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먼 멜빌, 「필경사 바틀비(1853)」
"아무것도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최근 중국 젊은이들 사이에서 이상한 기류가 흐르고 있다. 그들은 이제 취업활동을 하지 않는다. 하루 짜리 단기 아르바이트를 며칠하고 나머지 시간은 누워서 흘려보낸다. 자기계발은 이미 포기했고, 심지어 취미나 오락조차 없다. 그저 누워서, 시간을 보낸다.
생명 유지에 필요한 만큼의 노동만을 하고 누워서 지내는 젊은이들. 이들은 스스로를 '탕핑(躺平, TangPing)족'이라 부른다.
탕핑(躺平). 드러눕다. 이름 그대로 푹 드러눕고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다. 중국의 젊은이 뤄화종(骆华忠)이 '탕핑이 정의다'라며 주창한 운동이다.
'2년 넘게 일을 하지 않고 놀고먹고 있지만, 잘못되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매일 같이 우리의 숨을 조여 오는 압력은 서로를 비교하는 데에서 오는 것일 뿐. 그건 그저 어른들의 오래된 관습에 불과할 뿐. 그런 압박감은 항상 우리 주변에 있다. 뉴스 인기 검색어엔 무엇이 있나. 연예인의 사랑이나 그들의 자녀 따위가 채우고 있다. 그런 뉴스는 우리를 게임 속 NPC 같은 존재로 만들 뿐이다. 어떤,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조종하는 인공 개체 말이다. 우리는 저 유명한 디오게네스처럼 누워서 지내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동굴 속 헤라클레스처럼 '로고스'를 완성하는 모습이야말로 더욱 인간에 가까운 것 아니겠는가. 생각의 물결을 스스로 창조해낼 수 있다면, 그저, 눕는 것이 나 자신이라는 현자의 운동일 것이다. 오직, 눕는 것이 인간을 만물의 척도로 있게 할 것이다.'
참으로 밑도 끝도 없고 애매모호한 말이긴 하지만 물적인 것을 얻을 수 없다면 정신적인 것으로 만족을 꾀하면 되는 것 아니냐는 얘기이다.
사상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글이 늘 그렇듯, 뤄화종의 글은 처음엔 아무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그냥, 여러 인터넷 일기와 마찬가지로 묻혔다. 주목받은 건 2019년. 중국의 거물 기업인. 알리바바의 회장 마윈이 996. 아침 9시부터 밤 9시까지 일주일 동안 6일 일하는 것을 두고, 젊을 때 그렇게 일하는 것 자체가 곧 축복이고 자랑이라고 예찬하며 젊은이들을 독려(?)하는 말을 한 뒤였다.
당연하다면 당연하달까. 그 발언은 중국 젊은이들의 신경을 건드렸다. 명색이 노동자의 후생을 중시하는 사회주의 국가인데, 그런 친자본가적 반노동자적인 발언을 하다니. 안 그래도 취업문 좁고, 열심히 일해도 자산은커녕 제대로 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지 자체가 불투명한 현실인데, 그냥 무조건적인 헌신으로 일만 하라니. 그런 삶을 두고 젊음의 자랑이라니.
사실, 996 근무제는 중국 노동법에 위배되는 사항이기도 해서, 마윈은 황급히 '직원들에게 996 문화를 강요해선 안 된다, 그저 젊은이들에게 행복은 쟁취해야만 온다는 뜻에서 얘기한 것'이라고 해명은 했다만, 이미 마윈의 말을 비꼬는 '996.ICU'라는 신조어가 등장한 뒤였다. '996 근로제로 일하면 중환자실(ICU) 간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뼈 빠지게 일하면 뼈만 빠진다.', '헌신하면 헌신짝 된다.' 정도.
