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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오의 반딧불이 Jan 09. 2022

영화원작) 《선한 사람들을 위한 소나타(1991)》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출처: Psychology Today.


 '기억을 돌보는 사람'. 문학평론가 손정수가 작가라는 직업을 두고 한 말이다. 소설에서 드러나는 작가의 경험이 놀라우리만치 세밀하고 생생한 건, 그 기억을 온전히 돌보기 때문이라고. 


 맞는 말이다. 작가는 설령, 그 기억이 좋지 않은 것이라고 해도 돌본다. 그저 자신의 의식 중 일부를 말하기 위해, 세월 속에서도 훼손되지 않기 위해 덮지도 않고 돌본다. 그런 삶의 자세엔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으니, 그도 그 나름의 말로 존경을 드러낸 것이다.


 그런 자세를 가장 쉽게 읽을 수 있는 건, 다른 것보다도 고난과 압제의 시기를 증언하는 글이다. 기쁜 기억을 읽을 때는 독자도 활자를 뚫고 나오는 행복에 취해 작가의 노고를 잊게 되지만, 괴로운 기억을 읽으면 그 고통이 고스란히 읽히기에, 어떻게 이런 기억을 지우지 않고 보존하게 됐을까, 라는 의문이 자연히 마음에서부터 스며 나오게 되니까.



 오늘 읽을 책도 그런 기억을 담은 책이다. 영화 「타인의 삶(Das Leben der Anderen(2006)」의 원작 소설인 「선한 사람들을 위한 소나타Die Sonate Vom Guten Menschen(1991)」. 독일의 극작가 게오르크 드라이만Georg Dreiman의 자전적 소설. 


 그의 국적이 독일이라고 되어있기는 하지만, 실은 동독 출신이다. 동독. 독일민주공화국. 한국인들에게 친숙하면서도 낯선 나라. 통일 얘기할 때 하도 들어서 알기는 알지만, 통일 얘기할 때만 들었기에 낯선 나라.


 유달리 이야기가 적은 이유는 단순하다. 동포들이 있는 북녘에 비해 심리적으로 지리적으로 멀기도 멀다. 또 공산국가 치고는 압제의 정도가 부드러웠고, 공산국가 치고는 잘 살았으니까.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출처: 위키백과.


 전해지는 얘기들부터 그렇다. 느리지만 값싼 국민차의 이야기. 삼삼한 간을 한 고기 요리. 캐러멜 향이 나는 서구의 콜라와 달리 시트러스 향이 나는 콜라의 이야기나, 좁지만 식구들 살기에 나쁘지 않은 국가주택, 아니면 여러 가지 전자오락이 한 기계에 들어있는 오락기 같은. 뭐, 그런. 어쩐지, 동독에 살아보지 않은 이에게도 향수를 자극하는 이야기들.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출처: 연합뉴스.


 이웃보다 잘 산다고 망신을 주고 때려죽이거나, 자기 아이를 장마당에 팔아치운 이야기나, 농업 정책 실패로 이웃끼리 가족의 시신을 바꾸어먹은 이야기나, 외국 드라마를 봤다고 잡혀간 이야기, 이웃의 잘못을 만들어내어서라도 공개적으로 비방해야 하는 생활총화의 이야기 등. 


 우리와 산을 맞대고 사는, 바다를 맞대고 사는 이웃 공산국가의 잔혹한 이야기를 듣다가 동독의 이야기를 들자면, 그냥저냥 살만한 나라로 들리니까. 이러니 기억하지 않는다. 이야기가 주는 자극의 정도를 떠나서, 평범하게 잘 사는 사람의 이야기를 구태여 귀 기울여 들을 이유가 없으니까.   


 물론 아무리 잘 산다고는 해도, 풍요와 자유를 누리는 다른 선진국에 비할 바는 못 된다. 이들도 압제를 겪는 국가답게 자유와 인권이 없었다. 이른바 '깨끗한 지옥'. 그리고, 그런 지옥에서 견디어 살아남은, 또, 살아남게 해 준 선한 사람들의 이야기. 이 책의 이야기는 바로 그것이다.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출처: 위키백과.


첫 번째 선한 사람, 알베르트 예르스카. 


