? 방학이니까 하루만 놀자…….


그렇게 하루를 놀고 다음날이 되면 오늘까지만 놀까? 하는 마음이 생긴다. 그렇게 또 이틀을 놀면 사흘을 놀고 싶다. 그렇게 놀다가 나흘째가 되면 그제서야 겨우 펼친 필사 공책이나 다이어리를 보고 쇼크를 받게 된다. 아니, 왜 이렇게 빈칸이 많지? 곰곰 생각해보면 다 내 업보다. 그때부턴 갑자기 빠른 자기반성 모드에 들어간다. 3일을 놀면 놀았던 만큼의 충격이 찾아오는구나. 다짐은 또 빠르다. 이젠 그러지 말아야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시 귀찮음이 찾아오지 않는 건 아니다. 그래도 텅 빈 다이어리를 생각하면, 밀린 강의를 들어야 하는 미래를 생각하면 아침에 일어나는 게 싫다는 사실 정도는 어떻게든 이겨낼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밀린 것들을 하느라 스케줄을 다시 짜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귀찮다는 것이다.


사실 난 굉장히 틀이란 것을 싫어했다. 어릴 적부터 진로니 학업적성이니 하는 검사를 하면 항상 창의형이었고 이론과 풀이는 싫어해서 이과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런 건 내게 너무도 귀찮았고 힘들었다. 난 학원도 한두 번 몇 개월 다녀보다가 끊어버렸는데 할 일이 너무 많아서 넘치는 게 별로였고 하고 싶은 방향으로 공부하지 못하게 하는 게 싫었다. 그래서 스스로 뭔가를 해보고자 했는데 그냥 무작정 뭘 하려니 아스팔트 바닥에 헤딩을 하는 기분이더라. 하여튼 세상은 나한테 너무 귀찮은 것들을 강요했고 커가면서 그걸 감내해야 어른이 될 수 있다는 건 이해했지만 여전히 귀찮은 게 너무 많았다.


결국 내가 스스로 계획을 세우고 할 일을 정리하기 시작한 이유는 순전히 귀찮기 때문이었다. 가만히 있으면 잊어버릴 것 같고, 아무튼간에 꼭 해야 할 일들은 매일 생기는데 하지 않으면 나중에 더 귀찮아질 거고. 그렇다면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시작해서 끝맺는 게 좋지 않나. 그렇게 시작했더니 계획을 짜는 건 꽤 즐거운 일이 되었다. 그에 따른 결과물까지 오면 더 신이 났다.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할 일을 적어두고 적어둔 일은 다 해내자는 다짐만 했을 뿐인데 스스로 다짐한 것에 좋은 결과가 따르면 당연히 즐거울 수밖에 없으니까.


그렇게 어린 시절부터 쭉 지내다 보니 이제는 기록 자체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고 스케줄을 정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여전히 훗날 귀찮아질 것이 싫어서 계획을 지키는 사람이긴 하지만, 역시 나중에 몰려올 후폭풍을 생각하면 지금 살짝 귀찮았다가 목표를 이루고 큰 기쁨을 맛보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어쩐지 불순한 의도 같지만 어쩌면 남들도 다 이렇게 살고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이제는 뭐 계획을 짜지 않으면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으니까. 맨 땅에 헤딩은 싫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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