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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오의 반딧불이 Oct 27. 2021

《설거지론과 마담 보바리》


 "결혼은 마지막 사람이 맡는 설거지."


 온 인터넷이 '설거지'라는 단어로 시끌벅적하다. 설거지 이야기로 떠들썩했던 건 오늘만의 일은 아니었다. 여성전업주부가 가사노동에서 겪는 고충을 대표하는 일이 설거지였으니. 텔레비전 드라마나 만화, 혹은 신문 삽화에서 주부는 항상 설거지하는 모습으로 나오지 않는가. 식구들이 실컷 먹고 빈둥거리는 동안 혼자 설거지하고 있자면 자신이 동등한 가족이 맞는지 의심이 든다고들 하니까.


 그렇기 때문에 이번 이슈도 같은 주제인가 싶지만, 아니다. 이것은 남성의 이야기이다. 앗, 그렇다면 남성전업주부의 이야기? 그것도 아니다.


 결혼을 설거지에 비유하는 말이다. 젊은 시절 여러 남성과 교제했던 여성이 끝에는 연애 경험은 없지만 경제조건은 좋은 남성과 결혼해 사는 현상. 아내와 처가 식구들을 일방적으로 부양하고 있음에도 피정복민에 버금갈 정도로 비참한 삶을 사는 남성의 삶. 권리는 없고 의무의 족쇄만 존재하는 그런 삶. 식사의 포만감과 노곤함은 남의 몫이 된 채로 끝나고 자신의 몫은 오로지 설거지뿐인, 그런.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김근철, 뉴스핌, <러 내무장관, 평양 방문..북러 정상회담 개최 조율?>, 2019-04-02.


 여태 그런 걸 두고 '공처가', '애처가', '내무부장관(아내 + 재무부장관)과 프로 유부남' 등의 단어로 칭해왔던 만큼, 현상 자체는 새로울 것이 없다. 그러나 '설거지'는 다르다. 이는 패러다임이 변했다는 신호이다.


 공처가는 놀리는 말이면서도 안쓰러워하는 마음이 담겼고, 애처가는 위로의 정서이고, 내무부장관은 자조적인 뉘앙스가 강하다. 왜냐하면 사용자가 같은 유부남들이기 때문이다. 피차 같은 처지이기에 '공감'하므로, 공격으로까지는 이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설거지는 다르다. 유부남을 향한 철저한 조롱이다. 심지어 사용자도 유부남과 입장이 전혀 다른 미혼 남성이다.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출처: 핀터레스트.


정보공개의 비극


 어떻게 된 걸까. 참으로 황망하게도 앞서 말한 세 유행어로 비롯된 결과이다. 공처가, 애처가, 내무부장관. 시대는 달라도 이 셋은 아내를 위해 희생하는 남성들을 향한 말이었다. 공처가 애처가 등의 말이 쓰일 적에야 유부남 친구들끼리, 방송이나 소설 등에서나 나오는 말이라 그들의 상황을 직접적으로 알 길이 없어 유부남 당사자만 아는 머나먼 이야기였으나, 정보의 바다 인터넷의 세상이 열리면서 이야기는 달라졌다.


 사람들은 인터넷에서 사적인 이야기 또한 많이 나누었는데, 개중엔 유부남도 있었다. 유부남이 눈물 젖은 손으로 자판을 두드려 만든 글은 뭇사람들의 가슴에 남았다. 그 삶은 희생의 삶이었으니까.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출처: 피츠버그매거진.


 옛 신화의 마법사가 심복에게 자신의 심장을 담은 상자를 건네주는 것과 같이, 유부남은 월급통장과 인감도장, 집문서부터 아내에게 넘기고 시작한다.


 용돈 만 원으로 일주일을 버틴다. 그 옛날 '만 원의 행복'에 등장하는 연예인들은 PD나 주변인들이 간식이라도 챙겨주건만 우리의 유부남들은 그런 거 없이 근성으로 버티고 산다. 일정에 없던 야근으로 늦게 들어왔더니 집안일을 해놓지 않았다는 이유로 쫓겨나 계단참에서 밤을 지새운다. 