 탄압에는 여러 방법이 있다. 가장 단순한 건 암살. 감옥에 넣기. 고문 등. 지금도 국제면에서 보이곤 하는 탄압의 방법.


 저런 살벌한 광경을 보고 나면 부드러워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에 뒤지지 않는 방법이 있다. 직업인이 그들의 직무 능력을 다시는 올바르게 쓰지 못 하도록 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 밥줄 끊기.


 강사는 강단에 못 서고, 배우는 무대에 오르지 못 하고, 작가는 글을 일기에서조차 적지 못 하도록 하는. 그런. 흔히 블랙리스트라 불리는 그것이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도 이런 조치가 없는 건 아니다. 국가 간에도 특정 국가의 기업을 블랙리스트에 올려 수출을 규제한다. 경제 제재 혹은 경제 보복. 국가가 개인에게 하는 건 잘 없지만, 기업에선 흔히 보인다.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출처: 워싱턴포스트.


 예를 들어 물의를 일으킨 배우를 구매자들이 보이콧하기 때문에 눈치껏 피하는 경우나, 광고나 제품 일러스트에 혐오 문구 혹은 심볼이 삽입되었을 경우에 해당 직원이나 외주 업체와의 계약을 끊는 것과 같은.


 다만 이런 경우에도 쫓겨난 사람은 큰돈만 못 벌 뿐, 어떻게든 해당 직무 능력으로 먹고는 산다. 다른 데 가면 되니까. 사실, 보다 영세한 곳으로 가게 되어 짠 급여로 일할 수도 있지만, 인망이나 운에 따라서는 그런 불이익을 피하고 성공할 가능성도 크다. 그래서 징계조치에 가깝더라도 징계라고 부르지 않는 것이다. 처벌이나 보복이라기보다는 그냥 시장의 움직임에 맞추어 계약 여부를 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나 문화사업을 국책사업으로 하여 국가가 총괄하는 공산국가에선 그런 돌파구는 없었다. 동독도 예외는 아니었고.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출처: 위키백과.


 1976년 볼프 비어만의 시민권 박탈 사건으로, 동독 예술가들은 대책 위원회를 꾸렸다. 그중 끗발 있는 예술가들이 비어만의 추방을 재고해달라는 탄원서에 서명하면서 국가안전부, 슈타지가 주목하게 된다. 독재 국가가 늘 그렇듯 당을 위한 목적이 아닌, 다른 목적을 가지고 뭉치는 집단을 경계하니까.


 당연히 경계할 만하다. 모여서 한다는 얘기가 고작 사는 얘기나 두런두런 나누는 동아리 수준이라곤 해도, 자신의 삶과 고민거리만을 이야기한다 해도 정치는 삶의 영역이므로, 일상 이야기에선 자연히 정치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기 때문. 그리고, 그런 이야기의 식탁엔 정권의 칭찬거리만 오르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처음엔 국가 전복과는 상관없어도, 나중엔 반정권 이야기 모임으로 변하게 되는 건 필연이다. 


 그래서 슈타지는 처음엔 탄원서 서명했던 사람들에게 서명을 취소하라고 설득했다. 의외로 대부분 설득에 응했다. 그래서 거의 해체 수순까진 갔는데, 몇 사람은 끝까지 저항했다.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출처: 픽사베이.


 그런 그들에게 슈타지는 조금 더 강경하게 나갔다. 밥줄 끊기. 그들을 고용하는 것만으로도 똑같은 반체제 반동분자로 분류하는 것뿐이다. 이러니, 다들 미안하다고 말은 하면서도 고용을 하지 않을밖에. 아르민 뮐러슈탈*이나 글라체더** 등은 밥줄 끊겨도 철회하지 않았는데, 예르스카도 그런 사람 중 하나. 

 *아르민 뮐러슈탈(1930~):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 명예금곰상을 수상한 배우. 한국에선 미국 드라마 「웨스트윙(West Wing, 1999)」의 이스라엘 총리 역으로 인지도가 있다.

 **빈프리트 글라체더(1945~): 유명 동독 영화 「파울과 파울라의 전설(Die Legende von Paul und Paula(1973)」의 주인공 파울 역을 맡았던 배우. 「파울과 파울라의 전설」을 독일 총리 메르켈이 제일 좋아하는 영화로 꼽아 인지도가 있다.


