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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보영 Oct 22. 2022

확진자 동거인의 일기

지난 봄의 속풀이

남편이 코로나19 양성 확진을 받았다. 의욕적으로 모닝 루틴을 지켰던 나는 루틴 같은 건 포기하고 남은 가족들을 먹이는 일에 전념하면서 수업 준비도 하고 출퇴근도 했다. 매일 나 혼자 아이들을 재웠지만 그건 나쁘지 않았다. 밤에 둘째 아이가 벌떡 일어나 거실로 달려나가서 뒤쫓아 나가고, 첫째 아이가 쉬 마렵다며 일어나는 바람에 눈을 부비며 그 곁을 지키기도 했지만 이 정도는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아이가 밤에 자다 일어나는 순간, 꿈에 파묻혔던 내 본분이 번개치듯 번쩍 내리쳐서 나를 깨우곤 했으니까. 자연스럽고도 능숙하게 졸음을 잘라내고 아이들의 요구를 들어주다가 아이들이 다시 잠들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끊어진 잠의 끝을 찾아 더듬거렸다.


확진 이후 나흘쯤 지난 날이었다. 그날 아침도 딱히 다를 건 없었다. 햇살을 받으며 내가 원할 때 눈을 뜨던 시절은 이제 기억도 나지 않는다. 보통은 아이들이 옆구리를 쿡쿡 찌르거나 얼굴을 간지럽히거나 갑자기 엉덩이로 내 배를 털썩 깔아뭉갠다거나 내가 대답할 때까지 같은 말을 반복하거나 하다보면 꿈나라에서 누가 내 머리채를 잡고 끌어올린다는 느낌으로 눈을 뜬다. 그날도 평소와 다를 것 없이 뒤숭숭한 상태로 눈을 뜬 후 그다지 밝지 못한 생각들이 삐죽 삐죽 튀어나오려고 했지만 성숙한 어른답게 그것들을 톡톡 치면서 가라앉혔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뽀뽀해주며 사랑한다 말해주고 아침으로 뭘 먹으면 좋겠냐고 평상시처럼 말을 건넸다.



그러다 큰아이가 아빠의 방(일명 ‘코로나 방’)문을 두드렸다. 남편이 방금까지 자고 있던 방이 열리면 공기 중의 바이러스가 문앞에 선 아이에게 끼얹어질까 봐 그러지 말라고 대차게 일렀다. 지금 아빠를 내버려두면 알아서 준비하고 나오실 거라고 하면서. 하지만 그럼에도 아이는 방문을 계속 두드렸고, 아빠의 존재를 잠시 잊고 놀던 작은 아이가 그 소리에 ‘아, 맞다! 저기에 아빠가 있지?’하고 놀라운 발견이라도 한 듯 우다다다 달려왔다. 그리고 거침없이 문을 벌컥 열고, 성큼성큼 뛰어들어갔다. 맙소사! 큰아이는 “안 돼! 안 돼!”하면서 문 밖에 서서 소용 없는 말을 보탰다.



그때였다. 아까 애써 눌렀던 그 ‘삐쭉이’들이 한순간에 쫘악 뻗쳤다. 온몸으로 날카로운 가시를 뻗어낸 괴물 같았을 것이다. 활활 타오르는 눈을 치켜뜨고서 이렇게 엉망인 꼴을 본 적이 없다는 듯 큰아이를 탓하기 시작했다.

“내가 문 열지 말라고 했지? 아빠가 알아서 나오시게 기다리라고 했잖아. 너가 문을 두드리는 바람에 쟤가 들어간 거야.”

이후에 또 어떤 말이 나왔는지 기억이 안 난다. 나는 화가 났던 걸까? 정확히 말하면 현재 인생에 벌어진 모든 일에 짜증이 났다.