 물에 담가진 게임기나 손수레를 타고 떠난 만화책 따위의 이야기는 같은 취미를 공유하는 젊은 사람들을 더욱 겁에 질리게 만들었다. 


 내무부장관 등의 유행어는 굉장히 위트 있는 말이기에 서로 이야기하기에도 부담이 없는 인터넷 유행(Meme)이 되기에 이르지만, 그만큼 전파속도도 빨라지고, 참여도 많아졌다. 그 결과는 유부남 이야기의 범람.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출처: Navy Times.


 유부남 이야기를 접한 인생 후배들은 깨달았다. 결혼은 사랑만 있어서는 안 된다. 결혼이란 '어제보다 편한 오늘은 오지 않는다'던 특수부대의 슬로건으로 무장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생존투쟁의 장이다.


 심지어 그 생존투쟁의 장에서 유부남을 공격하는 건 외부의 적이 아닌 자신이 지키고자 하는 가족이라는 점이었다. 너무나 가혹한 진실을 목도하고 만 것이다.


 결혼 생활을 견디지 못하겠다면 이혼하라고 말은 하지만, 그래도 사랑이라는 이름의 맹세가 굳건히 버티고 있는 데다, 텔레비전에선 거액의 위자료를 받아 풍요로운 삶을 누리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끊임없이 나온다. 직접적으로 나오진 않지만 필시 이혼남은 유부남보다 비참하리라. 그런데 어째서인지 사랑스런 아내는 그런 방송이 나오면 밥숟가락조차 움직이지 않고 집중한다.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출처: Fratini Vergano.


설거지론: 결혼은 사랑이 아닌 거래.


 그와 같은 간접경험의 총합은 실제의 유부남보다 컸다. 그렇게 유부남의 개념이 재정립되었다. 유부남은, 우리네 아버지가 아니라 그냥 불쌍한 사람들(Les Misérables)이었구나. 와, 나 곧 결혼하는데 어쩌면 좋으냐, 나는 결혼 안 해야지, 배꼽 아래가 머리를 지배하는 남성의 슬픈 숙명이다, 받아들여라. 등.


 이런 에피소드가 몇 개 정도에 그친다면 다들 그러려니 할 텐데, 이게 숫자가, 너무, 너무 많았다. 그렇기에 특이 케이스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말은 않지만 알게 모르게 영향은 컸던 모양인지, 저조한 혼인율의 원인은 경제가 아니라 유부남들의 정보 공개라는 농까지 나올 정도였다. 저런 이야기가 미혼남들로 하여금 정신적 거세를 했기 때문 아니느냐고.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출처: 미래경제뉴스.


맞춰진 퍼즐


 이런 와중에 인싸아싸론. 즉, 외모 상위권 남성 20%가 여성 80%의 연애경험을 차지한다는 파레토 법칙이 더해지니, 지켜만 보던 미혼 남성들은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젊을 때 치기 어린 감정에 연애를 많이 하고, 나이 들어 성숙해지고 진짜 사랑을 찾아 결혼한다고 말은 하지만, 그렇다면 왜 진정한 사랑인 결혼의 형태가 저러한 것인가? 젊은 시기의 동물적인 감각으로 즐기는 연애엔 사랑이 있다고 말하기 어렵지 않지만, 어째서 저 결혼 생활에 사랑이 있다고 말하기가 이리도 힘든 것인가?


 처음부터 결혼에 사랑은 존재하지 않았던 게 아닐까?  


 결혼이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그저 단순한 거래에 불과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연애는 서로의 파장을 확인하는 사랑의 조율이 아닌, 부양능력을 두고 벌이는 교섭의 과정이 아닐까? 그런데 결혼이 거래라면, 지금 저들은, 매우 불공정한 거래를 한 게 아닐까?"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출처: Business Insider.


 근거가 없으면 좋으련만, 인터넷으로 사적인 이야기를 하는 건 남성들만이 아니었다. 여성들의 진솔한 이야기도 누구나 쉽게 볼 수 있었다.