 '직업도 없이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하고 절망하는 건 같으나, 뮐러슈탈과 예르스카의 차이는 행동. 뮐러슈탈은 탈동독을 택했지만, 예르스카는 골수 사회주의자여서 동독에 남는다. 떠나는 게 답은 아니라며 잡일을 하면서 주변 사람을 도와주거나 하다, 결국, 자살하고 만다. 드라이만은 선배이자 스승이자 친구였던, 값싼 포도주를 즐겨 마시던 소박한 남자 예르스카를 추모했다.


 그리고 드라이만은 예르스카가 남긴 악보 「선한 사람들을 위한 소나타」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어느 때보다 깊게.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출처: Discogs.


두 번째 선한 사람, 저항하는 작가.


 1986년, 서독 슈피겔지에 익명의 동독 작가 쓴 글이 실렸다. 「동독: 자살 통계의 비밀DDR: Die Geheime Selbstmord-statistik(1986)」.


 권력층의 누군가가 말했다. 한스 바이믈러 가에 있는 국가통계청에선 모든 것을 통계 내기에,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1인당 연평균 신발 구매량: 2.3켤레.
 1인당 연평균 독서량: 3.2권.
 1년간 전 과목 A를 받는 학생 수: 6,347명.

 그러나 한 가지 사실은 기재되지 않는다. 그건, 관료들 스스로에게 독이 될 테니까. 그 통계는 바로 '자살률'이다. 

 만약 당신이 통계청에 전화를 걸어 엘베강과 오데르강 사이에서, 발트해와 에르츠산맥 사이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살하는지 묻는다면, 우리의 통계청께선 침묵하실 것이다. 그러고선 당신의 이름은 정확히 기록해 놓을 것이다. 누구를 위해서? 국가안전부를 위해서.  

 국가의 안전과 행복을 위한다는 명목 아래, 1977년부터 자살률에 관한 통계는 기재되지 않고 있다.

 국가는 자살을 이렇게 칭한다. '자발적인 살인'.

 그러나 자살은 살인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자살엔 죽이려는 의지도 없고, 혈기도 없다.

 단지 죽음일 뿐. '희망의 죽음'. 

 우리나라가 9년 전부터 자살자 통계를 그만둔 이후, 유럽에서 동독보다 자살자 수가 많은 유일한 나라는 헝가리이다. 그다음은 우리나라이다. 독일민주공화국. '진정한 사회주의 국가' 말이다.

 오늘, 나는 통계에 실리지 않은 자살자 중 한 사람을 얘기하고자 한다. 위대한 연출가, 알베르트 예르스카를.


 당연하게도, 드라이만이 기고한 글이었다. 아마, 상부에서도 눈치챌 것이다. 그러나 수사하진 못할 것이다. 의심하려는 시도조차 못할 것이다. 그의 특별한 위치 때문이다.


 자신을 최고의 작가라고 부를 수는 없다며 겸손을 표하지만, 동시에 문화부장관이 몸소 자신의 연극을 참관한다는 사실을 소개하는 드라이만. 또 위원장인 호네커의 안사람께서 직접 서독의 책을 선물해줬다는 사실을 별로 자랑스럽진 않다고 말하면서도, 굳이 선물 받았던 때의 이야기를 흥겨움을 담은 문체로 설명하는 등.


 그의 '감춰둔 솔직함'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드라이만은 권력의 총애를 받는 인재였다. 


 이런 배경엔 그가 예르스카와 달리 권력에 아첨할 줄 알았기 때문이라는 점도 밝힌다.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출처: 픽사베이.


 예를 들어, 연출. 한 연극에서 주인공이 쓰러지며 내면의 크고 작은 목소리를 듣는 장면이 있었다. 연출가는 흰 옷을 입은 여배우들을 흰 격벽 사이사이에 세워두고, 목소리가 나올 때마다 해당 여배우에게 스포트라이트를 주는 연출을 구상했지만, 드라이만은 반대했다.