아이들의 요구를 들어주고 맞춰주면서 식사를 준비하고 치우는 모든 일에 몸과 마음이 닳아 없어질 지경이었다. 남편이 확진 받은 엄중한 날에 생리를 시작하는 바람에 속으로 욕설을 내뱉기도 했다. 생리통과 철분 부족으로 인한 두통을 참아가며 아이들 챙기고 남편 쉬게 하며 끼니를 챙겼다. 곧바로 부랴부랴 수업 준비해서 왕복 한 시간을 운전해 출근하고, 기운 없는 목소리가 kf-94마스크를 뚫고 나가도록 배에 힘을 주고, 똑같은 소리를 몇 번씩 반복하며 학생들 조용히 시키고 뭐라도 쓰게 하다가 힘없이 집에 오면 저녁 식사를 기다리는 가족을 다시 만난다. 종일 서 있느라 다리가 아파도 곧바로 부엌에 들어가 손을 바삐 움직이며 저녁을 차려낸다. 물론 마음 한 켠에는 ‘환자가 여태 두 아이 육아했으니 나도 챙겨줘야지’ 같은 선의도 있기는 했다. 그렇지만 격리자 동거인의 삶도 혹사이긴 마찬가지였다.



어느새 남편은 조금씩 회복되어 아침에 모닝 루틴도 가진다고 했다. 전날 밤에 나에게 “이제 미라클 모닝은 안 하는 거야?”라고 묻기에 나는 한껏 비웃음을 보이며 “미라클 할아버지가 와도 못 한다!” 응수했다. 그는 내가 짬을 내어 자기 개발을 위해 뭐라도 하길 바라는 욕망을 감추지 못할 때가 있는데, 어제는 아이들 재우다 잠든 나를 굳이 깨워서 씻고 오라고 일으키기까지 하는 것이다. 볼멘소리를 중얼거리며 씻고 나왔더니, 세상에나, 테이블 위에 책이 예쁘게 놓여 있었다. 이번 달 독서모임 책을 이 오밤중에 읽으라고 남편이 친절하게 셋팅해둔 것이다. 무너진 삶을 다시 일으킬 힘이 그에게는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난 아니었다. 내 역할은 우리 일상이 더 무너지지 않도록 지탱하는 것이었다. 그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마음을 살피며 본인 일상의 무너진 부분을 보수하기 시작했지만 나는 혹시라도 가족에게 더 힘든 일이 생길까봐 내내 노심초사 했다. 그 역시 가족을 위해 몸이 부서지도록 헌신하고 있다는 걸 안다. 둘째 아이는 아빠 무릎에 앉아야만 밥을 입에 넣는 아이이고, 첫째 아이는 아빠에게 끊임없이 새로운 놀이를 요구하니까. 그는 아픈 와중에도 묵묵히 모든 걸 받아들이며 마음을 가다듬고 앞으로 가기 위해 자세를 잡는데, 보건당국에게 인정 받은 ‘멀쩡한 나’는 모든 의무가 무거운 짐처럼 느껴져 털썩 주저앉고만 싶었다.


아침에 한바탕 난리를 치르고 나서 남편이 말했다.

“카페 가서 두 시간만 앉아 있다 와.”

나는 말도 안 된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카페? 카페 같은 소리하네” 류의 말로 비죽거렸다. 그는 내 표정이 ‘카페 타임이 필요한 상황’임을 보여주고 있다고 했다.

“나는 화가 난 게 아니라 그냥 웃음이 안 나는 거야.”

내 말에 남편은 유리한 진술을 확보한 변호사처럼 선언했다.

“방금 그 말이 바로 카페가 필요하다는 증거야.”


나는 내 의무를 잊지 않고 점심에 먹을 불고기를 해동시켜놓고 당면은 찬물에 불려두고서야 옷을 갈아입었다. 쭈뼛쭈볏 현관에 선 내게 큰아이가 올 때 주사위 좀 사오라고 했다. 주사위를 사려면 나가야겠네? ‘카페가 필요한 시간’따위 보다 훨씬 뚜렷한 명분을 얻은 나는 당당하게 집을 나섰다.

카페에 와서 마르코 폴로 홍차와 딸기 생크림케이크를 주문했다. 소설을 한 시간 가량 읽다가 속풀이가 필요해 글을 썼다.  

두 시간의 자유를 얻고 천오백 원짜리 주사위 두 개를 사들고 집에 돌아오니 그제야 웃음이 좀 나왔다. 남편은 그 사이 두 번 폭발했다고 한다. 위기를 느낀 큰아이가 아빠에게 사죄의 편지까지 써둔 상태였다. 남편의 얼굴이 꼭 아침의 내 것처럼 보였다. 그럴 계획은 없었지만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기로 했다.



