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고 싶은 기억
요즘 세계적으로 열풍인 케데헌(케이팝 데몬 헌터스)에 모두가 심취해 있다. 나이가 60살이 가까워 오는 우리집 남성분도 케데헌에 푹 빠져서 한동안 재미와 위안을 받으면서 지냈다. 애니메이션이지만 캐릭터들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가 현실적으로 느껴지고, 서로를 존중하는 스토리가 모두를 더 빠져들게 하는 것 같다. 그에 더해 남녀노소를 아우르는 세련된 음악은 생활에 지쳐 의기소침한 이들에게 에너지를 선사해 주었다.
나도 한때 BTS를 좋아하여 열심히 유튜브를 애청한 적이 있다. 인생이 무의미하고 활력이 없었는데 BTS를 통해 몰입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다. 그들의 열정과 노력이 화면을 통해 느껴지고 그것에 더해 음악에도 빠져들어 힐링이 많이 되었던 기억이 난다.
케데헌은 진우라는 남자(아이돌, 악마) 캐릭터가 있다. 400년 전 자신의 목소리를 팔아 어렵게 사는 가족을 살리려 하였지만, 결국은 악마의 유혹에 빠져 가족을 버리고 혼자만 살아남는 인물로 나온다. 진우는 수백 년 동안 악마로 살아왔지만 인간이었을 때 가족을 버린 죄책감이 기억으로 남아 고통 속에 살고 있었다. 결국 대장악마와 거래를 하면서 혼문(여성 아이돌)을 없애고 자신의 기억을 지워주기로 약속한다. 기억에서의 고통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지막에 자신의 영혼을 루미(여주인공)에게 주고 죽음을 맞이한다. 기억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세상에는 의도치 않은 고통을 겪으며 살아오신 분들이 있다. 처음에 본인이 시작하였든 그렇지 않든 세상 물정을 모르던 어린 시절에 나쁜 사회에 발을 들여놓고 빠져나오지 못하는 상황들이다. 진우처럼 악마가 주는 사탕발림에 뭣도 모르고 뛰어들었다가 빠져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럴 때 사회와 가족이 그들을 도와주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외면하고 스스로 해결하라고 등 떠민다. 아무것도 모르는 진우와 같은 이들은 원치 않게 악마와 거래를 하고 그곳에서 살게 된다. 이미 늦었다는 것을 알지만 빠져나올 수 없는 것이다. 그 아픔들은 차곡차곡 기억으로 쌓여 평생 벗어날 수 없는 고통으로 남는다.
수십 년을 고통 속에서 산 Y는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머릿속에서 예전이 기억들을 다 지워버렸으면 좋겠어요. 기억만 나지 않아도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케데헌의 진우와 똑같다. Y와 관련된 사람들의 얘기가 기사로 나간 적이 있다. 그 기사에 달린 댓글들은 Y의 과거 상황을 이해하기보다 질타한다. 진우와 마찬가지로 자신으로 인해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고 자책하는 사람에게 손을 내밀기보다 '너 자신이 선택한 거야'라고 한다. 처음 선택이 잘못되었다고 하여 그 이후의 삶도 계속 잘못되어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그리고 적어도 그 이후의 삶에 대한 선택권은 본인에게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대부분은 한 번의 잘못된 선택으로, 사회에서 외면당하고 평생을 고통 속에 살아야 하는 경우가 많다.(자세한 얘기를 하지 못하는 것은 또 다른 가해를 막기 위함이다)
진우의 400년처럼 악마가 되었으면 악마답게 살면 된다. 하지만 인간은 아픔을 겪으면 뉘우침을 얻는다. 잘못을 깨닫는 순간 사회는 이미 그들에게 등을 돌려 버린다. 자신이 하지 말아야 할 삶에 대한 인간적 고뇌는 평생을 따라다닌다. 평생 그 고통 속에서 사는 것은 감옥도 아닌 지옥인 것이다. 우리는 어쩌면 지옥의 구덩이에 빠져 허우적대는 그들에게 발길질은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케데헌에서는 세상이 악마들에 의해 지배당할 뻔했다. 하지만 서로의 아픔을 공감하고 감싸 안은 주인공들이 있어 다시 좋은 세상이 된다. 케데헌에 열광하는 것은 우리도 그런 세상을 만들고 싶어서가 아닐까 싶다. 아픔을 겪고 소외되어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루미, 미라, 조이, 진우처럼 우리도 안아줄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