 예술이란 본디 사적인 것이나, 사회주의 레알리슴에 따르면 예술은 노동자와 사회주의 체제를 위한 것이다. 그렇기에 그에 맞게 공장에서 일하다 쓰러지는 주인공을 부축하러 와준 동료들 앞에서, 주인공 스스로 독백하는 것으로 바꾸었다. 이렇게 하면 장면의 의미가 확연히 달라진다. 개인의 병적인 고독을 몽환적으로 연출한 장면이, 동독의 공장을 보다 인간미가 넘치는 곳이라고 말하는 장면이 된다. 또한 동독의 따뜻한 사회주의 동료애를 선전하는 장면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떳떳하진 못하다. 이런 의식은 평소에도 드러난다. 동료 배우이자 애인인 크리스타가 성탄절 선물로 넥타이를 주자 곤혹스러워하는데, 그 모습을 본 애인이 '맬 줄 모르느냐?'라고 묻자, 드라이만은 답한다.


 '알아. 잊지 말라고, 전에 내가 혼자 힘으로 이 부르주아의 족쇄에서 해방되기 위해 투쟁했다는 사실을.'이라며 사회주의 작가다운 유머 센스를 보여주는데, 실은 기자가 자신을 평한 말을 인용한 것.


 그 당시 동독 예술가들 자서전에서 흔하게 발견될 법한 문구이기도 한데, 그 말과는 정반대인 자신을 조롱하는 말이기도 하다. 앞서 말한 '성공한 작가'의 지위는, 사회주의의 족쇄에서 해방되기 위해 투쟁하지 '않음'으로써 얻은 것이니까. 


 실제로 맬 줄 몰라서 옆집 아주머니에게 부탁하는 맹한 구석도 있지만.


 어쨌든 그런 '순종적인 작가'이기 때문에 그런 글을 투고할 수도 있었고, 동료들의 망명을 도울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순탄한 건 아니었다.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출처: Art & Object.


세 번째 선한 사람, '뮤즈' 크리스타.


 여느 문학인과 같이, 드라이만에게도 '뮤즈'***가 있었다. 극단 동료 배우이자, 애인인 크리스타-마리아 질란트.

 ***뮤즈: Muse. 학문을 관장하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여신에서 유래. 주로 예술가에게 영감을 주는 존재를 일컫는 말로 쓰인다.  


 애정이 얼마나 깊었는지, 글의 허리를 차지하는 건 그녀이며, 애정은 분량만으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깊다. 특별히 공들여 파괴한 문법부터가 그렇다. 둘의 화해와 성애 이후엔 문법적 성이 변하는데, 이를 테면 남성명사가 통성명사가 된다. 정관사 Der, Die 등이 붙을 자리에 Das가 들어가는 식으로 문법파괴가 생기는 게 이 때문. 서로의 완전한 합일이 이루어졌다는 걸 중성관사를 넣어, 성의 구분이 없어지는 걸로 표현한 것이다.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출처: Christianity.


 이 두 연인은 서로를 '천사'라고 부르는데, 천사에겐 성별이 없다는 말과 문법적 성의 제거를 생각하면 이채로운 점이다. 이러한 문법파괴는 세상의 법칙보다 '우리'가 우선한다는 표현으로 종종 쓰이곤 하는데, 이 소설도 마찬가지.


 영어 번역본에서도 이 점을 반영했다. 명사에 성별이 없는 영어의 특성상 그대로 옮길 수는 없었으나, 성별의존명사가 있다는 것에 착안해 대명사를 혼재해두는 방식으로 해결했다. 이를테면 Queen, Girl, Women 등의 단어는 She가 필요하다. 여기에 She 대신 He를 넣거나, She가 들어갈 자리에 He를 넣는 식.


 남자 주인공이 그녀를 칭할 땐 남성명사. 연인이 주인공을 칭할 땐 여성명사. 요즘 나왔으면 Ze, Xe 등의 단어를 쓰면 되니 좀 수월했을 것이나, 당시 상황에선 최선의 번역이었다.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영화 「타짜(2006)」 中.


 그러나 이런 사랑을 받는 크리스타도, 배신을 해야만 했다. 


 어느 날이었다. 현관에서 벨이 울려 나가 봤는데, 문 앞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건너편 자동차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살찐 성대에서 나오는 '다음 약속 시간을 잊지 말라'는 둥의 말과, 자신의 애인 크리스타가 옷을 여미는 모습. 아무리 바보라도, 그건 알 수 있다. 크리스타가 다가오는 것을 본 드라이만은 차마, 다시 올라가지도 못하고, 그저, 현관의 그림자 속으로 숨었다. 그리고 보았다. 빛이 들어오지 않는 어둠을. 그리고 보았다. 어딘가 망가진 사람처럼, 부서진 사람처럼 힘겹게 오르는 그녀의 모습도….