 '여자는 좋은 남자를 얻지 못하면, 좋은 물건으로 결핍을 채우는 거예요. 명품에 집착한다고 하지만, 당신이 좋은 남자였다면 그녀도 지금 같진 않았겠지요.'


 '용돈을 줄였더니 화를 내네요. ATM주제에.'


 '지금 남편에게선 전 남친이 주었던 설렘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가끔은, 그가 보고 싶다.'


 '끝까지 아파트를 제 명의로 해주지 않더라고요. 이혼하면 위자료로 아파트 받을 수 있겠죠?'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출처: 픽사베이.


 그런 자잘한 이야기가 한데 모이니, 놀랍게도 남자와 여자의 이야기가 같은 상자에서 나온 퍼즐처럼 딱 들어맞는 것이었다. 아, 정말로 애정이 없기 때문에 가혹하게 구는 것이었구나. 그들은 대체 어떤 삶을 살았던 것인가. 


 물론 이 글에서 예시로 들었던 에피소드는 전부 이해를 돕기 위해 꾸며낸 이야기에 불과하다. 어차피 만들어진 이야기이니 빼도 상관없지만, 그래도 젊은이들의 인상은 변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여기에서의 이야기만 보고 사는 건 아니라는 말이다. 일만 개의 조각으로 이루어진 퍼즐에서 열 개가 빠진다 하여도 어떤 그림이 그려진 건지 알아보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출처: 대학원신문.


설거지론과 노력무용론


 그런데, 진솔한 이야기를 들었다고는 하지만 결국은 웹 상에서의 이야기이다.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어디 검증은 되었던가? 죄다 익명이잖은가. 사실이긴 한가?


 아니, 좋다. 그들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고 치자. 하지만 정말로 행복한 부부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굳이 인터넷 커뮤니티에 힘을 쏟을까? 행복한 가정생활과 충실한 인생을 즐기느라 바빠 의견 형성에 주는 영향이 없을 텐데? 결혼시장에서 낙오된 사람들이 너 한 번 엿 먹어 봐라 하고 던지는 발악 아닌가?


 틀린 지적은 아닌 것 같다. 사실 이미 그런 지적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들은 '나는 도태남 맞소'하고 곧바로 인정하고 다시 놀려먹기 시작해 의미는 없었다.


 그러고 보니 이들은 왜 이렇게 설거지론에 열띤 반응을 보일까. 이들이 들어왔던 여러 말과 '설거지남'을 놀려먹는 레퍼토리를 보면 알 수 있다.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나영준, 오마이뉴스, <열심히 공부하면 신랑 얼굴이 바뀐다?>, 2006-11-28.


 "공부하면 아내의 얼굴이 바뀐다."


 아마 국민학교를 다닌 친우들이라면 참으로 익숙한 말일 것이다. 미녀는 성공한 자의 것. 미녀를 쟁취하려거든, 노력하라.


 그런데 머리가 굵어지고 난 뒤 다시 떠올려보면 참으로 이상할 것이다. 여자가 무슨 전리품이야? 쟁취하긴 뭘 쟁취해. 


 그렇다. 처음부터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설거지론자도 마찬가지의 입장이다. 사랑으로 얻은 미녀가 아닌 돈으로 얻은 미녀라면 널 사랑하지 않는 게 당연하다. 너도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는 알고 있지 않았느냐.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도 있다는 사실을.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출처: 위키백과.


 "아내에게 잘 해준만큼, 아내도 당신에게 잘해줄 거예요."


 방송 등에서 나오는 이야기를 보면, 결혼할 땐 마누라를 두들겨 패다가 나중에 힘이 달리고 퇴직을 하면 쥐여산다는 얘기가 있다.


 '여자들이 처음부터 억세게 구는 것도, 그렇게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고요. 처음부터 잘해주세요. 그러면, 아내분도 잘해줄 거예요.'


