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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기 왕국을 떠나는 소리

금현 / 반려종의 시선 1장. 사랑과 돌봄에 대하여

   소리가 사는 솔기 왕국은 24시간 소비를 촉진하고 부추긴다. 소비하는 백성이 최고라면서도 백성을 우습게 알고, 왕국은 생산자 집단을 비호한다. 왕국은 유행을 따르고 더 많이 소비하라 유혹하면서 소비하는 백성을 호구 잡는다. 솔기 왕국에서 여성의 노동은 평가 절하되고 자주 성형과 다이어트를 요구받으며 사치와 허영의 꼬리표까지 따라붙는다.


   “내가 입는 솔기가 곧 가치관!”

   “한 끗 차이로 고급미 up! 이렇게 입으면 명품 솔기 입었냐는 질문 받으실 거예요.”

   “저렴하게 ‘명품’ 같이 솔기 입는 법; 솔기 잘 입는 사람들의 비밀; 적은 돈으로 사서 부티 나게 입는 법”


   이제는 인싸들까지 가세해 소비를 장려한다.


   솔기를 소비하지 않고 솔기 왕국에서 버티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소비하고 소비하며 또 소비해야 솔기 왕국의 애국자가 된다. 솔기를 소비하지 않는 백성이 있다면 추방당할 각오부터 해야 한다.




   “도대체 이게 뭐야? 중요한 거 다 들었는데….”


   소리는 당황하고 속상한 마음을 반려인에게 뱉어냈다.


   “당신 탓이야. 가방을 왜 지하철 선반 위에 놔두고 내리냐고!”


   반려인 역시 혼란스러웠다. 역무실 CCTV로 확인하면 찾을 수 있다며 소리를 안심시켰다.


   “가방에 든 게 100만 원어치도 넘어.”


   소리가 아끼는 물건들과 소중히 건네받은 가족의 선물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몇 년 전 영화제에서 열 편의 영화를 본 기념으로 받은 빨간색 백 팩. 백 팩의 첫 외출 날, 사달이 났다. 소리가 처음으로 비싼 값을 치르고 산 전문가용 매직기에 늦게 결혼한 언니를 격려한다고 여동생이 자신의 결혼식 때 장만한 한복 두루마리와 속바지가 있었다. 엄마가 아끼던 아담한 고추장과 된장 단지며 엄마가 선물한 옷가지들을 꾹꾹 눌러 담았다. 이외에도 소리가 아끼는 물건이 백 팩에 꽤 많았다.


   소리는 역 바닥에 퍼질러 앉아 통곡하고 싶었다.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결혼 후 첫 추석을 쇠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어이없게도 지하철 선반에 선물이 가득 담긴 가방을 두고 내린 것이다. 금방 깨닫고 역무실의 CCTV를 확인했지만 사각지대였고, 빨간 백 팩을 갖고 내리는 승객은 없었다. 기적을 바라며 유실물 포털 사이트에 유실물 등록을 하고 몇 주를 기다렸다. 끝내 찾았다는 소식은 들을 수 없었다. 실성한 사람처럼 한 달을 허우적거렸다. 고작 옷가지가 아니었다. 소리를 빛내는 반려 존재였고, 반려가 될 존재였다.




   솔기는 몸을 예민하게 인식하고 수용할 때만 온전히 감각되는 반려 존재다. 몸을 주체적인 제 몸으로, 고유하고 소중한 반려로 수용하기 전까지 솔기는 소리에게 없는 존재, 보이지 않는 세상이었다.


   소리 엄마는 솔기를 잘 만들었다. 무엇보다 딸들에게 솔기를 지어 입히는 걸 자랑스러워했다. 커다란 해바라기 문양의 멜빵 치마를 소리에게 입혀놓고는 한참 동안 자신의 솜씨에 감탄했다.


   “아이고, 솔기가 좋긴 좋네. 소리 얼굴이 확 피네.”


   소리가 첫 출근을 앞둔 때였다. 소리 엄마는 중년 여성이 즐겨 찾는 브랜드 매장으로 소리를 데려갔다. 갈색과 검정, 와인색의 재킷과 발목까지 내려오는 검정과 회색 롱스커트를 샀다.


   “다 큰 남자 애들한테 젊은 선생이라고 무시당하면 안 되잖아.”

   “이참에 머리도 아주 짧게 치자. 긴 머리 여선생은 애들이 맞먹으려 들 거야.”


   그렇게 소리는 30대 중반의 노련한 솔기로 20대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모두 엄마 작품이었다.


   “엄마 말대로 하면 아무 탈 없어. 어디 가든 뚱하니 있지 말고 활짝 웃어. 먼저 걸레 들고 일하고. 그래야 사랑받는다!”


   ‘넌 가만히 있으면 쓸모없어. 먼저 웃고 앞장서서 일해야 인정받는다’는 말은 소리에게 너 말고 타인을 우선하라는 메시지였다.


