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촌 동생은 동네 작은 정형외과 병원의 간호사다.
신기하게도 이곳은 엉덩이에 종기가 나도 오줌소태가 나도 감기에 걸려도 찾는 시골의 만병통치 병원이다.
주 고객들은 할머님 할아버님들이시다.
그 병원에는 불문율이 있다.
그건 방문한 할머니 성함을 부르지 않는 것
김끝순, 김천덕, 김말숙 등 여성 인권이라는 건 없던 시기에 오로지 남동생을 보기 위해 지어진 매정하리만큼 솔직한 이름들.
그중 김섭섭 할머니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면 크게 진노하시는 분이라 간호사들은 그 할머니 차례가 되면 김 할머님이나 김여사 님이라 부르는데
어느 날 초짜 간호사가 김섭섭 할머니라는 금기어를 해맑게 또박또박 내뱉었단다.
허공에 크게 떠돌아다니던 김섭섭님~!이름 세글자가 김할머니의 가슴팍에 여러차례 꽂히자
할머니는 벌떡 일어나 간호사 근처로 가시더니 힘없는 손으로 등짝을 내리치셨다고 한다.
간호사는 어리둥절했지만 그리 서운하지는 않았다고
우리는 부모가 지어준 이름으로 살아간다.
부모도 부모가 처음이니 가끔 판단 미스를 할 때도 있다.
내 예쁜 친구 이름은 은자이다.
동네 가장 부잣집 딸 이름을 지어줬단다 잘살라고
그녀와 대학에서 미팅을 할 때는 미팅남들의 어머니, 이모가 소환되곤 했다. 거의 대부분 그랬다.
그 친구는 결국 개명을 했지만 지금도 나는 은자라는 그 친구의 이름이 좋다.
그 이름을 부르면 20살의 나와 그녀가 생각나기 때문이다.
수애를 닮은 여자 후배는 이름이 영자다.
셋째 딸이라 섭섭한 아버지는 셋째 딸을 영자라 신고해버리셨단다.
그 친구는 여러 곳에 자기 이름을 마리라고 말하고 다녔다.
예를 들어 화장품 마일리지 적립을 위해 마트 회원번호 신청을 위해... 그건 불법이 아니지 않은가?
다만 어디서 자기 이름 대신 마리라는 이름을 썼는지 몰라 가끔 난감할 때가 있다고는 했다.
나는 다행히 미영이, 은주, 정숙이처럼 여느 40대 여자 무리에는 한 명씩 있다는 이름 중 하나인 지선이다.
이 부분 부모님께 참 감사하다.
천조국 미국. 흔한 성중 owen은 좋은 가문, parker는 공원 관리자, porter는 문지기, reed는 머리카락이 붉은 남자라는 어원이 있다고 한다.
인디언 이름에는 늑대와 함께 춤을, 용감한 하늘의 파수꾼처럼 부모의 바람을 담은 이름도 있다.
나라마다 문화마다 이름을 짓는 방식은 다르고 갓 태어난 아이는 선택권 없이 부모의 의지와 교양 수준에 따라 평생 살 이름을 부여받는 것이다.
김섭섭 할머니는 이름으로 80년을 고통받으셨다고 했다.
이름뿐이겠는가~아들을 못 낳은 부모가 섭섭하여 지은 이름인 만큼 할머니의 80년 인생에는 어린 시절 고된 삶과 이름을 개명할 생각조차 못 할 바쁜 삶의 서사가 있었을 것이다.
조금은 엉뚱하지만
이름은 부모가 지어주고
묘비명은 스스로 지어보면 어떨까 생각해본다.
옛 조선 왕의 이름은 입에 올리면 안 되기에 백성들을 위해 외자 이름을 선택하고
사후에는 공덕에 따라 묘호를 붙였다는데
김섭섭 할머니도 묘호로 80년의 트라우마를 벗어나 보면 어떨까?
나 또한 윤지선이 아닌 전지현이나 송혜교로 숟가락을 얹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