 훗날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녀는 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그렇기에 불법 마약성 치료제를 구해 먹고 있었고, 그 사실이 족쇄가 됐다. 크리스타는 장관에게 협박을 당해 성상납을 강요받은 것이었다. 


 그렇지만 드라이만은 묻지 않았다. 뭐가 어쨌건 나쁜 건 그 돼지이지, 그녀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저, 말없이 껴안아주고, 말없이, 전과 다르지 않은 생활을 부수지 않고 유지하도록, 노력했다. 부수고 싶지도 않았으니까.


 그런 사랑을 받았던 그녀이지만, 배신을 해야만 했다. 마약이 필요할 정도의 우울이 사랑 정도로 나을 리는 없었으므로, 계속 약을 구한 게 화근이었다.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출처: History Today.


 타자기를 바꿔가며 글을 썼지만, 사실, 슈타지는 동독의 실태를 고발하는 글을 드라이만이 썼다고 짐작은 하고 있었다. 다만 물증이 없었을 뿐.


 책에서 나오는 건 아니지만, 알 것 같긴 하다. 미국의 작가 헤밍웨이가 문체를 '작가가 어떤 사실을 진술할 때 드러나는 그 사람만의 고유한 어색함.'이라고 정의한 것과 같이, 문체를 숨길 수는 없었을 테니까.


 그것이 아니어도 예르스카를 기리는 첫 글이나, 지도층의 뒷얘기를 잘 아는 글솜씨 좋은 작가는 몇 명 없지 않은가? 포위망이 좁혀드는 건 예정된 수순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그 타자기의 위치를 알아낸 경로가, 슈타지의 수사가 아닌 크리스타의 증언이라는 것이었지만. 


 문지방 밑을 뜯어 숨겨두었는데, 그 위치를 알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틈이 있어 좀 삐걱거리긴 하지만, 국가주택에서 그런 삐걱거림은 흔했으니. 솔제니친이 쓴 「연옥 1번지Der erste Kreis der Hölle(1970)」를 서독에서 출판된 판본****이라 서독 문학이라 여길 정도로 약간 둔한 데가 있는 슈타지 요원들이 찾기는 어려웠음이 분명했다.

 ****서독 도서: 앞서 말한 호네커 부인이 선물해준 그 책.


 그러나 마지막 수색에선 달랐다. 부장이라는 작자가 몇 번 보지도 않고 바로 그 위치를 정확히, 단번에 찾아내었으니까. 


 설마, 하고 크리스타를 보았으나, 드라이만의 눈을 피하는 크리스타의 얼굴엔, 죄책감이 만들어낸 어둠만이 드리워질 뿐이었다. 배신감이 상당했던지, 앞서 말한 '공들인 문법파괴'도 이 일을 설명하는 부분부터는 보이지 않는다. 


 참 의외이지만, 이것이 크리스타가 선한 사람인 이유이다.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출처: DW.


 책에서 계속 언급되는 선한 사람(Gute Menschen)이라는 호칭이 참 이채로운데, 이것은 동독 국가안전부에서 애국독일인(Deutsche Patrioten)이라는 호칭과 함께, 사회안전요원(Gesellschaftlicher Mitarbeiter für Sicherheit: GMS)을 일컫는 말 중 하나이다. 쓰이기는 선한 사람이 더 많이 쓰였다. 사안요원GMS과 두운('G'ute 'M'en'S'chen)이 맞으니까.  


 사안요원은 요원과 일반 시민의 경계에 위치한, 국가안전부만 운영하던 특수한 지위의 요원이다. 일반인 중 신원과 충성심이 확실한 자를 뽑아 작전에 투입하거나 정보 제공을 하거나 하는 식이다. 부역자와 비슷하지만, 분류상으로 요원 신분. 그러니까 일반 부역자와는 차원이 다른 의무를 줬다는 게 차이. 비공식 요원과의 차이는 사안요원은 자신의 상부나 작전에 대한 정보가 제한됐다는 점. 정작 나라가 기울어 붕괴 몇 년 전부터는 비공식 요원과 직무의 차이는 없어졌지만.  


