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선 / 반려종의 시선 2장. 아픔과 돌봄에 대하여
가을이 되니 해가 짧아졌다. 짧아진 해 만큼 우리의 저녁 산책에 따라오는 노을은 조금 더 길어졌다. 이 시간이 되면 저녁 산책을 마친 뒤 집으로 돌아와 신발을 벗고 현관에 앉은 채로 작은 네 발을 번갈아 가며 닦이곤 한다. 산책을 막 마친 발이란 열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상자와도 같다. 까맣고 반질반질한 발바닥 쿠션일 수도 있고, 불상의 대변을 밟고 들어온 척결의 대상일 수도 있다. 여름에는 습기가 져서 발 사이가 지저분해지고, 겨울에는 건조한 날씨 탓에 발바닥도 말라 있다. 발바닥에 털이 많으면 이것저것 묻어나는 것이 많고 발바닥에 털이 없으면 나름 깨끗하다. 녀석과 함께 지낸 8년이라는 시간 동안 ‘산책을 하고 난 강아지의 발’에 대해서 적으라고 하면 책 한 권은 쓸 수 있을 만큼의 이야기를 벌었다. ‘모두 내 덕분이지?’ 그렇게 묻는 듯한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심술이 난다. “이제 끝났으니까 가봐.” 통통한 엉덩이를 두어 번 살짝 두드리면, 번개 같은 속도로 거실로 달려가는 녀석의 이름은 가을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는 가을에 만났다. 대충 지은 이름이긴 하지만 가을을 닮은 외모와 선선한 성격이 이름과 꽤 잘 어울리는 녀석이다. 가을이가 거실의 카펫을 점령하는 동안 겉옷을 벗고, 물 한 잔을 마신 뒤 거실 소파에 앉는다. 그럼 등이 소파에 닿기도 전에 한쪽 허벅지에 묵직하고 따뜻한 것이 기대어 온다. 혹은 기대어 올 것이라 기대한다. 녀석은 조심스레 자리를 잡고 한 바퀴 몸을 돌려 웅크리고 나는 눈을 감고 가을이의 체온을 느낀다. 매일 반복되는 이 시간이 내게는 아주 길게 느껴진다.
가을이에게 전에 없던 이상행동이 보이기 시작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아침에는 만주벌판을 뛰어다닐 기세로 기운차게 뛰쳐나가는 녀석이, 밤이면 길을 걷다 말고 갑자기 멍하니 서서 5분이고 10분이고 눈도 깜빡하지 않은 채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서 있다. 아무리 앞에서 손을 흔들어도, 이름을 불러도 내 강아지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제야 나는 ‘아참, 이제 귀도 안 들리고 눈도 한쪽만 보인다고 했었지.’ 처음 의사 선생님한테 들었을 때는 도무지 그 순간이 잊히지 않겠다 싶을 정도로 충격이었는데 이상하게도 자꾸만 까먹게 되는 그 사실을 또 깜빡 기억해 낸다. 내 강아지가 나이가 벌써 열서너 살이라는 게, 왜 이리 어색하기만 할까.
우리가 같이 살기 시작한 건 가을이가 대여섯 살 때부터였다. 길거리에서 보호소로, 보호소에서 다시 유기견 임시보호 카페로, 가을이가 얼마나 긴 시간을 집이 아닌 곳에서 살았는지 나는 도저히 알 방도가 없지만 분명한 건 처음 만났을 때보다는 지금이 훨씬 좋아 보인다. 그래서인지 더욱 가을이가 늙은 강아지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산책을 나가는 현관에서부터 이미 활짝 벌어지는 입, 기세등등하게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그 얼굴. ‘아무리 봐도 이 정도면 엄청난 동안인데 혹시 펫 보험사에선 9살 정도라고 봐주지 않으려나?’ 하는 보험 사기꾼 같은 생각을 하는 나를, 녀석은 ‘그러면 못 쓰지 인마….’ 하는 표정으로 쳐다본다. 나는 머쓱하면서도 이내 슬픈 마음이 된다.