 자기가 바라지 않는 것은 남에게도 행하지 말고, 항상 자신이 원하는 선한 행동을 남에게 베풀어야 한다. 아주 바람직한 황금률이다. 


 그런데 황금률은 진짜배기 황금 앞에서 무실했다. 아내에게 필요한 경제권을 모두 주었지만, 식비조차도 제대로 받지 못한다.


 '노력이 부족한 거예요. 전업주부가 얼마나 고생하는지 알아요? 집안일도 좀 해주고 그래 봐요. 정성에 변하지 않는 사람 없어요.'


 그런데 아니었다. 의무만 늘었다. 아인 랜드가 말한 것처럼 재산권의 보장이 없으면 인권의 보장도 없다. 국가 단위에서 얘기하는 데도 이럴 진대, 가정이라고 아닐까. 경제권을 넘긴 시점에서 이미 노예의 삶이다. 그러므로 남편이 아무리 노력해도 그건 가정의 회복을 위한 가장의 헌신이 아닌 노예의 재롱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출처: MensHairCuts.com


유전자수저론


 이 외에 다른 레파토리로는 젊었을 때 혹은 결혼 뒤에 만났을 미남. 같은 남성이 봐도 아우라부터 다른 미남의 존재. 회사가 집안에서 가장을 앗아갔을 때, 그 빈자리를 파고들어 부인에게 다가오는 남자의 존재.


 이야기를 짜내며 놀려야 하기 때문에 문학적 재능이 필요해 보이지만, 사실 없어도 된다. 카페에서의 브런치, 백화점 문센언니, 복근이 아름다운 스포츠 강사 등 몇 개의 키워드를 늘어놓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유부남들은 설거지론자들이 원하는 반응을 보여주곤 하니까.


 육체적으로 우월한 남자의 유혹은, 결혼이라는 얄팍한 신의가 붙잡아둘 수 없다는 전제에서 이루어지는 공격이다. 유전자수저론이라고 해야 할까.


 기존의 수저론이 노력은 경제적 배경을 이길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면, 유전자수저론은 노력으로 유전적 배경을 이길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출처: Arch Daily.


 그런 의미에서 유전자론이 훨씬 잔인하다. 수저론이 어차피 사회가 사람 자리 다 정해두었으니 너도 나도 위를 쳐다보는 건 그만두고 자기 자리 찾아가는 게 옳지 않느냐는 결론으로 이끌지만 그래도 네 자리가 있긴 있다는 말이다.


 설거지론은 네가 노력해서 얻은 자리는 그저 착각에 불과하고, 결국 따져보면 스스로 노력해서 족쇄를 찬 것에 불과하다는 조롱이다.


 설거지론을 이야기하면서 곁다리로 불륜 이야기도 나오긴 하지만, 설거지론의 핵심은 애정을 받지 못한 채 일방적으로 떠안은 부양의 고통을 얘기하는 것이니 불륜의 문제는 아니다. 그런데 앞서 얘기한 것처럼 이게, 장기간 집을 비우는 것과 사랑받지 못한다는 느낌과 겹치니 실제와 상관없이 그런 두려움을 주기엔 충분했기에….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로이 리히텐슈타인 作, 「헹복한 눈물Happy Tears(1964)」.


설거지론자의 눈물


 설거지론자들의 놀려먹는 모습이 워낙 신나보이기 때문에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들로 보이지만, 그들의 키보드를 적신 건 그들 자신의 피눈물이다. 그들은 이미 무너진 상태이다.


 그들의 언사엔 숨은 명제가 있다. '사랑받을 수 없는 사람은 아무리 노력하여도 사랑받을 수 없다.'


 이제 그들은 인생 선배들의 경험을 통해 노력을 해도 안 된다는 걸 알았기에 포기했다. 그렇기에 설거지론을 '낙오자의 아우성'이라고 해봐야, '그래서 뭐?'. '나도 알아.' 정도의 반응으로 쉽게 인정하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모든 걸 내려놓았기에 그들의 행동을 몇 마디의 말로, 특히 체면을 자극하는 단어로는 바꿀 수 없는 것이다.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영화 「조커(2019)」 中.