두 아이 태우고 어딜 가야 할 지 몰라 유턴을 몇 번씩 했다. 그러다 드라이브스루로 디저트를 사먹고 놀이터도 가고 숲에 가서 과자 먹다가 나뭇가지랑 돌 좀 줍다가 돌아왔다. 무려 네 시간이 지나있었다. 내가 받은 자유 시간을 두 배로 갚은 셈이다.


서귀포 자연휴양림에 가서 무턱대고 놀았다.





저녁에는 애호박전과 새우미나리전을 부쳤다. 요리 내공이 부족해서 그런지 전을 예쁘게  부치는 날도 있고 산산조각나서 도무지 뒤집을 수가 없는 날도 있다. 다행히도 그날은  부치는 날이었다. 나는 아이에게 “아까 아침에 우리 팬케이크 먹었었지? 이건 한국식 팬케이크야. , 아니지. 우리나라가 먼저 했겠네. 팬케이크가 미국식 전이야. 거긴 역사가 500 밖에  됐어.” 같은 시답잖은 소리를 하며 저녁을 먹었다. 전을 좋아하는 남편이 특히  먹었다. 사실 남편을 위해 일부러 만든 거였다. , 여기가 ‘은혜 갚은 까치세계관인가. 내가 이렇게 까치적(!) 인간이었나.



그날  아이는 소금 아이스크림 얘기를 어디서 들었는지 “소금 아이스크림의 맛은 ‘콤짤콤짤(달콤+짭짤)’하겠죠?”들었. ‘단짠단짠 듣고 헷갈렸던  같지만 그에 비할  없이 귀여운 조어를 듣고서야 깨달았다. 오늘 아침 내가   인간 앞에 무례했구나. 너는  삶에 침범한 존재가 아니고 그저 확장하는 세계인데, 나는 그걸  잊고 궁상맞은 표정으로 인생의 오류를 수정하려는 것처럼 너를 대했구나. 잘못이 없는 너에게 엄마 감정을 뒤집어쓰게 했구나. 부끄러웠다.

잠자리에서 아이에게 아침 일을 진심으로 사과했다. 다행히 웃으며 받아주었다. “엄마가 화내서 속상하지 않았어?” 이내 물으니 아이가 새침하게 돌아누우며 말했다.

“속상은 했어요.”

나는 아이가 잠들기까지 등을 가만히 토닥여주었다. 엉망으로 풀어헤쳐버린 시간의 끝을 잡아 곱게 묶어내고 싶어서 뒤늦게 데워진 따뜻함을 오래 기울였다. 부끄러움과 자책을 흘려보내고 새 마음을 채우고 싶었다. 내일은 달라지고 싶었다.



아침에는 찾을 수 없던 바른 의지가 어디에서 왔을까. 뒤늦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혼자 먹은 딸기 케이크에서, 찻잔에서, 오직 나만 골몰하던 두 시간 속에서 되살아난 힘을. 거기서 녹아 없어진 ‘삐죽이’를 말이다. 남편의 처방은 정확했다.














지난 봄에 쏟아내듯 쓴 글이다.

지금 읽으니 낯설게 느껴질 만큼 글이 날카롭고 나는 또 부끄럽지만 그 시절을 기억에 담아둘 필요는 있는 것 같다. 여기에 세상에서 나만 가장 힘든 사람인 것처럼 푸념을 늘어놓았는데, 이 글을 쓰고 이틀 뒤 나도 확진 판정을 받으면서 상황이 반대로 바뀌었다. 그리고 남편도 나와 비슷한 과정을 겪으며 그 시기를 견뎌냈다.

무너지고 다시 일어선다. 서로에게 빚지고 갚는다. 잘못하면 아이의 용서를 받는다. 나아갈 길을 찾는다. 내세울 것도 없는 지난한 순환을 반복하면 몇 개월 전의 나보다는 조금 나은 사람이 된 기분이 든다. 이 글을 쓰는 오늘은 즐겁게 일을 했고 눈이 빛나는 내 아이와 실컷 놀았으니까. 색채로 가득한 가을 안에서 모두가 수시로 웃었으니까.



그래서 흑백사진 같은 이 글을 올려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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