재작년까지만 해도 나이 든 강아지와 함께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 가을이가 구석구석 아프고 나서부터는 늙고 병든 강아지라는 사실을 머리보다 피부로 먼저 이해하게 되었다. 강아지가 늙는다는 건, 일상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평소처럼 간식이나 밥을 챙겨주려다가도 혹시 이걸 먹고 어디 아프진 않을까 싶어 괜히 영양성분을 한 번 더 살펴보게 되고, 급기야 올해부터는 간에 문제가 있어 식사량을 제한하기 시작했다. 가을이가 그렇게나 좋아하던 간식은 가뭄에 콩 나듯 주면서, 가을이가 먹는 처방식에 맛없는 가루약은 꼬박꼬박 섞어주고 있다. 아침에는 백내장 약을 눈에 넣느라 아침부터 강아지를 붙잡고 씨름을 하고, 저녁에는 온몸으로 싫다는 표현을 하는 녀석을 강제로 끌어안고 이빨을 닦인다. 나와 그러고 있는 그 시간이 녀석에게 즐거울 리가 없다. 아니, 사실 내가 즐겁지 않다. 혹시라도 가을이가 ‘난 아무렇지도 않은데? 나는 이 시간들도 좋아.’라고 말한다면 정말로 가을이 얼굴을 볼 면목이 없을 정도다. ‘그 아픔까지 사랑한 거야….’라고 노래하던 가수는, 정말 그 아픔을 사랑한 게 맞을까?
지금 세상에서 가을이를 제일 사랑하고, 또 제일 괴롭히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나일 것이다. 녀석의 가장 친한 친구였던 나는 이제 강아지의 일거수일투족에 간섭한다. 먹는 것부터 시작해서, 잠자리, 걷는 방법, 만나는 친구, 혼자 있는 시간, 혼자가 아닌 시간, 하다못해 배변까지도. 예전에는 괜찮았던 것들이 날이 갈수록 괜찮지가 않다. 24시간 붙어있어야만 하는 것도 힘들고, 말 못 하는 강아지가 아파하는 것을 눈앞에서 지켜봐야 하는 것도 고되다. 우리에게 앞으로 시간이 얼마나 남아있을지 알 수 없는데 앞으로 이것보다도 힘든 날들이 기다리고 있다면 나와 가을이가 끝까지 버틸 수 있을까. 이제 조금 있으면 걷지 못하게 될 것이고, 앞을 보지 못할 수도 있는 강아지와, 무엇보다 나는, 내 세계의 모든 것이 가을이로 채워져 있는 나는, 그때에도 괜찮을 수 있을까? 결국 무심코 내 걱정을 하고 만다.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정말 나 자신이 한심해서 죽을 지경이다.
그런데 최근 펫로스 증후군에 관한 기사를 보다가 믿고 싶지 않은 한 줄을 읽게 되었다. ‘반려동물의 마지막을 함께하는 반려인의 수는 10명 중 2명’이라는 것이다. 기사에 나온 내용인데 출처도 없고 근거도 없다.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그 한 줄은 한참이나 머릿속에 남아 생각의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반려인 10명 중 2명만 반려동물의 죽음을 경험한다면, 나머지 8명은 돌봄을 포기한 것일까? 그건 경제적인 사정일까, 아니면 그냥 나쁜 사람들인 걸까? 내가 그들의 사정을 모두 이해할 수 있을 리 만무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 8명 중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1명의 사정에 대해 궁금해졌다.
그는 강아지와의 마지막 동행을 끝까지 함께 하지 못했다.