 그런 이들이기에 내면은 지독한 우울로 가득 차 있다. 내가 어떤 노력을 해도 사랑받을 수 없다면, 나와 같은 처지의 군중 속에서 인정이나마 받겠다. 나중에 자신이 울게 될 건 분명하지만, 적어도 이 순간엔 함께 웃을 수 있으니까.


 그렇기에 설거지론자들에게 '가서 네 인생을 살라.'는 말은 통하지 않는다. 설거지론이 한창 무르익는 지금 세상이 아닌 인터넷에 남아야지. 지금과 같이 이렇게 남들과 같은 마음으로 웃을 수 있는 순간이, 내일 당장 끝날 수도 있는데 최대한 즐겨야지.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출처: Forum Arbeitswelten eV.

 같이 보면 좋은 글: 《탕핑족, 인간이란 무엇인가?》《탕핑족, 인간이란 무엇인가?》



 이렇게 모든 걸 체념했다는 점에서 탕핑족이 떠오를 것이다. 탕핑족은 어차피 취업도 안 되고, 부양도 안 되는 걸 아니까 내 한 몸 건사하기 위해 드러누운 젊은이들이다. 


 한국의 설거지론자도 현실을 직시하고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중국의 탕핑족과 비슷하다. 차이가 있다면 탕핑족은 윗세대의 삶을 은연중에 동경 하나, 설거지론자는 윗세대의 삶을 부러워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그들의 삶을 알고, 그들의 전철을 밟지 않았다는 점을 다행으로 여긴다.


 그들은 마치 병사와도 같다. 앞서 나간 다른 병사들이 지뢰를 밟고 산화하는 모습을 본 병사. 예견된 멸망을 피했다는 사실은, 죽은 사람을 위한 애도보다도 나는 아직 살아있다는 은근한 기쁨부터 피어오르게 만드는 것이다.


 돌격을 하지 않은 겁쟁이라고 암만 욕해봐라. 아직 사지 멀쩡히 붙은 내가 이긴 거다. 지뢰밭으로 달려든 용기 있는 자들은 죽거나 불구가 되어, 내 선택이 옳다는 증거로 남아있지 않느냐.



프랑스의 설거지론 


 그러고 보니 외국엔 이런 민감한 주제를 가지고 얘기한 적이 없었는가? 왜 없겠는가. 외국도 사람 사는 곳이고 결혼 문화 존재하는 곳인데.


 오늘 이야기할 책은 사실주의 문학의 거장. 프랑스의 작가 귀스타브 플로베르가 쓴 소설 「보바리 부인Madame Bovary(1857)」이다.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출처: 위키백과.


 이 소설은 실화를 바탕으로 쓰였다. 1822년. 들라마르 가문의 장녀 델핀 들라마르는 1839년 보건사(Officier de santé) 외젠 들라마르와 결혼하게 된다. 루앙 동쪽으로 30km 떨어진 작은 마을 리Ry에 정착한 그들은 딸 앨리스를 낳고 평범한 가정의 삶을 살았다.


 물론 그렇게 잘 먹고 잘 살았다면 그들의 이름이 지금까지 알려질 일도 없었을 것이다. 델핀 들라마르는 결혼한 뒤 극심한 공허감에 시달렸다. 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그녀는 온갖 비싼 물건을 사들이며 사치를 부렸다. 두 명의 남자와 불륜도 저질렀다. 나중엔 두 남자에게 버림받고, 빚 독촉장이 날아들기에 이른다. 결국, 1848년. 델핀은 비소를 마시고 그녀의 짧은 생애를 마무리지었다. 딸 앨리스와 자신의 사치로 거액의 빚을 진 외젠을 남겨두고.


 플로베르는 루앙신문Journal de Rouen에 실린 델핀의 이야기에 홀린 듯이 빠져들고는, 그것을 바탕으로 소설을 써 내려갔다. 그래서 큰 줄거리는 델핀의 이야기와 같지만, 디테일에서 차이가 난다.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출처: 위키백과.


