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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들은 가장 잔인했던 말

불임과 난임

by 민선미

'불임입니다.'라는 말을 결혼 후 2년 뒤에 의사에게 들었다. 내 귀가 의심스러웠고 차라리 진찰한 의사가 돌팔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말을 듣고 절대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며 인정하지 않았다.

이보다 더 잔인한 말이 또 있었을까. 결혼한 부부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불임(不姙)'이라는 무시무시한 낱말은 '난임(難姙)'으로 명칭이 바뀌었고, 남편이 질리도록 아기타령만 하며 아기를 가지려고 백방으로 노력했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계속 반복되는 임신 실패로 우리는 금세 지쳤다. 매일 남편과 싸우며 같이 있어도 외로웠다. 그만 포기하자고 남편이 몇 번을 말했지만 나는 그 말이 더 아기를 원한다는 말로 들렸다.

밖에 나가면 눈에 띄는 것은 모두 임산부였고, 유모차에 타고 있는 아가들만 눈에 들어왔다. 그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이 세상에 나 혼자만 아기를 낳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해가 뜨고 지는 일이 수없이 흘러도 내 몸에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시간이 멈춘 듯 지독하게 눈물겹고 서러웠다. 가장 속상했던 것은 이 고통을 어디에 분출할 곳도 없었고, 내 마음을 알아줄 곳이 없어 타지에서 더 쓸쓸했다.

가족들이 알아차릴까 두려웠고, 도와주기 못해 전전 긍긍하시는 양가 부모님을 생각하니 더 애가 탔다. 최대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더 행복한 척하는 일이었다. 친구들에게도 초조한 내 마음을 들킬까 봐 아무렇지 않은 척, 괜찮은 척, 태연하게 사람들을 대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한없이 무너졌다.






왜 안 지쳤겠습니까?


결혼한 것을 후회하기도 했고, 스쳐 지나가게 던졌던 말 한마디도 다시 곱씹게 됐다. 시어머니가 지어준 한약을 잘못 먹어 죽도록 아프기도 했다.


난임의 원인이 '원인불명'이라서 더 힘들었고 병원을 아무리 옮겨 다녀도 뾰족한 수는 없었다. 시어머니의 마지막 소원이라는 서울 큰 병원에 가보는 게 소원이라고 하셔서 못 이기는 척 찾아갔었다. 어찌 된 일인지 그 병원에서 시험관아기 시술을 진행했었고, 냉동배아로 임신에 성공했다.


그 병원과 시기가 맞았는지 의술이 좋았는지 운이 좋았다. 여러 차례의 위험한 고비는 있었지만 아기를 지켜냈고 품에 안을 수 있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실패할수록 마음이 단련되었는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이 생겼다. 단 하나만의 목표를 위해 내게 포기란 없었다.

그때 당시 경제적으로 여유롭지도 않고 돈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부자를 꿈꾸기보다 아이가 먼저였다.

이런저런 생각이 복잡한 시기일수록 더 간절히 바랐고 행복한 가족의 모습을 시각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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