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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민 Jul 15. 2021

아들이 준 깨우침

나만의 시간이 아니라 가족의 시간이었다

‘아이 하나 키우는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      


나는 이 말은 이렇게 바꾸고 싶다.

     

‘노인 한 분을 부양하는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

      

온 마을은 조금 과하더라도, 온 가족이 필요한 것은 분명한 듯하다. 지난해부터 친정엄마가 눈에 띄게 쇠약해졌다는 느낌과 ‘아흔 살’이 주는 묵직한 압박감 때문에 내 마음이 조급해졌다. 친정엄마와 더 많은 시간을 갖기 위해 조기 은퇴도 생각해보았지만, 친정엄마가 원치 않았다. 그래서 호시탐탐 시간을 쪼개고 쪼개어 엄마와 함께 할 수 있는 짬을 만들었다. 엄마가 가능한 한, 편안하고 행복하게 남은 여생을 보낼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골몰했다. 지금 내 몸이 고달파도 나중에 십중팔구 후회할 거이니, 후회할 일을 최소화하고 싶었다.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한 지난해부터 나는 두 집 살림하듯이 생활했다. 친정엄마가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세 끼 식사’를 최대한 지원했다. 친정엄마는 평생을 맛있고 건강한 밥상을 식구들에게 차려내는 것이 본인의 과업으로 생각한 분이다.     


엄마에게 가족의 세끼 식사는 종교처럼 엄숙한 일이다. 그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은 엄마의 무릎 인공관절 수술 때문이었다. 친정엄마는 40대부터 심한 통증을 동반하는 퇴행성관절염으로 정기적인 통원치료를 받았다. 50대 후반부터는 의사로부터 수술을 권유받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인공관절 수술이 도입된 초기여서 쉬이 수술을 받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사실은 의사가 자꾸 수술해야 한다고, 수술밖에 방법이 없다고 해서 병원 가는 것도 부담스러워...”     


인공관절 수술이 보편화되고 성공률도 높아지던 시점에, 엄마에게 무릎 수술을 강하게 권유하니, 엄마가 주저하며 말했다. 당시 엄마의 나이가 70대 초반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엄마는 끝내 친정아버지의 ‘세 끼 식사’ 걱정에 입원을 해야 하는 수술을 포기했다. 자식들이 돌아가며 ‘밥이 뭐가 중요하냐’며 애원과 협박을 해도 막무가내였다. 본인의 사정으로 시집간 딸들에게 폐를 끼치는(아버지의 식사를 준비해야 하는) 것은 ‘엄마의 계산’에는 아예 포함되지도 않았다. 결국 아버지 사후인 80대 초중반에 거의 앉은뱅이 신세가 될 즈음에 수술을 받았다.     


수술을 받고 앉은뱅이 신세는 면했지만, 만족스러운 상태는 되지 않아 좀 더 일찍 수술을 받았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남았다. 여하튼 친정엄마에게 종교와 같은 가족의 세끼 식사 준비는 엄마와 함께 사는 동생 때문에 계속되고 있다. 그러니 나는 엄마가 좋아하는 반찬을 고려하되, 동생이 좋아하는 반찬도 함께 준비하여 엄마의 노고를 덜어주려 했다. 엄마는 반찬을 해오는 나에게 항상 미안한 마음을 표시하지만 동생이 좋아하는 반찬을 보면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요리에 재주도 흥미도 없는 내가 가족들과 친정엄마네 반찬을 준비하는 일은 대단히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직장생활에, 설상가상으로 지난해부터는 코로나로 인해 도우미의 도움을 받던 청소와 세탁 일도 내 차지가 되어 더욱 살림살이가 벅찬 상황이었다.      


퇴근해서 한두 시간 동안 가족들 저녁 준비와 다음 날 엄마네 가져갈 반찬 준비를 하는 날에는 도저히 혼자서 감당이 되지 않았다. 다행히 코로나로 재택수업을 하여 주로 집에 있는 대학생인 아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말하자면 주방보조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그 시간에 그 일을 다 해낼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코로나와 함께 도우미 도움은 받지 못했지만 아들의 도움을 톡톡히 받고 있었던 것이다. 주방보조는 물론이고, 설거지며, 세탁물 이동, 청소 등 호시탐탐 아들을 불러 부탁을 했다. 퇴근하여 집에 돌아와 가사 일을 할 때면 내 입은 아들의 이름을 달고 있었다.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방에 있는 아들을 불러내야 하기 때문이다.      


‘항상 도움을 주는 아들’의 존재를 내가 특별히 인지하지 못했던 것은 아들이 나의 요청에 흔쾌히 그리고 자연스럽게 응했기 때문이다.       


결혼 전 나를 되돌아보니, 엄마는 나에게 주로 밖에서 처리할 일들은 부탁하곤 했다. 그때마다 나는 항상 ‘토를 달았던’ 거 같다. 하기 싫은 것은 차치하고 예기치 않은 부탁이니 나의 일정에 조정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탁하는 엄마의 마음은 편치 않을 거란 생각이 내가 엄마 된 지금 느끼고 있다.     


결혼 후인 얼마 전까지도 나는 그러했다. 친정엄마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최대한 하려고 노력했다. ‘엄마가 필요할 거라고 생각되는 것들을 계획 세워’ 짬 되는대로 한다. 그래서 ‘내 계획’에 들어있지 않은 것을 엄마가 부탁하면, 나는 ‘흔쾌히’ 들어주기가 힘든 상황이 된다. 그 순간 난감한 상황이 나의 얼굴에 나타나고, 그럴라치면 엄마는 금방 미안해하는 모습이 역력해졌다.       


‘아들보다 못한 엄마’였던 것이다. 나의 요청에 항상 ‘예’하며 도움을 주는 아들 덕에 마음 편히 아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것처럼 나도 친정엄마에게 그런 딸이 되리라 생각했다.


"퇴근하는 길에 외할머니댁에 다녀오실 거죠?"


어느날 출근길 배웅 인사를 하던 아들이 내 손에 들린 묵직한 장바구니를 보더니 하던 인사말이다. 아들은 내가 요즘 부엌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진 것이 외할머니 때문이라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던 거다. 그 묵직한 장바구니에 어제저녁 엄마가 한 반찬 중 식탁에 오르지 않은 반찬들이 들어있음을 아들은 짐작한 것이다.


지난 1년여 동안 내가 친정엄마를 위해 할애했던 많은 시간은 나만의 시간이 아니라 우리 아들과 남편, 딸의 시간도 있음 깨닫는다.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은 제한적이기에, 우리 가족들이 내가 할 일을 덜어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시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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