설거지남 샤를


드센 어머니의 치마폭을 벗어나지 못한 소심한 남자 샤를. 재수 끝에 보건사가 되어 병원을 차리기도 하고, 이상형에 가까운 매력적인 여자 엠마 루오와 결혼해 귀여운 딸 베르트 보바리도 보고, 그럭저럭 행복한 삶을 보냈다.


 모두 착각이었지만. 샤를이 환자를 볼 때 엠마는 세련된 금발미남 로돌프와 입을 맞추고, 젊고 풋풋한 레옹과도 몸을 섞는다. 내연남에게 선물 주고 데이트한다고 빚은 빚대로 지고, 남자 다 떠난 뒤엔 남편을 보필해 출세하겠다는 욕심으로 새 의학 기술을 배우길 종용하나, 결국 그 시도가 의료사고로 환자를 죽게 만들어 병원에 악영향을 주기까지.


 샤를도 모르고 갔으면 마음이나마 편했겠지만, 엠마가 서랍에 내연남들과의 연애편지를 고이 모셔뒀기 때문에 집을 정리하던 샤를이 보고 만다. 편지를 읽은 샤를은 남편인 자신을 단 한 번도 사랑한 적이 없었다는 걸 깨닫고, 결국 지독한 절망 속에서 시름시름 앓다 죽어버리고 만다.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이한세, 중앙일보, <노인이 고독사를 두려워하는 이유>, 2018-07-19.


 묘사가 워낙 세밀해, 샤를과 같은 처지에 있는 연애권력 제로의 남성이라면 차오르는 눈물을 삼키기 힘들 것이다. 특히, 엠마의 장례를 치르면서 주변인을 돌아보고, 가재도구가 처분되는 와중에 엠마의 서랍을 열고 오열하는 장면은 정말이지…. 


 샤를 보바리의 이야기는 설거지론자들이 말하는 설거지남의 전형이다. 결혼 내내 사랑받을 수 없었던 남자의 비극 말이다. 아니, 어쩌면 일은 일대로 도와주고 밥은 밥대로 차려주고, 남편에게 증오를 쏟지 않은 데다, 일방적인 부양으로 인한 고통보다 불륜으로 인한 파국이 중심이므로 아니라고 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을 꺼낸 이유는 단순히 설거지남을 외국에서도 이미 다루어졌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이와 같은 파국을 피하기 위한 단서가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출처: <CGNTV 블레싱 한반도> 유튜브 채널.


 사실, 언뜻 보면 파국은 예정된 수순 같다. 엠마가 샤를과 결혼하게 된 것도 그저 아버지가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는 딸이 못마땅해 결혼 지참금이나 좀 받자고 시집보낸 탓이 크고, 자신의 욕구도 제대로 파악 못한 채 수동적으로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샤를과, 매 순간 일어나는 자신의 욕구에 솔직해 욕구충족을 위해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엠마는 워낙 상극이라 성격 상 궁합도 안 맞는다.


 외모나 센스, 혹은 같은 관심사가 있으면 그 간극을 줄여줄 법도 한데, 하필 샤를은 이성 친구는커녕 동성친구도 없어 처참한 패션센스는 물론이고, 더러운 손톱에 지저분한 수염으로 대표되는 못난 행색. 반면에 엠마는 도시사람에 버금가는 우아한 미인인 데다, 항상 어떤, 마음을 자극하는 낭만을 품고 사는 여인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일탈이 부를 결과를 알면서도 로돌프의 유혹에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출처: Dapper Dude.


 로돌프는 정말 샤를의 대척점에 있는 존재이다. 항상 손거울을 들고 다니며 수염을 다듬는 이 세련된 금발 남성은 시적인 말로 엠마를 사로잡는다. 그의 문학적인 말은 옆집 약사 오메 선생의 아무 말과는 또 다르다. 엠마가 남몰래 품고 있던 '고독'의 정서를 읽어주는 말이다. 게다가 적절히 탄탄한 몸에, 가까이 있으면 바닐라와 레몬 향기도 은은하게 풍기니. 