   몸과 가장 밀착한 반려 존재가 솔기였는데, 솔기를 알려고도 친해지려고도 하지 않았다. 몸과 감정을 표현하고 취향을 드러내는 솔기의 매력은 더더욱 몰랐다. 신경 쓰지 않아도 솔기를 직접 만들어 주거나 사다 주는 엄마가 있었으니까. 소리는 자기 몸을 사랑하거나 수용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직업이나 자산이 아닌 존재 전체로 수용 받는 경험을 했다. 그 경험 이후 비로소 몸과 자신을 통합적으로 볼 수 있었고, 몸을 사랑하는 만큼 솔기에 대한 관심도 생겼다. 입고 싶은 솔기와 어울리는 솔기의 차이를 알았고, 피부에 맞는 색과 옷감, 맵시와 디자인을 살피고 공부했다. 솔기를 향한 소리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자신을 사랑하는 길로 이끌었다. 몸과 감정, 취향을 돌보고 존중하는 일이 곧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니까.


   물론 부작용도 있었다. 솔기에 대한 지나친 관심은 애착과 중독으로 발전했다. 솔기 가격이 저렴하다고 느끼는 순간 곧바로 충동구매 신이 발동해서 쇼핑 한 번에 수십 벌씩 구매했다. 매일 다른 옷으로 외출하는 즐거움이 커지는 동시에 타인의 시선과 인정을 바라는 마음도 높아졌다. 그즈음 직장 동료로부터 옷에 관심이 많으니 그쪽으로 일해 보는 게 어떠냐는 냉소적인 제안을 받았다. 소리는 당황했다. 자신의 가치는 지워지고 솔기만 도드라지다니. 솔기에 몰입한 대가는 혹독했다.




   “중요한 솔기 가방을 두고 내리다니, 보기보다 멍청한걸.”

   “소비하지 않고 가족들에게 얻어 입겠다고? 왕국을 망칠 셈인가. 몹쓸 사람일세.”

   “그나저나 요즘 젊은이들이 문제야. 중요한 게 뭔지 도통 모르거든. 솔기보다 중요한 게 어디 있다고? 몸 안에 잘 지녔어야지.”


   출근길에 뒤통수가 유난히 따가웠다. 남 말하기 좋아하는 솔기 왕국 사람들이 소리의 가방 분실 사건을 화젯거리로 삼았다. 들으라고 하는 빈정거림인 줄 알면서도 저러다 말겠지 하며 소리는 무심한 척 지나쳤다. 마음은 몹시 쓰렸지만.


   어느 날 멍하니 방을 둘러보던 소리는 빽빽하다 못해 서로 밀치며 다투는 솔기가 눈에 들어왔다. 솔기가 방치되고 있었다. 가방 분실 사건이 촉발이었지만. 이미 마음에 균열이 생겼다. 며칠을 고심하던 소리는 결국 솔기 왕국을 떠나기로 했다.


   이웃 왕국에서는 단번에 술이나 담배를 끊는 사람을 독하다고 했지만, 솔기 왕국에서는 추방되지 않고 자발적으로 솔기 왕국을 떠나는 이를 독하다며 손사래를 쳤다. 소리가 떠나는 날, 몇몇이 덕담인지 악담인지 헛갈리는 말을 한 마디씩 뱉었다.


   “분명 다시 돌아올 거야. 여기만큼 화려하고 멋진 곳도 없잖아. 암, 그렇고말고,”

   “다른 데 간다니 붙잡을 수도 없고 아쉽다. 부디 잘 살아요. 분명 솔기 왕국이 그리울 테지만. 언제든 오고 싶으면 다시 오시고. 소리 님 자리는 여기니까.”

   “떠날 사람은 떠나야지. 독하다 정말, 소리 씨. 어떻게 결심했대? 누구도 떠날 엄두를 못 내는데. 소리 씨, 뒤돌아보지 마요. 나쁜 기억은 훌훌 털고 정말 가볍게 떠나.”


   그제야 떠난다는 실감이 났다.


   소리는 솔기 왕국에서의 추억을 노트에 담았다.


   - 솔기 왕국에 처음 왔을 때 정말 신기하고 황홀했어. 진짜 좋았어.

   - 나중에 솔기와 친해져서 “나랑 잘 지내보자. 널 더 알고 싶어.”라고 말했을 때 솔기 

     네가 그랬지. “나도 널 알아가고 싶어. 나를 입을 때 네 감정이 어떤지, 어떤 감촉과 

     디자인을 좋아하는지 꼭 말해줘.”라고 했을 때 난 네게 빠져들었지.

   - 솔직히 즐겨 찾는 솔기보다 외면하는 솔기가 많아져서 네게 무심했어.

   - 몸에 안 맞는 솔기를 억지로 구겨 넣을 때 아프다 소리치는 널 애써 외면했어. 그땐 

     미안했어.

   - 자꾸만 소비를 강요하는 솔기 왕국이 싫었어. 제발 그만하라고 소리치고 싶었지.


   한 줄 한 줄 솔기 왕국에서의 기억을 써 내려가는 소리의 눈자위가 자꾸만 흐릿해졌다. 소리는 눈을 끔뻑끔뻑하며 눈 주위를 꾹꾹 눌렀다.


   ‘우리 다시 만날 때는 정말 잘 지내보자.’


   솔기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하는 소리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

금현


지금을 살고, 매순간 현명하게 선택하는 현실 생활인.

필력과 마음 근력을 장착한 대체 불가능 창작자.

모든 장르에 겁 없이 도전하는 장르 탐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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