어쨌든 한 번 붙은 불은 쉽게 꺼지질 않았다. 불은 자신을 태울 연료를 찾아 헤매다, 뤄화종의 탕핑주의를 찾았다. 그러자 애매모호한 정서에 탕핑이라는 이름이 붙고, 방향성도 확실해졌다. 탕핑 운동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운동…이라고는 하지만, 행동 자체는 별 거 없다. 젊은이들끼리 드러눕는 사진을 공유하거나, 대뜸 길바닥이나 전철 등에서 드러누운 사진을 공유하며 일종의 인터넷 유행(Meme)으로 즐기는 것뿐이다.
그런데 중국 정부는 바짝 긴장했다. 탕핑 운동은 그런 놀이에서 그치지 않고, 젊은이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망가진 삶과 원인. 그리고 미래를 진지하게 고찰하는 계기가 되었으니까. 하루 짜리 단기 아르바이트만 하면서 버티는 방법이나, 돈 안 드는 취미, 취업 안 하고 돈 안 벌면서 사는 방법 등 여러 탕핑법을 공유하면서 서로 어떻게 해야 올바르게 드러누울 수 있는지 고찰한다. 왜 일을 하면 안 되는지 고찰해나간다.
나라의 기둥은 정부의 행동을 보면 알 수 있다. 다급함에 허둥대며 뭔가를 필사적으로 막고 있다면, 거기가 바로 균열이다. 중국 정부가 막은 건 탕핑 운동이었다. 나라를 떠받치는 것이 노동자의 근성과 노동인데, 정작 노동자들이 일을 포기한다니. 안 될 말이다. 그렇기에 정부는 탕핑 운동과 관련된 글을 지우거나, 탕핑 운동을 비판하는 칼럼을 인터넷에 자주 올렸다.
세상을 받들고 버티는 아틀라스가 세상을 던지고 도망간다면 어떻게 될까. 무너질 뿐이다. 아인 랜드가 말한 아틀라스가 엘리트였다면 중국의 아틀라스는 노동자였던 모양이다. 어쨌든 중국 정부는 붕괴를 막기 위해 몸부림쳤지만, 그게 잘 먹히는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탕핑 운동이라고 해봐야 놀이이고, 또 막상 공유하는 것도 가난을 버티고자 하는 노하우의 공유이기도 한데 그걸 지운다니. 선뜻 납득이 되지 않을 것이다. 특히 한국인이라면. 한국의 경우 가난을 견디고 살아남은 경험담과 비책을 널리 알린 익명의 네티즌. 일명 '가난 그릴스'의 이야기가 있기 때문에, 저걸 굳이 정부가 나서서 잡을 일인가 싶을 것이다.
하지만 다르다. 한국의 가난 그릴스는 생존왕 베어 그릴스처럼 혹독한 상황을 여러 노하우와 지식을 총동원해 견디고 가난에서 '탈출'하는 게 목적인데, 탕핑은 탈출이 없다. 가난 그릴스는 언젠간 일어나리라는 의지가 있지만, 탕핑은 그냥 그렇게 현상 유지만 한다.
왜냐하면 이미 나아가려는 의지를 포기했기 때문이다. 취업문은 바늘구멍보다 좁다. 저녁이 있는 삶은 없다. 일해도 집은커녕 식솔 하나, 아니, 내 한 몸 제대로 건사 못한다. 그러니 결혼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결혼해도 자녀는 당연히 없다. 그런 삶을 자녀에게 준다는 것 자체가 죄악일뿐더러, 먹을 입이 늘어나면 나부터 굶어야 한다. 그렇기에 인간다운 삶은 담배 연기보다도 옅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의 삶은 의무로 가득하지만 권리는 없다. 권리 없이 의무의 족쇄만이 있는 삶은 노예의 삶이다. 나의 피와 땀은 권력자의 살과 기름이 될 뿐이다. 내 배를 채울 수 없다면 절대 남의 배도 채우지 않겠다. 채찍질해보아라. 노예에게 아무리 채찍질을 하여도, 노예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것으로 끝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하지 않겠다. 드러눕겠다. 이것이 탕핑 운동의 핵심이다.