 그렇기에 그의 품에 안기는 건, 따스한 여름 햇살에 안기는 듯, 부드럽고도 따스한 행복의 감촉이다. 그런 밀회 이후 남편 샤를을 보면…. 


 엠마는 가정에 정이 떨어진다. 가정은 그녀가 그리는 이상세계가 아닌 현실이므로. 보건사 남편의 뒤치다꺼리와 지겨운 육아만 있는 삶이므로.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출처: MBC뉴스.


 엠마가 조금 참았다면 되지 않을까 싶지만, 로돌프 같은 꾼에겐 누구나 속절없이 당하지 않을까. 사실, 로돌프가 오기 이전에 평균적인 수준의 매력을 가진 레옹에게도 흔들린 적이 있긴 하다. 다만 이땐 엠마는 엠마대로 참아 넘길 이성이 있고, 레옹은 레옹대로 수줍어서 바로 이루어지진 않았지만.


 이렇게 보면 사실상 처음부터 잘못된 결혼이라고 밖에는….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그럼 딱 봐도 끗발 차이 나면 결혼하지 말라는 이야기인가? 그럼 이미 그런 형태의 결혼을 한 사람들에겐 미래가 없는 것인가? 아니다. 답은 우리가 잊은 것 중에 존재한다. 보바리 부인의 이야기를 읽고도 자주 잊곤 하는 것.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애니메이션 「심슨가족The Simpsons(1989)」 中.


가족의 목적


 바로 딸 보바리. 긴장감 넘치는 불륜의 현장을 비추는 소설에서 딸 보바리는 잊을만하면 존재감을 보인다.

 딸 베르트가 힌트인 이유는 가족의 가장 근본적인 형성 목적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서로 밉다 할지라도 자녀를 위해서 앙금을 잠시 밀어 두고 뭉치는 게 부부이다. 부부가 현재를 희생해 돈을 벌고 자산을 쌓는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자녀에게 물려주기 위해서이다. 자신들은 몰라도 자식만큼은 풍요 속에서 행복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부부의 경제활동은 자녀를 위한 희생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세계의 부부들은 오늘도 많은 것을 참고 산다. 그러므로 보바리 부부 둘 다 자녀를 우선시해야 했다.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출처: 소비라이프뉴스.


 그런데 정작 이 둘 사이에서 자녀는 항상 뒷전이다. 둘의 대화 어디에서도 자녀의 자리는 없다.


 엠마 보바리는 자신이 되고 싶었던 무언가에 항상 매달리며, 그 결핍감에 남자를 찾아 쏘다니고 사치를 부린다. 샤를 보바리는 딸이 태어나고 행복한 가정을 꾸렸다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우선순위는 자신의 이상형인 엠마 보바리의 기분뿐이다. 


 보바리 부부가 워낙 딸에게 무신경해 약사 오메네에서 맡아주다시피 하는데, 알뜰하고 억척스러운 오메 부인도 혀를 찰 정도로 꼴이 말이 아니었다. 구멍 난 양말에, 꾀죄죄한 몰골에, 항상 침울하기까지.


 딸을 묘사하는 문장 하나하나가 망가진 가정의 비참함을 몸소 느끼게 해 준다. 이쯤 되면 「레 미제라블(1862)」의 코제트보다 불쌍하다. 코제트에겐 장 발장이라도 있었지만 베르트에겐 아무도 없으니까.


 샤를은 그래선 안 되었다. 딸을 사랑한다고 마음속으로만 되뇌어선 안 되었다. 직접 살펴봤어야 했다.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원선우, 조선일보, <[단독] MZ세대 병사 등쌀에… 軍 “대대장 잘 보살펴라”>, 2021-09-02.


 만약 샤를이 일반적인 아버지처럼 딸에게 관심을 기울였다면 이야기는 달라졌을 것이다. 아니, 딸이 태어났을 때부터 우선순위를 항상 딸에게 맞춰뒀다면 이런 꼴이 나진 않았을 것이다.


