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 적응기(3)
퍼스널 넘버를 부여받고 처음으로 내가 한 일은 영어를 배울 수 있는 랭귀지 스쿨을 찾는 것이었다.
나의 이민 첫 해 목표는 바로 '어학', 그것도 영어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스웨덴으로 온 이상 스웨덴어도 배워야 하겠지만, 일단 영어로 소통하는 게 스웨덴어보다는 편한 나였고, 일단은 살아야겠기에, 영어는 그래도 어느 정도 기본 바탕은 있었기 때문에 또한 대부분의 스웨덴 사람들, 특히 20-30대 젊은 사람들은 모두 원어민처럼 영어를 잘했기 때문에 똑같이 학교에서 영어를 배웠는데 한국과 스웨덴의 어학 교육은 무엇이 다른가, 왜 우리만 영어 울렁증이 있는가에 대한 나의 의문에 대한 대답을 찾는 여정은 계속된다 영어만 잘해도 의사소통을 하며 살아가는데 큰 어려움이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요한 또 한 가지 이유.
나는 '대학원'이라는 목표가 있었다. 남편의 선택으로 대학원 공부를 중도 포기하고 우리는 이민을 선택했기 때문에 남편은 그 당시 나에게 약속을 했었다.
"자기가 하고 싶어 하는 환경 교육 그 공부, 스웨덴이라면 더 좋을 수도 있어. 스웨덴은 또 환경에 관심이 누구보다 많은 나라잖아. 그러니까 가서 다시 공부해."
나는 그때 예테보리에는 '예테보리 대학교'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고, 그곳에 Sustainable Environment Education(우리말로 지속 가능한 환경 교육)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는 것도 발견했다. '이곳에 가자! 환경에 대한 정책도 많은 나라이니, 여기서 대학원을 졸업하면 기회도 더 많을지도 몰라.' 막연한 기대에 부풀어 다시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스웨덴 대학원은 대부분 스웨덴어가 아닌 100프로 영어로 수업이 진행되기 때문에, 내 목표가 대학원이라면 스웨덴어보다는 영어 공부가 우선이었다.
"대학원 원서 쓰려면 영어 점수가 필요하네. IETS 아니면 TOFLE을 봐야 하는데, 이건 왜 이렇게 비싼 거야... 응? Swedish National Eglish Test? 이런 게 있네? 심지어 싸!"
어마어마하게 비싼 국제 공인 영어 시험에 비해 굉장히 저렴한 스웨덴 국내 영어 시험에서 level 6 이상을 받으면 대학원 입학 지원 자격이 된다는 것을 발견, 나는 당장 레벨 테스트를 지원했다.
'그래, 내가 영어로 아직 말은 잘 못해도 그래도 한국에서 대학까지 나왔고, 그동안 공부한 영어가 얼만데. 문법은 또 자신 있잖아? 그렇게 어렵진 않을 거야.'
오랜만에 보는 영어 시험이라 긴장이 되었지만, 그래도 자신감을 장착하고 시험장으로 들어갔다. 시험은 컴퓨터로 진행이 되었다. 해드폰을 끼고 배정받은 컴퓨터 책상 앞에 앉았다. Reading, Listening, Writing 세 파트로 나뉘어있었다(다행히 레벨 테스트에서는 스피킹 시험은 없음). Reading 파트를 그럭저럭 끝내고 listening이 시작되었는데... 나는 당연히 한국에서 보던 영어 시험만 생각하고, 아주 또박또박한 악센트의 원어민이 나와서 간단한 대화, 예를 들어 약속 잡기 등 일상생활의 이야기들, 아니면 공항이나 은행 같은 곳에서 들을 수 있는 정보 찾기 정도를 기대했다.
끝을 흘려 말하는 찐 원어민 영어에, 엄청나게 빠른 속도의 기자의 인터뷰, 게다가 유럽의 경제와 정치적인 내용의 뉴스까지. 전혀 경험해 본 적 없는 리스팅 시험에 나는 너무나 당황해서 머릿속이 하얘졌다. '이걸 지금 나한테 알아들으라는 건가? 이걸 알아 듣는 수준이었으면 내가 영어 공부를 왜 하겠냐.'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스웨덴은 정확한 문법 사용 등의 언어 기술보다는 실생활에서 바로 알아 듣고 쓸 수 있는 실용적인 언어 교육을 추구하고 있었다. 그래서 특히 영어 듣기에서 미국, 영국, 호주, 인도의 억양뿐 아니라, 아주 하드코어의 스코틀랜드 억양이나 거의 흑인 래퍼가 말하는 듯한 빠르고 부정확한 억양, 원어민이 아닌 이민자가 쓰는, 우리 귀에는 아주 생소한 영어 억양까지 아주 다양한 억양에 익숙해지고 알아듣는 것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한다. 얼마나 원어민처럼 혀를 굴려 말하는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외국어 사용에 있어 모국어 억양이 남아있는 걸 존중하는 편.)
그 후 1-2주 정도 지났을까. 나는 이메일로 level 3라는 등급을 통보받았다. '12 동안 한국에서 영어를 공부한 결과가 고작 이거라니. 나는 지금까지 도대체 무슨 공부를 어떻게 해 왔던 것일까. 나는 엉터리 영어를 공부한 걸까? 내 공부 방식이 잘 못 되었던 걸까? 한국 영어 교육 방식이 잘못된 걸까?' 오만가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무엇보다 앞으로가 더 문제였다. level 4 이하의 등급은 스웨덴어로 진행되는 영어 수업 코스를 들어야만 그다음 단계로 갈 수 있다고 했다. 이 코스(스웨덴어로 komvux)는 이민자들을 위한 복지제도로써 모두 스웨덴에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스웨덴어를 모두 잘한다는 바탕하에 마련된 코스인 것 같았다. 하지만 내 상황은 달랐다. 나는 스웨덴어라고는 hej(안녕) 밖에 못하는 상태였고, 그 수업을 신청한들 알아들을 리 만무했다. 관계자는 "먼저 스웨덴어를 배우고 다시 오는 게 어때? 어차피 너 스웨덴에 살 생각 아니니? 그럼 스웨덴어도 필요할 거야."라며 제안했지만, 어느 세월에 스웨덴어로 강의를 이해할 정도로 실력을 쌓아서 온단 말인가. 그리고 나는 당장 대학원에 진학해야 하는데. 시간이 없다고!
이제 난 뭘 해야 하지?
스웨덴에 온 지 단 3개월 만에 벌써 내가 왜 여기에 오기로 결정을 했는지, '그냥 한국에 있었으면 이런 걱정 안 하고 편하게 살 수 있었을 텐데'라는 후회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나의 실력에 실망했고, 남편에게 미안하고 창피했다. 아마 한국에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스웨덴 도착하고 처음 한 날이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