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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나로 살 거야

by 청초마녀

간밤에 예약한 통영 호텔을 취소했다. 투숙 하루 전이라 숙박 업계의 규정에 따르면 취소를 하나 안 하나 아무런 의미가 없지만, 인생의 반을 잔머리로 살아온 나에게는 얼마든지 전액 환불받을 수 있는 '논리'가 있었다. 5번을 예약하면, 평생 엘리트 회원으로 10% 추가 할인을 해 주겠다는 00어때의 마케팅에 끌려 줄곧 이용해왔던 00파크에 등 돌렸던 터. 하지만 막상 엘리트 가격으로 예약하려고 하면 오류 발생 메시지만 떠서, 할인받느라 예약-결제 구간을 반복하고 있느니, 안 받고 떨어지겠다는 심산이었다. 그런데, 밤새 마음이 바뀌었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어느새 마음속으로 다가온 '통영'을 거니는 것이 아니라, 요 며칠 미적지근하게 감도는 무력감의 원인이 무엇인지, 나 자신을 차분히 다시 읽는 것이었다.


몸에 살이 붙는 걸 느끼면서도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는 나. 알량한 글재주에 대한 의심과 믿음 사이에서 방황하는 나. 아빠, 아빠, 오빠로 이어지는 친정 식구들의 전화를 애써 거부하는 나. 도무지 한 몸에 공존하기 힘든 내가 심술궂게 버티고 있어서, 좋았다가 나빴다가 왔다 갔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뭐가 있긴 있는 것 같은데…' 축 처진 몸과 푹 가라앉은 기분의 근원은 어디에 있는 것이냐? 라고 물으려니, 원인을 하나로 특정할 수 없지만, 이것만은 분명했다. 이대로 괜찮을까? 하는 음습한 불안감. 솜씨 있는 분의 반찬과 새로 들인 식기세척기 덕분에 일상을 유지하는데 많은 품이 드는 것도 아니고, 그저 느슨하게 책 읽다가 시간 대비 출력량이 낮은 일(글쓰기)을 하고 하루를 매듭짓는 삶이, 어쩐지 너무 쉽게 사는 것 같다는 자책감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내게 결핍이 없는 삶을 감사하라고, 치열하게 사는 사람들은 그럴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났기 때문이라고 말해주는 이가 있었지만, '그래. 이 잉여로운 삶에 감사해야지? 감사하자' 다짐하고 뒤돌아서면 다시 안개 속에 갇힌 기분이었다. 뭔가 더 바삐 움직여야 할 것 같은, 뭔가 더 촘촘한 하루를 보내야 할 것 같은 기분. '왜… 나는 늘 빚진 기분으로 살아가는 것일까?' 가만 생각해 보니 내 주위엔, 너는 이렇게 이렇게 하는 게 마땅해, 라고 분주히 내 역할을 규정하려 드는 사람들이 있었다. 너는 집에서 밥 차려주는 여자라고, 집에 있다가 남편을 반길 의무가 있는 여자라고 자꾸만 최면을 거는 내 친정 부모들 말이다. '그래서, 두 분은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했습니까? 제 기억엔 바람 잘 날 없었던 것 같은데요?'라고 반박해도 소용없다. 그분들은 자신이 살아온 날들로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는 렌즈를 벗을 생각이 없으니까.


때론 생각한다. 여자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것들,이라 여겨지는 사회화된 역할에 나를 가두고 작게 만들려는 이유가 무엇인지. 혹시, 엄마 자신이 두 오빠와 여동생 사이에서 샌드위치로 자라느라 자신이 가진 재능과 가치를 최대한 꺼내 본 경험이 없기에, 은연중에 딸인 나 자신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이렇게 살았으니 너도 당해봐, 하는 앙금이 가라앉아 있다가 뒤틀리고 흔들리면 마음이 혼탁해져서 말도 어지럽게 내뱉는 것인지…. 그래도 아빠만은 내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든든한 백그라운드라고 여겼는데, 남편 잘 챙겨라, 그만 돌아다니고 집에 있어라, 라고 말할 때는 엄마와 한마음 한뜻으로 움직이는 게 못내 섭섭했나 보다. 어려서나 지금이나 부모라는 존재로부터 정서적 안정을 얻지는 못하는구나, 하는 허탈함이 나를 가시 많은 나무로 만드는 걸 보면.


하지만 이제 나를 부정하는 말, 속박하는 말들은 적극적으로 거부하기로 했다. 아빠의 부재중 전화를 보고도 애써 외면하는 지금의 상황이 마음의 평온을 유지하는 데 퍽 걸림돌이 되긴 하지만, 단호히 보여주고 싶었다. 앞으로 내 삶을 존중하지 않는, 더불어 죄책감까지 안기는 말은 사양하겠다고 말이다. 그리고 기회가 있을 때 툭 터놓고 얘기하고 싶다. 나에게 행동 양식을 정해주려고 하기 전에, 두 분이 잘 사는 모습을 보여달라고, 부모라는 존재 자체로 비빌 수 있는 마음의 언덕이 되어달라고 말이다. 이렇게 적고 보니, '너는 어쩜 이렇게 사랑스럽니~' 하며 사랑스러운 눈빛을 발사하다가, 어느새 건들지 말라고 까칠하게 구는 내 모습이 엄마의 그것과 닮아있음을 느낄 때면, 나란 인간도 참 대하기 힘든 사람이구나, 하는 씁쓸함을 피할 수 없었다.


통영 여행을 미루고 집에 있긴 그래서 남편의 제안에 따라 나섰던 고창 나들이. 비 맞으며 고창읍성의 성곽길을 따라 걷고 있는데, 근방에 있는 대나무 숲에서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 웃음소리가 들리는 게 감지되었다. 깔깔깔깔깔깔깔. 그렇게 기분 좋은, 듣고 있으면 덩달아 행복해지는 웃음소리를 따라가,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만끽하고 있는 사람들을 지켜보는데, '즐기는 것으로 충분하구나' 라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아름다운 것을 보고, 맛있는 것을 먹을 때는 나를 좋아해 주지 않는 사람을 미워할 필요도, 안 풀리는 글을 떠올리며 찡그릴 필요도 없다는 것 역시. 언젠가 존경하는 작가님도 내게 말씀하지 않으셨던가. 편안하게 하려 하지 말고, 불편하더라도 평안함을 추구하라고, 그러면 된다고. 그래.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에게 마음의 중심을 내어줄 것이 아니라, 나를 잘 써먹을 수 있는 방법을 찾으며 내 안에 고요히 머물면 되는 거였는데, 그거면 충분했는데 왜 그리 심각했는지….


무거운 짐을 내려놓으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부담감, 불안함을 덜어내고 즐거이 오늘의 '진로'를 마셨다. 그런데도 자꾸 중심을 잃고 흐트러진다면? 그땐 아무 생각 안 하고 밖으로 나가야겠다. 동네를 산책하든 산에 오르든 일단 걸어야겠다. 그렇게 마음에 선선한 공기 한 줌 불어넣는 거다. 내가 나를 돌보기 위해, 나를 잘 대접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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