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드 디자이너의 무비랜드 분석
#감각채집8
영화관이 너무 좋다. 상영을 기다리는 동안 은근히 들뜬 공기, 공기 중에 퍼져있는 달짝지근한 카라멜 팝콘 냄새, 바삭바삭 부스럭대는 소리랑 소근소근 작은 목소리들이 뒤섞여 있다가, 불이 꺼지는 순간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조용해지는 그 공기.
얼마 전 인터넷에서 우연히 본 이 짤이 왜 내가 영화를 좋아하는지 한 줄로 딱 설명해준다.
대학생 시절, 디자인 과제 레퍼런스를 찾아보다가 모베러웍스를 처음 알게 됐다. 위트있고 재치있는 두낫띵클럽같은 프로젝트들을 보면서 ‘뭐지? 귀엽고 똑똑한데?’ 하고 오랫동안 작업들을 찾아봤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모베러웍스가 극장을 만든다는 얘길 들었을 땐당연히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멀티플렉스 극장 혹은 독립영화관을 넘어 또 어떤 재미있는 디테일을 담아 기획했을까.
2024년 2월, 성수동에 문을 연 단관극장 무비랜드는 브랜드 디자인 스튜디오 ‘모베러웍스’가 직접 운영하는 영화관이다. 노동과 일이라는 주제로 활동해온 이들은 이번에는 조금 더 물리적인 공간을 통해 자신들의 정체성인 ‘이야기’를 한층 더 깊게 확장하고자 했다. 영화는 디자인, 음악, 이야기 등 다양한 요소가 응축된 종합예술이다. 그리고 극장은 그 이야기를 파는 공간이니 자연스럽게 이 선택으로 이어졌다고 모베러웍스는 설명한다. 그렇게 모빌스의 콘텐츠와 세계관을 응축한 오프라인 공간이 ‘무비랜드’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졌다.
무비랜드는 전형적인 멀티플렉스와는 구조부터 다르다. 1층에는 즉석 프린팅이 가능한 실크스크린 티셔츠부터 무비랜드의 기념품을 판매하고, 2층에는 다양한 이벤트가 열리는 라운지를 통해 브랜드의 정체성을 강화했다. 운영은 주 4일, 목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오후 3시에서 밤 10시까지만 열린다. 여기에 매달 다른 큐레이터의 영화 선정과 아티스트나 브랜드와의 협업, 굿즈 제작까지 더해져 무비랜드만의 색이 완성된다. 결국 무비랜드는 단순히 영화를 상영하는 곳을 넘어 ‘이야기의 총합’을 전하는 공간이자 모베러웍스가 줄곧 추구해온 ‘하고 싶은 일을 진짜로 해보는 실험의 장’에 가깝다.
무비랜드의 운영 방식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 큐레이션이다. 약 5주 간격으로 한 명의 큐레이터를 선정해 그가 인생에서 깊은 영향을 받은 영화 4~5편을 고른다. 이렇게 구성된 라인업은 한 달 동안 상영된다. 단순히 최신 개봉작을 틀어주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취향과 시선을 따라가는 방식이다.
큐레이터는 배우 박정민과 이제훈, 돌고래유괴단의 신우석 감독, 래퍼 넉살처럼 각기 다른 직군에서 초청된다. 그들의 직업만큼이나 영화 리스트도 다채롭다. 코미디언 문상훈은 난처할 때 웃고, 애잔한 순간에도 웃고, 상상이 실현되는 순간이나 삶이 벅찬 순간에 찾아오는 웃음을 이야기로 엮는다. 그는 코미디라는 장르의 팬이자 웃음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자신만의 시선이 담긴 코미디 무비 셀렉션을 만들었다.
박시영 디자이너의 큐레이션은 결이 사뭇 다르다. 그는 나약함과 불안정함을 역설적으로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동력으로 보며, 외롭기에 누군가를 찾고 공감받기 위해 창작하며 공감을 나누기 위해 영화를 본다고 말한다. “불쾌하고 피하고 싶은 감정도 엔터테인먼트의 재료가 될 수 있고, 인생의 지저분한 면도 설득력을 갖추면 무기가 될 수 있다”는 영감을 <큐어>에서 얻었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큐어>라는 영화가 자연스레 궁금해졌다. 결이 거칠고 표면이 불안정한 이야기야말로 오래 남는 힘을 가진다는 것.
큐레이터가 바뀔 때마다 영화관의 공기와 분위기가 함께 달라진다. 뚜렷한 취향이 없던 관객도 큐레이터의 시선으로 영화를 경험하며 새로운 취향을 발견하고 다음 큐레이터의 라인업을 기대하며 다시 극장을 찾게 된다. 무비랜드가 단순한 상영관을 넘어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게 하는 이유다.
무비랜드가 설정한 관객의 모습은 전형적인 예술 영화관의 시네필과는 조금 다르다. 많은 예술 영화관이 영화 감상 자체에만 집중하는 조용하고 엄격한 분위기를 지향한다면, 무비랜드는 그 틀을 살짝 비튼다. 이곳에서는 관객이 조금 더 자유롭게 영화를 즐길 수 있다. 먹어도 좋고 이야기해도 좋고 심지어 졸아도 괜찮다.