 슈타지의 요원은 타국에 비해 굉장히 많은 것으로 유명한데, 1:180 비율의 놀라운 비율의 숫자는 여기서 기인한다. 어쩔 수 없이, 살기 위해 부역해야만 했던 일반 시민들.   


 이 고발은 그런 사안요원이 되어야만 했던 동독의 보통 사람들을 위한 헌사이기도 하다. 크리스타와 같은.


영화 「타인의 삶(2006)」 中.


네 번째 선한 사람, 'HGW XX/7'


 그런데, 부장이 문지방을 뜯자 방 안의 공기가 변했다. 그 굳은 표정의 기계 같은 요원들 모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문지방 밑엔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있어야 할 타자기와 원고는 없고, 돌과 먼지뿐이다.


 사과를 하고 물러나는 요원들 틈바귀에서 얼떨떨해진 그는, 이내 크리스타에 생각이 미친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타이어가 아스팔트를 긁는 소리와 자동차 외피에서부터 울리는 소리가 그녀의 운명을 말해주었을 뿐이었다.


 몇 년 뒤. 독일이 통일되고, 자신의 인생을 추억하게 될 수 있을 즈음에도 그 일은 슈타지가 연인을 앗아간, 그때의 일로만 남았다. 


 그런데 우연찮게, 자신과 친하게 지냈던 전 동독 문화부장관을 만나게 되면서 이야기는 달라진다.


 드라이만은 장관에게 어차피 다 끝난 마당이니, 물어나 봤다. 왜 자신을 감시하지 않았느냐고. 그런데 의외였다. 사실, 감시는 전부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더니 그는 못 믿겠으면 집의 전등 스위치나 한 번 뜯어보시라고 한다. 애인을 침대에서 만족시키지 못했었나 보더라 하는, 그 살찐 성대에 한 방 먹이려다 참고 '나라를 지배하는 게 당신 따위의 인간이었으니.'의 뇌까림만 남기고 왔을 뿐이었다.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출처: 머니투데이.


 집을 뜯어보니, 정말로 전선이 나왔다. 전선의 흔적을 찾아갈수록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침실, 서재, 거실. 심지어 변기 밑까지.


 어떻게 된 걸까. 표면 의식 아래 잠자고 있던 의혹이 깨어나 머리를 휘젓는다. 도청당하고 있었는데, 왜 자신은 그런 큰 일을 벌여놓고도 무사했었나. 왜 자신은 아무런 해도 입지 않고 나온 걸 의아해하면서 보는데, 자신이 했던 반체제적인 말이나, 행동지시, 작전 모의 같은 내용이 전부 지워졌다. 담당자는 'HGW XX/7'라는 코드명의 요원. 게르트 비즐러. 


 드라이만의 모든 일을 눈감아준, 선한 사람이었다.


 수소문해 찾은 그는, 무척 초라한 모습이었다. 광고물이나 우체통에 꽂는 허드렛일만 하는, 핏기 없는 얼굴의 노인.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사람을 살렸지만, 누구에게도 보답받지 못했다. 감사인사조차도.


 당연했다. 동독 경찰대학 교수에, 슈타지 엘리트 요원이라면 그 경력 자체로 공공의 적이니까. 말을 하여도, 들어줄 리 없었다. 


 그런 그에게 드라이만은 직접 찾아가 인사를 하려다, 발을 멈추고 돌아섰다. 작가의 감사인사는 그런 식으로 하는 게 아니니까.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출처: Search Engine Land.


 드라이만은 글을 썼다. 자신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선한 사람들에게 감사하기 위해, 글을 썼다. 


 혀가 잘리어 자신의 고통을 말할 수 없는 사람. 스스로 입을 봉한 사람. 말할 자격을 박탈당한 사람.


 지옥에서 함께 견딘 사람은 있어도, 자신의 지옥을 말할 수 있는 이는 얼마 없다. 그런 사람을 위한 입이 되어주는 것이 바로 작가의 일이니까. 자신의 고통만이 아닌, 남의 고통을 말하여주기 위해서도 존재하는 것이 작가의 글이니까.


 그것이 그가 택한 작가의 글을 쓰는 이유였다.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보답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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