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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희수 Mar 31. 2023

현실판 기생충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마음이 쉴 공간   

‘현실판 기생충’ 이 짧은 생각에 거창한 제목을 붙여보았다.


그날은 저녁밥도 든든히 챙겨 먹었겠다, 기분이 좋았다. 입가심으로 아이스크림까지 챙겨 먹었으니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저녁이었다. 그때였다. 남편이 운을 뗐다. “나갈래?” 집 근처에서 축구공을 찰만큼 널찍한 장소를 발견했단다. 소화도 하고 가볍게 운동이나 할 겸 밖으로 나가자는 것이다.  당시 우리는 부산에서도 상가밀집지역으로 꼽힌다는 연산교차로 인근에 살고 있었기에 나는 의심부터 앞섰다. "근처에 정말 그런 곳이 있다고?" 자신만만해하는 남편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정말이라는 남편 말이 믿기지 않았지만 속는 셈 치고 대충 신발을 구겨 신고 길을 나섰다.


10분, 20분... 빼곡한 빌딩 숲을 헤치며 걷기 시작한 지 어느덧 30분. 송골송골 이마에 땀이 맺히기 시작하자 슬슬 짜증도 밀려왔다. “오빠 언제 도착해?” “다 왔어. 조금만 더 가면 돼” 남편은 내 눈치를 살피며 ‘조금만’이라는 말로 나를 진정시키려 했다. 땀과 짜증이 뒤엉켜 온몸이 범벅이 되었을 때쯤 ‘그곳’에 드디어 도착했다.


프리미엄. 대단지 아파트.


"여기라고?" 농담은 아니겠지라는 눈빛으로 남편을 쳐다보자 남편은 진지한 표정으로 되받아쳤다. 대단한 비밀을 나에게만 특별히 알려준다는 듯 귓속말로 속삭였다. "사실... 이 아파트 단지 안에 풋살장이 있어." 오랫동안 눈여겨봐 둔 공간이란다. 공원도 아니고 운동장도 아니고, 여기를 오자고 이 야심한 밤에 그 먼 길을 걷고 걸어왔단 말인가. 어이가 없었지만 걸어온 시간이 아까워 속는 셈 치고 안으로 들어가 보기로 했다.  


하지만 입장부터 쉽지 않았다. 이 동네 대장 아파트답게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가야 했다. 굳게 닫힌 아파트 단지 출입문이 열리기를 얼마나 기다렸을까. 문 너머로 젊은 부부 한쌍이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남편은 간단한 제스쳐로 ‘이때가 기회다’라는 눈치를 줬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아파트 주민인 양 최대한 자연스럽게 안으로 걸어 들어갔지만, 심장은 여전히 쿵쾅쿵쾅 요동쳤다. ‘경비 아저씨가 나타나면 어쩌지. 혹시라도 아는 사람을 만나면 어떡하지’ 조마조마한 마음을 숨기고 걷는데, 갑자기... 웃음이 빵 터졌다. 뜬금없었다


축구공 한번 차자고 이것저것 싸들고 온 남편이,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30분을 걸어온 우리가, 007 작전 수행 중인 것  마냥 수신호를 주고받고 있는 우리 모습이 영화 속 한 장면 같았다. "미쳤어? 대체 왜 그래?" 당황스러운 듯한 남편이 주변을 살폈다. 그러거나 말거나 배를 잡고 한참을 웃었다. “이거 이거 우리 완전 기생충이잖아. 영화 '기생충'의 한 장면 아니다. 하하하하 ” 나를 말리던 남편도 자지러지게 웃는 내 모습을 보자 이내 웃음이 빵 터졌다.


2019년도 개봉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 영화를 보면 하류층 가족이 상류층 집으로 몰래 들어간다. 주인이 집을 잠시 비운 사이 그들은 부잣집의 주인처럼 집안 곳곳을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내는데 우리 꼴이 딱 그 꼴 같았다.


여러 관문을 넘어온 보람은 있었다. 남편 말대로 풋살장은 괜찮았다. 아니, 꽤 멋졌다. 사실 그랬다. 집 근처에 작은 공원이 있다면 정주환경이 꽤 좋은 편에 속한다. 거주지가 도심지라면 인근에서 마음 편하게 운동할만한 공간을 찾기란 참 어려운 일이다. 더군다나 주택이나 오피스텔과 같은 곳에 살고 있다면 더욱이 말이다. 좁은 골목에서 줄넘기만 하다가 야구장에서나 볼법한 야간 조명까지 겸비한 풋살장을 보니 30분을 걸어올 만하다 싶었다.


아파트 단지 안에는 풋살장뿐 아니라 여러 체력 단력 시설들이 있었는데, 늦은 저녁 시간이었음에도 꽤 많은 사람들이 운동을 하고 있었다. 경비 아저씨가 찾아와 ‘여기서 나가세요’라고 하면 어쩌나 별별 생각이 다 들었지만, 주민들 사이로 숨어들어 운동을 시작하자 불안은 금세 안도로 바뀌었다. 축구라면 환장하는 남편이 축구공을 신나게 가지고 노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런 곳에 사는 사람들은 참 좋겠다 싶었다. 남편은 일주일에 한 번 축구 한 게임을 뛰기 위해 3일 전부터 축구장을 예약하고 왕복 2시간을 운전해 운동을 하는데, 우리 집 인근에 이런 공간이 있다면 참 좋겠다. 하는 부러움의 감정 싹텄다.


 당시 ‘도시공원일몰제’ 시행을 앞두고 한 창 시끌시끌했던 때라 자연스럽게 도심 속 공원, 1인 녹지비율에 대한 여러 생각이 오고 갔다. 산, 바다, 공기 이런 것들은 공공재라 함께 사용한다고 생각해 왔는데 그게 아니었구나 싶었다. 특히 부산은 산이 많아서 평소에 운동을 할 수 있는 공간이 많다고 느꼈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내가 사는 동네만 보더라도 맘 편하게 운동할 수 있는 공간 하나 없으니 말이다. 자투리 땅만 생기면 어느새 그곳에는 건물이 들어선다. 그래야 돈이 되니까.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 도시를 구성하는 필수요소’의 우선순위를 무엇으로 둬야 하는 걸까. 높이 쌓아 올린 빌딩과 도로를 가득 매운 차들도 좋지만 빈틈없이 돌아가는 도심 속 잠시나마 몸과 마음이 쉴 수 있는 공원, 나무, 숲이 우리에게 주는 효용감을 떠올려 본다. 이따금 바쁜 일상에 지칠 때 진정한 위로와 힘이 되어 주는 존재는 자연이 되기도 하니까.     


 운동을 마치고 올라갔던 길만큼 되돌아 한참을 걸어 진짜 우리 집에 도착했다. 정말 우리 집이 영화 속 ‘반 지하’처럼 느껴졌던 건 기분 탓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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