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는 죄책감에 시달릴 때
이불을 덮어쓴 저의 유년시절은 그리 불행하지도 않았지만 유난히 날 선 기억이 몇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열세 살의 제가 제 목을 조르던 기억이었습니다. 검정 스탠드 앞에 불을 켜고 책상 앞에 앉아 어린 두 손으로 지긋이 목을 졸랐습니다. 온몸에 힘이 풀려 절로 손이 툭 떨어질 때까지 그렇게요. 왜 그랬는지 구체적인 이유는 생각나지 않습니다. 그저 죽고 싶다는 생각만이 가득 들어찼는데, 왜였는지 도무지 생각이 안 나서 죄책감이 많이 듭니다. 뭐가 그렇게까지 힘들다고 그런 짓을 했던 걸까 오늘까지도 어린 저를 질책하고 있습니다.
많이 힘들었던 가족들 사이에서 제가 할 수 있는 도움요청은 신체화된 증상에 대한 어려움을 이야기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자주 급체를 하고 온갖 스트레스성 염증들, 월경통 등등. 왜 이렇게 아픈 곳이 많냐며 매번 타박을 들으면서도 말하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면 분명 더 힘든 순간이 찾아왔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게, 그래서 관심을 받고 치료를 받는 과정이 조금씩이나마 마음의 응어리를 해소해 줬을 겁니다.
그렇게 죽을 뻔하지도 않고 너무 아파서 응급실에 실려간 적 한 번 없는 몇 년이 흘렀습니다. 마음속 불안은 그저 그런, 누구나 그럴 수 있는 예민함으로 각인되었고 손에 잡히지 않는 공부는 부모님에 대한 반항이 되었죠. 우울한 스스로가, 공부에 집중하지 못하는 제가 스스로도 참 미웠습니다.
우스갯소리로 기절해서 응급실에 가보는 게 버킷리스트라는 말을 하곤 했습니다. 몸과 마음에 존재하는 고통이 느껴지는 만큼 드러나질 않아 항상 답답한 마음이 가득 차있었습니다. 터질 것만 같은 풍선이 되어 집에만 오면 매일같이 울고 우는 일상의 반복이었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던 저에게 고3의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이제는 공부를 해야 했고, 입시를 준비해야 했습니다. 온 신경을 집중해서!
*신체화: 심리적 조건에 따라서 신체증상이 생기는 과정을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