 딸의 초췌한 몰골을 보고 나면 당연히 양육을 담당했던 엠마의 일탈행위에도 관심을 가졌을 테니까. 그러면서 자연히 엠마의 동향도 눈치챘을 것이다. 그러면 엠마의 바람까지는 막지 못했더라도, 적어도 가산을 탕진하고 빚을 지는 사치 정도는 막을 수 있었을 겁니다. 돈을 딸을 위해 무조건 쓰게끔 할당하면서 가계부를 점검했을 테니.


 그러니, 이혼까지는 막을 수 없었겠지만, 최소한 딸 베르트가 부모를 모두 잃고 홀로 방적 공장*을 전전하며 사는 비참한 끝을 맞이하는 일만큼은 막을 수 있지 않았겠는가. 


* 19세기 아동 공장 노동자의 평균 수명은 17세 미만.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출처: 현대해상 공식블로그.


 소설을 얘기하는 도중 드라마까지 꺼내 들어서 미안하지만, 드라마의 막장 부부조차 자녀를 위해 얼마나 희생했는 지를 이야기하고, 얼마나 자식을 사랑하는지는 빠지지 않고 나온다. 최소한 자녀를 위한다는 마음은 남았기 때문에 부부도 험난한 이야기 끝에 종래엔 화해의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그렇기에 설거지론의 불을 끌 수 있는 건 다른 게 아닌 자녀에 대한 책임과 사랑의 눈물일 것이다.


 배우자에게 주지 못하는 애정. 자녀에게만큼은 주도록 하자.


 그것이 가족의 평화를 부활시킬 유일한 희망이니까. 














 이렇게 마무리하려는데, 너무 충격적인 걸 봤다. 부산물. 퐁퐁단이라는 제목이 붙은 그림에서, 설거지당한 남성의 자녀는 결혼 생활의 부산물이라고 불린다. 자녀를 보고 부산물이라니. 


 여초 사이트에서 나는 남편을 사랑한다는 말이 한 마디도 나오지 않은 것처럼, 남초 사이트에서도 나는 내 아이를 사랑한다는 말이 한 마디도 나오질 않았다.


 내 자식은 부산물이 아니다. 서울물이다. 같은 자신감에 넘치는 말은 어디에도 없다.


 손익계산서와 배신감을 안주로 삼킬 소주의 자리는 있어도 자녀가 안길 자리는 어디에도 없다니. 



 자녀.


 한국 가정평화의 출발은 자녀를

 아껴주는 데 있는데


 자녀만.

 자녀만 아껴주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인의

 해방이라고 설거지론자들이

 이를 갈고 우겨대니


 나는 울 수 밖에.


 슬프다.


 정말 죄송합니다. 글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문제가 되는 부분은 소설 속 샤를의 행적을 들어, '샤를이 딸 베르트에게 관심을 가졌더라면 딸이 고아가 될 일도 팔려나갈 일도 없다'고 설명하며, '아내는 사랑 못 하여도 자녀는 사랑하자'는 결론을 낸 문단입니다.


 그런데 어머니 엠마의 가정에 대한 무관심과 불륜은 서술하지 않은 데에 이어, 아버지는 자녀를 바라보는 것이 가정평화의 해법이라는 결론은 현재 일어나는 가정 문제의 책임을 아버지들에게 전가할 뿐입니다.


 또한 글 말미의 "여초 사이트에서 나는 남편을 사랑한다는 말이 한 마디도 나오지 않은 것처럼, 남초 사이트에서도 나는 내 아이를 사랑한다는 말이 한 마디도 나오질 않았다."는 서술과 다르게, 현재 아버지들은 부당한 상황 속에서도 자녀만을 보고, 자녀를 위해 견디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많은 분들께, 특히 부당한 상황에 놓인 아버지들에게 큰 심적 고통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 글이 게재된 커뮤니티와 이용객들 또한, 제 글의 작성과 관련이 없음에도 비난을 받게 되었습니다.


 모든 분께 머리 숙여 사죄합니다. 죄송합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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