그런데, 이들을 휘어잡을 명분을 찾자면, 딱히 없다. 일반적인 파업이나 태업과도 결이 다르다. 이들은 기존의 실직자와 달리 정부에게 복지를 요구하지도 않고, 부양책도 요구하지 않는다. 개혁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아니, 뭐, 사실, 자발적으로 '운동'을 한다기보다는 그냥 그런 상황에 놓인 것이니까.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라벨링 돼서 그렇지.
이쯤 되면 죽이겠다는 협박도 통하지 않을 터다. 탕핑은 인간적인 삶을 살 수 없다면 차라리 무위 속에서 자신을 죽이는 게 낫다는 자세니까. 그렇기에, 어쩌면, 죽여준다면 그건 그거대로 해방이라 여길 테다. 어쩌면, 그들 중 몇몇은 이미 스스로에게 해방을 주었을지도 모르겠다.
'인간적인 삶'을 외치는 탕핑족의 이야기를 보고도 그냥 흘려보낼 수 없는 건 아마 우리가 그들의 이야기에 공감하기 때문이리라. 경제적으로 만족하는 이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인간적인 삶'이라는 화두는 유사 이래 인간이 항상 답을 갈구하던 문제였으니까.
오늘 얘기할 소설, 미국의 대문호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1853)」도 인간적인 삶이 주제인 소설이다.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예전에 만났던 필경사, 바틀비를 얘기하면 가장 먼저 떠올려지는 문장이다. 그는 항상 그랬다. 자신이 바틀비에 관한 글을 쓰는 이유는 무얼까. 바틀비를 추억하기 위해서? 모르겠다.
펜을 들었음에도 이유가 무엇인지 자신도 확실하게 말할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건, 그를 기록한 글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쓴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뉴욕 거물의 전속 변호사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능력이 뛰어난 주인공은 뉴욕 월스트리트에서 사무실을 꾸린 변호사이다.
터키와 니퍼라는 별명의 두 필경사를 뒀고, 그 둘도 아주 훌륭하게 일을 수행함에도 불구하고, 그 둘의 신경질적이고 괴팍한 성격이 사무실 분위기에 좋지 않다고 여겼다.
주인공이 생각한 비책은 그 둘의 성격을 적절히 중화시킬 인물을 구하는 것. 그러니까, 그저 사무실 분위기를 좋게 하겠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새 필경사를 구할 정도로 여유가 있는 변호사님이시다.
새로 고용된 필경사는 조용하지만, 어쩐지 음울한 데가 있는 청년 바틀비. 첫인상과 달리, 활자 자체에 굶주린 듯 밤낮없이 일을 해치우는 바틀비를 보며 걱정은 하지만, 큰 문제가 아니기에 넘겼던 주인공.
그런데 며칠 지나지 않아, 바틀비는 한 문장의 정중한 언사만을 반복하며 일을 거부한다.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이 고집 있는 친구는 얼르고 달래도 일을 하지 않는다. 밥을 먹기는 하는 건지 불명이고, 아예 퇴근도 하지 않는 편을 택한 바틀비. 월급조차 받지 않는 편을 택한 그는 사무실의 붙박이장이 된다.
신경질적인 니퍼는 오히려 바틀비의 업무 거부에 더욱 열이 뻗쳐 발광을 하고, 터키는 자신의 매콤한 주먹이나 맛 좋은 술이 해결해줄 거라 농을 던지지만, 주인공은 매우 상냥한 사람이기에 그런 방법을 택하지 않고 다시 정성으로 달래준다. 전 직장은? 가족은? 친구는? 좋아하는 건? 불편한 건? 그의 대답은 늘 한결같다.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심지어 해고조차 거부하는 지라, 주인공은 변호사 사무소를 옮기기에 이르지만, 내쫓아도 건물을 떠나지 않는 편을 택하고 눌러앉아 노숙을 해 건물 골칫거리가 된 바틀비.
