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23년간 외롭게 살았습니다. 혼자 살아가는 삶이 저에겐 함께하는 것 보다 훨씬 편했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가볍거나, 혹은 깊습니다. 유쾌한 자들은 고민하지 않았고, 고민하는 자들은 유쾌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안타깝게도 재미있는 것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한도 끝도 없는, 답이 나오지 않는 진지한 것들 또한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섞일 수 없는 것은 당연했겠지요. 진지함은 드러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유쾌함은 쉽사리 드러나곤 합니다. 그래서 제 학창시절 친구들은 유쾌한 사람들뿐입니다. 물론 그들도 고민이 있긴 하다만, 대부분이 현실적인 것들뿐이고, 제가 항상 고통에 몸부림치며 살아가는 분야인 죽음, 삶, 사랑 등등을 정의내리는 것들엔 관심이 딱히 없습니다. 친구들과 교류하는 것은 저를 지치게 하곤 했습니다. 마음속에 커다란 돌덩어리가 있는데, 이를 작은 돌멩이 정도로 쪼개 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친구들은 이 사실을 잘 모를 겁니다. 티를 내지는 않았거든요.
[난 너희가 참 좋아. 너희와 함께 있으면 행복해.]
제가 제일 많이 했던 거짓말입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였나요, 저는 피아노 연습을 해야 한다는 핑계로 친구들과 함께 급식실에 가는 것을 피했습니다. 제가 밥도 안 먹고 음악공부를 하는 게 걱정되었던 친구들은 저를 찾아 음악실에 왔습니다. 저는 그들이 제발 이 공간에서 떠나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혼자만의 시간이 절실히 필요했습니다. 다행히 음악선생님께서 점심시간에는 저 말고는 출입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해버리셨기에, 저는 무사히 혼자 남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음악실은 제게 은신처와도 같았습니다. 울 수 있는 공간, 어두운 내면을 꺼내도 괜찮은 공간, 혼자여도 괜찮은 공간. 그 이후로 더 이상 사람들 앞에서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제 자신을 견디지 못할 지경에 이를 때가 오면, 저는 항상 음악실을 찾았습니다.
그러다 작년에 처음으로 친구가 생겼습니다. 가벼우면서 동시에 깊은, 저와 닮은 인간들을 어쩌다 만나게 되었습니다. 23년 만에 처음으로 외롭지 않다는 감정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혼자 있는 것을 그토록 좋아했던 저는, 그 애들이 부르면 모든 걸 내려놓고 달려가곤 합니다. 바쁘다는 핑계도 대지 않습니다. 아무리 일이 많고 공부할 것이 쌓여있어도, 그 친구들을 만나서 이야기 하는 것 보다 재미있는 건 세상에 없었습니다. 학창시절의 안식처가 음악실이었다면, 작년부터 제가 도망칠 곳은 이 친구들이 만들어 놓은 울타리였습니다. 저는 오만하게도 ‘지금까지 사귀었던 친구들은 다 가짜였구나’라는 판단을 스스로 내렸고, 이 애들과 매일을 함께하는 대신에 오랜 친구들을 멀리하기 시작했습니다. 모임에도 나가지 않았고, 송년회, 신년회에도 얼굴을 비추지 않았습니다. 저는 가면을 쓰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과 온전히 함께하고 싶었고, 안타깝게도 제 학창시절 친구들은 그런 사람들이 될 수가 없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저는 친구들에게 먼저 연락을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자기들끼리 알아서 약속을 잡고, 저에게 통보하곤 했습니다.
[지원아 우리 내일 볼 건데, 올 수 있으면 와.]
[미안해 나 내일 일이 바빠서. 다음에 보자.]
사람을 잃었지요. 일은 핑계인걸 눈치 채지 못했을 리도 없습니다. 저는 이렇게 사람을 떠나보내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라고 여겼습니다. 변명을 좀 더 해보자면, 솔직한 제 자신을 드러낸다 해도 저를 품어줄 수 있는 사람들이 드디어 생겼는데, 그 외의 다른 사람을 챙길 겨를이 있었을리가 없지요.
그러다 결국, 저는 10년 지기 친구가 승무원이 되어 싱가폴로 이민을 가는 송별회 자리에도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후회는 하지 않습니다. 저를 숨겨야하는 자리는 단 1분도 행복하지가 않았거든요. 그래요, 저는 학창시절을 함께했던 친구들을 그저 수단으로만 대했던 것입니다. 철저히 외로워지는 건 싫고, 재미는 있으면 좋겠고, 그러나 제 모든 걸 보여주기에는 알맞지 않은 사람이라는 건방진 판단 하에 마음을 내어주지는 않은, 그러다 나를 품어줄 사람들이 생기자마자 떠나버린 제가 친구들 입장에서는 얼마나 이기적인 사람이겠습니까. 송별회까지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은 완전한 단절을 의미했습니다. 저는 그래서, 중학생 때부터 친했던 10년 지기 친구들과는 이제 완전히 끝났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마음 한 켠이 왜 이렇게 쓸쓸할까요. 저는 분명, 그들과 더 이상 친구로 지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수 천 번도 더 했습니다. 물과 기름은 어우러질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는 기름이었고, 그 애들은 물이었습니다. 저는 그 애들의 깊은 곳까지 침투할 수 없는, 표면에만 둥둥 떠다니다가 드디어 건져올려졌을 뿐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마음 한 켠이 왜 이토록 쓸쓸할까요? 시간이 맺어준 인연을 놓지 않는 것 또한 인간적인 삶인가요? 중학생 때의 추억을 온전히 함께한 이들을 내치지 않는 것이 더 옳았을까요? 이제는 모든 것이 헷갈립니다.
공존하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고 믿어왔는데, 저의 인간관계를 살펴보면 공존과는 거리가 멉니다. 비슷한 사람을 찾는 것은 인간적 본능이니 그렇다 치고, 서로 다른 사람을 다르다는 이유로 피하는 것이 틀렸다는 것은 압니다. 하지만 그것이 저에게 형용할 수 없는 스트레스를 가져다 준다면요? 만나기만 하면 도망칠 곳이 필요함에도 인연을 이어가는 것이 옳은가요? 만남 자체가 은신처가 되는 사람이 생겼는데도 불구하고 끊어내지 않아야 하는 것은 결국 제 마음의 평안을 위해서일 뿐인가요? 잘 모르겠습니다.
저에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아있는 고등학교 때 친구 두 명이 있습니다. 그 애들은 제가 바쁘다는 핑계로 약속을 취소 한 것이 한 두 번이 아님에도 계속해서 저를 찾습니다. 제가 보고싶다네요. 저희 집까지 올 테니 만나자고 합니다. 언제 어디서든 저를 응원하겠다고 합니다. 이렇게나 오랫동안 그들을 피했음에도, 그들은 저를 아직 사랑하나봅니다. 어쩌면 이제는, 적어도 그 두 명에게는 제가 가면을 벗어도 괜찮지 않을까요? 아무리 외면하려고 애써도, 저는 결국 사람을 잃는 게 두려운가 봅니다. 이 친구들도 중학교 때 친구들처럼 잃을 수는 없어요.
내려놓겠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제가 사람을 품겠습니다. 안식처가 하나 둘씩 늘어난다면, 언젠간 저도 누굴 만나든 온전한 제 자신으로 설 수 있는 날이 오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