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다치면 아프다는 걸 모르는 아기가 위험한 물건을 덥석 집으려고 하듯이, 나 또한 세상의 험악함을 아직 몰랐던 아동기 시절에는 겁이 참 없었다.
계단을 내려갈 때는 늘 서너 개를 남긴 시점에서 나머지 계단을 한 번에 폴짝 건너뛰는 것을 좋아했다. 심지어는 지금보다도 짧은 두 다리로 말이다. 넘어져서 팔이라도 부러지면 어쩌려고. 집에서는 심심하면 문을 활짝 열고 문틀의 양 끝을 스파이더맨처럼 손발로 밀어내며 문틀의 끝, 즉 천장 끝까지 올라갔다. 그 높은 데에서 손발의 힘을 놓으며 다시금 땅에 무사히 착지하는 것이 참으로 재밌었다.
또 당시에는 여느 놀이터에서 볼 수 있었던 내 작은 키와 비슷했던 높이의 얇은, 가로 철봉에 살포시 올라앉는 걸 좋아했다. 그 상태에서 손으로 봉을 잡고 휙- 하고 뒤로 고꾸라져서 접힌 두 무릎으로 철봉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 게 매번 이어지는 놀이였다. 넘어질 수도 있다는, 크게 다칠 수도 있다는 생각은 내게 단 한 번도 스치지 않았다.
이렇게 겁이 없던 나는 도대체 어디로 간 걸까? 30대로 접어든 나는 지하철 입구의 수많은 계단에서 넘어져 나뒹굴까 두려워 한 발 한 발 집중하며 내려간다. 하수구 맨홀이 도로에 보이면 밟지 않고 건너뛰어서 지나가고, 콘크리트 대신에 노출 철망이 바닥을 이룰 때면 철망이 부러지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빠르게 건넌다. 나이가 든 걸까? 아니면 철이 든 걸까? 가끔은 이렇게 겁이 많아진 나의 모습에 회의감이 들기도 한다.
그렇지만 다르게 생각해 보면 잃을 게 생겼다는 의미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어릴 때는 내가 가진 것이 무엇인지, 내가 무엇을 잃을 수 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아이이기 때문에 사실 일군 게 많지 않은 상태이기도 하다.
아직 누군가에게는 너무나도 어린 나이일 수도 있는 30대의 내가 이렇게 겁이 많아졌다는 것은, 내가 그만큼 잃을 것이 많다는 의미이기도 한 것 같다. 그만큼 내가 열심히 살아왔다는, 소중한 것들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이다. 역시 겁이 없다는 것은 지킬 것이 없는 상태이거나 과하게 무모하다는 것일 수 있기 때문에 겁이 많아진 어른의 나에 대해 회의감을 크게 느끼지 않기로 한다.
그렇지만 겁이 과해지는 걸 주의할 필요는 있는 것 같다. ‘겁’이 내 생각을 지배하는 순간, 모든 것을 회피하려고만 하는 것이 사람의 본능 같기도 하다. 예로, 나의 이모가 가까운 것이 잘 안 보이기 시작하셔서 다초점 안경을 맞춰볼까 하셨다. 그런데 주변 지인들에게 물어보니, 모두 어지럽고 머리 아팠다며 다초점 안경에 대해 좋지 않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어지럽고 머리 아픈 건 질색하는 나의 이모는 지인들의 의견을 철석같이 믿고 몇 년간 필요할 때마다 일반안경을 벗었다, 꼈다 하는 불편함을 감수하며 생활하셨다.
그렇게 몇 년을 고생한 후에야 결국 다초점 안경을 맞추게 되셨는데, 이렇게 편한 걸 왜 겁먹고 이제서야 했나 싶다고 내게 말하셨다. 나와는 엄연히 다를 수 있는 사람의 말을 괜히 들어서 미리 겁먹고 이제서야 안경을 맞추신 게 너무 후회된다고 덧붙이셨다.
이와 같이 누구나 작은 것에 대해서 겁이 날 수 있다. 사실, 겁이 나도 좋다. 겁은 우리가 안전할 수 있도록 자연이 선물해 준 장치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겁이 내 생각, 감정과 행동을 지배해 내가 ‘겁먹은 상태’가 되면 현명한 선택이 어려워지는 것 같다. 겁이 느껴진다면, 내가 왜 겁이 나는지, 잃을 게 무엇인지 객관적으로 판단한 후에 행동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을 해본다. 적어도 나는 겁이 아주 많은 어른이기 때문에 이런 방식으로 내 감정에 대처하려고 노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