결국 다시 주인공이 권유한다. 필경사가 체질에 맞지 않는다면 다른 일을 알아봐 줄까? 아니, 아예 내가 먹여 살려 줄 테니, 그냥 내 집에 와서 사는 건 어떤가? 여러 권유에도 대답은 역시,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으므로, 미련을 털어버리듯 '그럼 넌 여기서 살아! 난 갈 테니까!' 빽 소리 지르고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떠난 주인공.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바틀비가 구치소에 갇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걱정이 되어 갔더니, 그는 전보다 더욱 쇠약해져 있었다. 주인공은 안쓰러운 마음에 사식이나마 넣어주지만, 얼마 되지 않아 그의 부고를 듣게 된다.
먹지 않는 편을 택한 것이다.
그리고 훗날, 주인공은 바틀비의 과거를 알게 된다. 바틀비는 배달 불능 우편물(Dead letter, 수신자에게도 발송자에게도 갈 수 없어 태워지는 우편물.) 담당 공무원이었다가 해고되었던 것.
우체국에 왔지만 이리저리 오도 가도 못하는 편지들엔 무슨 사연이 담겨있었을까. 어쩌면 누군가에겐 구원이 될 한 푼의 돈이었을 수도, 어쩌면 누군가는 애타게 기다렸을 구원의 한 마디였을 수도, 용서의 한 마디였을 수도, 어쩌면 누군가에겐….
바틀비는 편지에 담긴 수많은 사연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걸 그저 태워야만 하는 자신을 두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바틀비는 '인간'이기에 무력감을 느꼈으리라 짐작하며 탄식하는 주인공의 독백으로, 소설은 끝난다.
바틀비는 안 하는 것을 택한다는 말로 저항을 하지만, 저항을 하는 사람이라기엔 참 무기력하다. 어떤 사상이나 의도가 있다기보다는 신경쇠약을 앓는 환자에 가깝다. 그래서 소설 속에서도 바틀비에게 적대적인 사람은 잘 없다. 기껏해야 신경질적인 니퍼 정도인데, 그는 원래 그래서. 그리고 적대라기도 뭣하다. 그냥 조금만 답답해도 성질내는 사람이라.
각자의 바틀비를 품고 산다는 듯, 해석이 여러 가지이지만 일단, 소설에서 나타나는 월스트리트를 비롯한 여러 상징의 색이 보통 진한 게 아니다 보니, 일반적으로 자본주의 비판으로 많이 읽힌다.
예를 들어, 주인공 변호사의 자리엔 창문이 있는데, 바틀비를 비롯한 필경사들의 자리엔 창문이 없다. 창문은 문학에서 흔히 희망을 은유하는 장치(Metaphor)로 쓰이는데, 월스트리트라는 배경과 결합하면 자본주의 사회는 성공한 변호사 주인공처럼 돈과 권력을 가진 이에겐 희망이 있고, 바틀비 같은 하급 노동자에겐 희망이 없는 사회이므로, 그것을 아는 참인간 바틀비는 절망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해석이 된다.
그러니까 고용주가 얼마나 따뜻하게 해주느냐, 배려를 해주느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노동자에게 희망이 없는 사회 자체가 문제이다. 그런 사회에서 사회를 자각하지 못한 노동자는 신경질적인 발작 속에서 살고, 자각한 노동자는 무기력을 안고 죽는 것이다.
여기서 끝나면 자본주의 사회를 향한 문제 제기이나, '그러므로 민중은 스스로 벽을 부수어 창문을 내어야 한다.'라고 말한다면 사회주의 레알리슴에 입각한 해석이 된다. 그리고 '벽을 부수어주는 영웅이 존재하며, 그러한 벽이 없는 사회가 이미 이 땅에 있다.'라고 말한다면 주체사상파 혹은 사이비 종교인이므로 신고하시거나 최대한 멀리 하시라.
해석이 어쨌건 우리는 바틀비의 우울에 빠져들었고, 그에게 답이 될 무언가를 찾고 싶어 한다.
