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가 세상을 뒤덮던 날.
난 영화에서 본 한 장면을 생각했다.
좀비들이 세상에 득실득실거리는 영화의 한 장면
물고 뜯으면 전파되는, 그런 모습
코로나는 우리의 약한 부분에 침투하여
우리를 잠식해나갔다.
악수조차도 하기 힘든 세상을 만들었다.
사람과 사람을 믿을 수 없는 세상.
사회생활을 해오면서 느낀 건
누구도 믿지 못한다는 것.
그러면서 자꾸 외로워진다는 것.
일 하는 것도 외로운데
사람들과 같이 있으면서도 외로웠다.
그건 너의 감정이니,
네가 처리해야 할 몫이라고 얘기하는
사회의 언어들이 싫었다.
대부분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라 얘기했지만,
그리고 참으라고 얘기했지만,
나는 그리 할 수 없었다.
나의 자존심마저 포기할 수 없었다.
자존심이 밥먹여주냐는 그 말이
나에게 돌아왔을 때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나는 내 의견을 말하고 싶었을 뿐인데,
그들에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오로지 내 말을 듣냐, 안듣냐가 중요했다.
하나의 군대였다.
그러면서 나는 망각의 숲에서 예전에 발견했던,
꿈틀거리는 것을 꺼내올렸다.
'분노'와 '짜증'을 원동력 삼아서
사회가 돌아간다는 것이다.
수많은 욕들을 먹어가며 견뎌내야 한다는 점이었다.
다들 잘 견디고 있는데, 나만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래, 난 다른 사람이다.
난 쉽게 포기하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도 노력도 하고,
열심히 살고 싶은 사람이다.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이렇게 외치고 싶었다.
난 '분노'와 '짜증'을 원동력 삼아 돌아가는 사회에서
코로나의 뿌리가 숨어 들어가 있었다고 봤다.
그래서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그 뿌리가 싹을 틔우고 잎을 틔어서
지금의 모습을 나타낸 거겠지.
저 사람만 없어지면, 이라는 생각
저 사람때문에, 이라는 생각
그런데 계속 일을 하면서 살아가야 된다면,
행복하게 일할 수는 없을까.
물론 일이 짜증나고 하기 싫긴 하지만,
그럼에도 조금 행복하게 일할 수 없을까에
대해 생각했다.
이왕 해야되는 일이라면,
우리의 사회적 언어들이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디스토피아적인 세계가 있으면
반대로 유토피아적인 세계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오늘도 역시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