이런 태도는 무비랜드가 설정한 세 가지 페르소나에서 드러난다.
첫 번째는 트래쉬 콜렉터(TRASH COLLECTOR). 남들에게는 사소해 보이는 기념품도 무비랜드의 경험을 담은 증거가 된다. 1층 기념품숍에서는 핀 배지, 라이터 등 작은 수집품들이 그들을 기다린다.
두 번째는 스낵 킬러(SNACK KILLER). 팝콘, 츄러스, 핫도그, 와인, 맥주, 커피까지—대다수의 예술 영화관에서 제한하는 취식이 무비랜드에서는 환영받는다.
마지막은 헤비 스포일러(HEAVY SPOILER). 이미 본 영화를 다시 보며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무비랜드에서는 콘텐츠의 일부다. 상영 전 상영되는 모베러웍스 제작 트레일러 영상은 이런 독특한 규칙을 안내한다.
그리고 가장 인상적인 메시지는 하나다. “졸리면 자도 좋다.” 아늑한 프리미엄 의자에 몸을 기대고 각자의 방식으로 시간을 즐기는 것. 그것이 무비랜드가 관객에게 제안하는 새로운 관람 방식이다.
무비랜드의 시각 언어 중심에는 ‘수작업’이 있다. 이는 단순히 아날로그 감성을 덧입히는 장식이 아니라, 만드는 사람의 흔적과 감정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반복을 통해 효율과 완성도를 높이는 기존 디자인 프로세스와 달리, 무비랜드는 오히려 오차와 비효율을 받아들인다.
모베러웍스가 말하는 수작업은 장인의 고도화 과정과도 조금 다르다. 기술적 숙련으로 오차를 줄이는 것보다 차이를 용인하는 태도에 가깝다. 같은 형태가 매번 조금씩 다른 결을 갖고, 의도적으로 엉성함을 남긴다. 이 ‘불완전함’ 속에 담긴 사람의 온기가 브랜드의 매력이 된다.
이는 시장 논리와 디자인 관성이 만들어낸 균질하고 예측 가능한 결과물에 대한 반문이기도 하다. 손길이 남긴 그 미묘한 불균질함이 오히려 공간에 온기를 더한다. 영화가 창작자의 해석과 흔적을 담아내는 종합 예술이라면, 무비랜드 역시 공간과 시각 언어에 만드는 사람의 존재를 담아낸다. 수작업은 무비랜드가 이야기를 전하는 방식이자, 그 과정 자체가 하나의 브랜드 스토리다.
무비랜드의 시각 언어를 구성하는 수작업은 공간 안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완벽하게 계산된 매끈한 공간이 아니라, 시간이 흐르며 손때와 얼룩이 스며드는 장소. 모베러웍스는 무결함보다 사용자의 흔적이 켜켜이 쌓여 이야기가 깊어지는 공간을 지향했다.
이 공간은 건축부터 새로 짓는 작업으로 시작되었는데, 1층에는 매점과 티켓 박스, 굿즈숍이 자리하고, 2층은 라운지, 3층은 상영관으로 이어진다. 주물 공방에서 제작된 간판, 세라믹 아티스트 ‘나이트프루티’, 가구 디자이너 윤정빈, 디자인 스튜디오 ‘콩과하’, 도자공예가 마라가람 등 뚜렷한 개성을 지닌 크리에이터들의 작업이 곳곳에 녹아 있다.
전반적인 분위기는 위트 있는 아메리칸 빈티지를 구현한다. 광고 게시판 속 상영 스케줄표와 포스터부터 작은 오브제까지, 머무르는 순간이 즐거운 디테일이 가득하다. 매점에서는 90년대 펩시 로고가 새겨진 음료 디스펜서가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공예가 마라가람의 독창적인 오브제, 좌석에 수놓아진 자수, 벽과 천장을 잇는 띠장, 알파벳 패턴 카펫, 좌석 안내 서체까지 모든 디테일이 브랜드의 무드를 이어간다.
영화 포스터 역시 단순 재사용이 아니라 무비랜드 무드에 맞춰 새롭게 아트워크를 제작한다. 특히 저작권상 변주가 가능한 작품은 기존 포스터의 신선함을 보완해, 매번 다른 비주얼 경험을 선사한다. 작품의 분위기와 핵심을 살리면서도 극장과 어울리는 빈티지한 감각을 더해 영화가 걸리기 전부터 몰입할 수 있게 만든다.
포스터 작업에는 내부적인 룰이 있는데 한 작품의 디자인은 길게 잡아도 5일, 가능하면 이틀 안에 마무리한다고 한다. 다른 프로젝트와 루틴한 업무를 병행해야 하기 때문에, 정해진 시간 안에서 집중해서 결과물을 내는 방식이다. 짧은 시간 안에 이 정도 퀄리티를 뽑아낸다는 게 매번 감탄스럽다.