사실 바틀비의 매력은, 그의 신경쇠약적인 면모에서 오는 '공감'에서 오는 것이라, 노동에 지쳐 일을 그만두고 싶어 하는 현대 근로자들의 심리와 겹쳐 보이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
내지도 않을 사표를 품에 안고 회사를 다니는 것처럼, 현대 근로자도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는 말을 목구멍 안에 눌러두고 사니까. 스트레스가 심하다면, 바틀비를 통해 호기심보다 오히려 개운함을 느꼈을 것이다.
바틀비를 위한 답을 준다고는 하지만, 실은 그에게 주는 답은 우리 자신에게 필요한 답이니, 우리는 탐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인간적인 삶을 찾다 결국 일을 거부하고, 그렇다고 뭐 딱히 요구하는 게 있는 것도 아니어서 앞서 말한 탕핑족이랑 좀 겹쳐 보이기도 하는데, 탕핑족이 원했던 인간적인 삶은 사회적 약속. 그중에서도 물적인 것인데, 바틀비는 정신적인 것이다.
바틀비가 원했던 인간의 삶이 물적인 것이었다면 좋은 직업 소개해준다는 제안이나, 돈 걱정 말고 주인공 집에서 백수짓하라고 권했을 때 두 팔 벌려 환영했을 테니.
어쨌든 단서는 적절히 나와있는 편이다. 주인공이 바틀비에게 직업을 권할 때 드러난다.
포목상 점원을 권하자, 그 일을 하면 너무 갇혀 있는 데다 자신은 특출 난 인간이 아니니 할 수 없다고 하질 않나, 시력 상할 일 없는 바텐더 일을 권하자 여전히 자신은 특별한 인간이 아니라며 거부한다.
이렇게 진로를 물을 때 이례적으로 말이 많아져서, 주인공 또한 더욱 의욕을 내서 묻는다. 사실, 무슨 일 자체를 하고 싶기는 한데, 딱히 진로 자체를 못 찾은 데다, 자신감 바닥에 우울은 천장을 치솟는 그의 태도는 조금만 도와주면 될 것 같기도 한 모습이라.
상인 대신 수금일을 하는 심부름꾼은 그냥 이유 없이 싫다고 하고, 또 집안 좋은 젊은이의 여행길 말동무 일을 권하자 확정적인 것이 없는 일인 데다, 자신은 고정적인 게 좋으니 하지 않겠다 한다. 아예 주인공 집에서 얹혀살며 고정적인 백수짓을 권해도 안 하는 편을 택한다. 야, 이 놈 참.
정리해보면 바틀비가 원하는 일의 조건은 다음과 같다.
1) 일터가 이동을 구속하지 않기를 원한다.
2) 목표가 확실한 일을 원한다.
3) 고정적인 루틴을 원한다.
4) 특출 난 사람이 아니어도 할 수 있는 일을 원한다.
이 모든 걸 만족하는 일을 원하는데, 이 조건을 보면 필경사 바틀비에게서 중대한 모순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필경사는 1번 조건을 만족하지 않는다. 파티션과 책상 속에 갇혀 받아쓰기만 하는 직업이다. 그런데 바틀비는 뭣하러 필경사 일을 하러 왔을까?
그가 말하지 않았지만, 확정적으로 주어진 그의 과거가 단서이다. 바틀비는 배달 불능 우편물(Dead letter, 수신자에게도 발송자에게도 갈 수 없어 태워지는 우편물.) 담당 공무원이었다. 전해주지 못한, 수많은 사연을 보고 절망했다. 전해주지 못하고 태워야만 한다. 전해준다는 시도는, 개인적으로도 불가능하다. 그저 사무실을 떠돌다 태워질 뿐이다. 그게 최선이다. 결국, 그런 사연들은 담당 공무원의 가슴에만 남는다.
그러니까, 누군가에게는 갔어야 할 편지를, 전해졌어야 할 사연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하지 못하는 데에서 오는 무력감이다. 그 점을 고려하면 조건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1) 일터가 이동을 구속하지 않기를 원한다.