이름도 모를 그 사람이 왜 그리도 신경이 쓰이는지. 여느 때 같은 산책을 마치고 현관에 앉아 가을이 발을 닦이면서 그가 놓친 것에 대해서 생각했다. 아마도 그는 죽어가는 강아지의 작은 몸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주인을 찾는 강아지의 눈빛을 읽지 못했을 것이다. 가족과 친구들이 건네는 따뜻한 위안을 듣지 못했을 것이고, 오히려 ‘네가 키우던 개는 어딨어?’라는 질문에 평생 대답하지 못한 채로, 혹은 거짓말을 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병들고 늙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게 짖는 사랑스러운 울음소리를 듣지 못했을 것이다. 기운이 남아 있을 때 방 안을 종종 걸어 다니면서 휘청이는 모습을 보지 못했을 것이고, 여전히 따뜻하고 묵직한 그 털뭉치가 그를 찾는 순간들을 외면했을 것이다. 그 밖에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돌봄과 사랑의 기회를 모두 걷어찬 채로, 그는 ‘반려동물이 없는 세계’로 홀로 외로이 떨어졌을 테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가을이와 눈이 마주쳤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어서 발이나 마저 닦으라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 순간, 나는 고개를 들고 가을이가 발을 내밀고 앉아있는 현관에서부터 가을이 가슴줄과 외출복을 넣어두는 선반장을 지나 부엌 한편에 놓여있는 가을이의 식탁, 거실에 놓여있는 가을이의 집까지 이어져 있는 익숙한 파노라마를 바라보았다. 나는 지금, 이 강아지의 세계에 있구나.
생각해 보니, 나는 그가 가지지 못한 모든 기회를 가질 수 있다. 나는 아직은 뛸 수 있는 강아지의 경쾌한 뒷모습을 볼 수 있다. 비록 한 쪽 눈이나마 나를 바라보며 꼬리를 흔들어 주는 강아지와 눈 인사를 할 수도 있다. 그러다 결국 두 눈이 보이지 않으면, 그때 내가 길이 되어 줄 수 있고, 걷지 못하게 되면 귀여운 유모차에 태우고 다닐 수도 있다. 언젠가 많이 아파지면 천사처럼 잠든 얼굴을 쓰다듬어 줄 수 있고, 운이 좋으면 마지막 이별의 순간은 내 품에서 함께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고 나면 나는 친구들과 가족들이 건네는 따뜻한 위안을 받고, 녀석이 얼마나 사랑받은 강아지인지 자랑하며 언제고 가을이와 찍은 사진을 다시 꺼내어 볼 것이다. 나는 그렇게 가을이라는 세계가 끝나는 순간을 슬플지라도 생생하게 기억할 것이다.
그러고 보면 강아지를 부탁하면 맡아주는 친구들이나, “혹시 강아지 데리고 들어가도 될까요?”라고 물어볼 때 좋다고 말해 주는 카페 사장님들이나, 길을 걷다가 “너 참 예쁘다. 이름이 뭐니?”라고 강아지의 이름을 물어봐 주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 역시 내 곁에 가을이가 있기 때문에 나를 도와주고, 정서적으로 호응해 주는 ‘가을이가 있는 나의 세계’의 일부분이다. 애초에 가을이가 없다면 내가 알 수 없었을 타인의 따뜻함은 새삼 놀랍게 다가온다.
아침 산책마다 호흡하는 맑고 차가운 공기와, 저녁노을이 들어오는 거실 소파에 앉아 눈을 감고 느끼는 고요의 시간마다 늘 가을이가 함께 있다. 나에게는 그 시간을 통해 위로받은 무수한 순간들이 있고, 정서적인 돌봄을 이 작은 강아지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받아오고 있었다. 그 따뜻한 세계의 시간들은 나 혼자 만든 것이 아닌 가을이와 내가 함께 만들어 온 것이다. 내가 그간 느껴온 행복의 절반은 나에게, 나머지 절반은 나의 반려견에게 주어져 있다. 물론 언젠가는 반드시 ‘반려동물이 없는 나의 세계’가 시작되겠지만 그것은 아직도 진행 중인 ‘반려동물이 있는 나의 세계’가 행복하게 끝난 뒤의 이야기다.
어느새 해가 짧아져 버린 가을이 지나가고 있다. 다가올 겨울을 보내는 동안 우리의 밤은 낮보다 더욱 길어지겠지만 그러한 밤들 사이에도 우리가 선택한 행복은 노을이 지는 그 소파에 늘 앉아 있을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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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선
2016년에 만난 가을이라는 이름의 푸들과 8년째 함께 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