상영 직전, 모베러웍스의 캐릭터 ‘모조’를 모티브로 한 ‘필름모조’가 날아가는 영상이 스크린을 채운다. 이 새는 로고, 2층 라운지의 세라믹 월, 상영관 띠장, 홈페이지 로딩 그래픽까지 이어지며 공간과 디지털을 잇는 연결성을 만든다. 상영 전의 설렘을 끌어올리는 매점, 라운지의 편안한 가구와 영화 서적, 즉석에서 제작하는 실크스크린 티셔츠 굿즈까지, 무비랜드는 공간에 머무는 경험 자체를 하나의 영화처럼 연출한다.
무비랜드는 극장에서만 끝나지 않는다. 한 달간 선택된 영화들 뒤에는 언제나 큐레이터의 시선이 있다. 이들이 왜 이 작품을 고르고 어떤 생각을 담았는지, 그 이유를 직접 들을 수 있는 창구가 바로 ‘무비랜드 라디오’다. 라디오는 큐레이터의 영화 취향뿐 아니라 작업 방식, 일상, 창작 태도까지 풀어낸다. 지금은 팟캐스트, 팟빵, 유튜브 채널 ‘MoTV’에서 만나볼 수 있고, 덕분에 무비랜드가 ‘이야기를 파는 극장’이라는 정체성을 온라인에서도 이어간다.
초기에는 음성 중심의 라디오였지만 1년 전부터는 무비랜드 안에서 진행하는 보이는 라디오로 바뀌었다. 개인적으로는 이 변화가 꽤 반가웠는데 큐레이터가 진솔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모습,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표정과 눈빛, 자연스러운 제스처까지 함께 볼 수 있으니 훨씬 인간적인 온기가 느껴졌다. 목소리만 들을 때보다 영화와 이야기가 한층 더 가까이 다가왔다. 이렇게 무비랜드 라디오는 무비랜드와 관객을 잇는 또 하나의 연결 방식이 된 셈이다.
무비랜드는 큐레이션 상영을 넘어 다양한 브랜드와 함께 새로운 경험을 만든다. 단순히 이름을 얹는 콜라보가 아니라, 각 브랜드의 맥락과 무비랜드의 철학을 이어 깊이 있는 경험을 설계한다.
올해 1월, 토스뱅크와 함께 진행한 기획한 '웹툰 노동'은 웹툰 보조작가들의 노동 실태를 다큐멘터리와 영화로 풀어냈다. 토스뱅크가 제작한 다큐 '웹툰 노동: 현세계에서 보조작가로 살아남기'에 '나, 다니엘 블레이크', '미안해요, 리키'를 묶어 상영하며, 주제를 산업 내부에서 사회 전반의 노동 문제로 확장했다. 한 번 보고 끝나는 이벤트가 아니라, 관객이 한 주제를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도록 설계한 협업이었다.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건 왓챠와의 협업이었는데, 온라인에서만 즐기던 실시간 공동 감상 서비스 ‘왓챠파티’를 무비랜드라는 오프라인 공간으로 옮겨온 프로젝트다. 매달 셋째 주 수요일, 왓챠가 호스트가 되어 매번 다른 테마로 직접 큐레이션한 영화를 상영하고 관객과 함께 경험을 나누는 방식으로 약 1년간 진행되었다.
OTT 시대에 극장이 관객과 연결되는 방식, 그리고 왓챠가 찾던 오프라인 커뮤니케이션의 접점이 맞물리며 자연스럽게 협업이 성사되었다고한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건, 이 프로젝트가 힘을 과시하는 단발성 캠페인이 아니라 매달 꾸준히 이어지는 ‘작은 페스티벌’처럼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집에서 혼자 OTT로 봤다면 중간에 놓쳤을 영화도 무비랜드에서 큐레이션의 맥락 속에 함께 보면 ‘발견’의 기쁨이 생긴다.
결국 이 협업들이 특별한 이유는 무비랜드가 단순한 상영관이 아니라 브랜드 철학과 큐레이션이 살아 있는 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객에게 이 협업은 ‘이벤트’가 아니라 함께 나누는 하나의 영화 경험으로 남는다.
무비랜드는 영화를 상영하는 공간을 넘어, ‘이야기를 경험하는 극장’으로 자신을 정의한다. 영화를 보기 전의 설렘, 관람 중의 몰입, 관람 이후의 잔상까지—무비랜드는 이 모든 순간을 하나의 확장된 영화적 경험으로 엮는다. 수작업으로 완성한 공간, 자유롭게 영화를 즐길 수 있는 관람 방식,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넘나드는 큐레이션, 그리고 브랜드와의 협업까지. 모든 접점이 ‘이야기’를 전하는 방식으로 설계되어 있다.
결국 무비랜드가 만드는 건 한 편의 영화가 아니라, 사람과 이야기가 이어지는 장(場)이다. 관객이 한 편의 영화를 보고 나가며, 다음 이야기는 무엇일까 기대하며 다시 이곳을 찾게 되는 이유다.
참고 : https://heypop.kr/cabinet/92805
참고 : https://design.co.kr/article/117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