2) 목표가 확실한 일을 원한다.
3) 고정적인 루틴을 원한다.
4) 특출 난 사람이 아니어도 할 수 있는 일을 원한다.
5) 누군가에게 사연을 전달해주지 못했다는 데에서 오는 무력감을 피하기를 원한다.
좋다. 그런데, 이런 조건을 충족하는 직업이 있기는 할까? 물론 있다. 이 조건을 만족하는 직업은 딱 하나뿐이다.
작가(Scripter). 작가는 일터가 이동을 제약하지 않는다. 목표가 확실하다. 그러면서도 고정적인 루틴을 갖고 있다. 글쓰기 자체는 특출 난 사람이 아니어도 가능하다. 그리고 작가는 전할 수 없는 이야기를 알리기 위해 글을 쓰는 사람이다.
바틀비는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다. 글을 써야 한다는 걸. 그러므로 글쓰기 자체에 굶주린 것 같다는 주인공의 감상은 매우 정확했던 셈이다. 그런데 바틀비는 작가(Scripter)가 아닌 필경사(Scrivener)를 택했다. 하지만 알다시피 필경사는 인간 복사기이다. 남의 글을 받아 적기만 한다. 자기 내면에 있는 사연을 말하는 직업이 아니다. 그렇기에 다시 무기력에 빠진다. 전과 다름이 없으므로.
만약 주인공이 직업을 권할 때 작가를 입에 올렸다면 어땠을까? 아마 그제야 무릎을 탁 치고 자신의 할 일을 위해 다시 활자에 굶주린 듯 미친 듯이 써 내려갔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공은 그러지 못했다. 자기 내면의 말할 것이 없었으므로, 당시엔 작가라는 일 자체를 떠올리지 못한다.
이 소설은 바틀비의 사연을 알리기 위해, 변호사가 남긴 수필이라는 형식을 띄고 있다. 그러니까 주인공은 바틀비를 보고 나서야 자신의 내면 속에만 존재하는 사연이 생긴 것이다. 마치 바틀비처럼. 그렇기에 평생 남을 위해서만 펜을 들던 사람이, 이제는 자신의 고통을 말하기 위해 펜을 든 것이다. 작가가 된 것이다. 이제 세상 어디엔 없고 자기 내면에만 존재하는 무언가를 말하는 일. 바틀비가 원했으나 끝내 하지 못했던, 인간의 일이다.
바틀비는 구원받지 못했지만, 바틀비를 가슴에 새긴 주인공은 바틀비를 통해 구원받은 것이다. 글을 쓰는 것으로 말이다.
그러고 보면 탕핑족도 글을 썼다. 탕핑주의를 제창했던 뤄화종도 자신의 고통을 말하기 위해 자판을 두드렸다. 탕핑 운동에 참여하는 수많은 젊은이들도 자신의 고통을 나름의 목소리로 외쳤다. 나름의 형태로 말하였다. 숨을 쉬는 시신의 삶을 택했더라도, 절망과 무력감에 감싸여 드러눕는 것 외의 방법이 없는 속에서도 인간은 자신의 내면을 폭로하고야 만다. 그것이 인간의 본능이므로. 그렇기에 정부는 그들을 인간이라 하지 않지만, 우리는 인간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자, 이제 할 일은 정해졌다. 진정으로 절망했다면 글을 써야만 한다. 절망, 무력감, 부끄러움, 고통. 그 모든 것을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글을 쓰자.
세상에 자신의 행복만을 말하기 위해 작가가 된 이가 어디 있는가. 고통을 말하기 위해 작가가 된 것이다. 입이 있다면 비명을 지르고, 손이 있다면 땅을 할퀴어 고통이 존재했음을 알려야만 한다.
그것이 스스로의 비루함을 고발하는 것에 불과할 지라도 우리는 글을 써야 한다.
그것이 인간을 인간으로 존재하게 해주는 최초이자 최후의 방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