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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적륜재 Oct 08. 2022

안톤 마르틴 펠러를 찾아서 (II)

오스트리아에서의 출생과 스위스에서의 교육: 1914년까지

*이 글은 안톤 마르틴 펠러의 이야기 매거진안톤 마르틴 펠러를 찾아서 (I)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참고하십시오.


이렇게 역사 상에 누구나 아는 위인도 아닌 안톤 마르틴 펠러같이 그쪽 업계에서는 아, 그런 이름 들어본 적은 있어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잘 모를 수 밖에 없는 인물의 행적을 찾는 과정은 의외로 기본적인 문제에 부딪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까 해당 분야에서 활동을 하는 동안에는 그래도 사람들의 기록 속에 단편적인 이름과 정보가 언급이 되는데, 사회적 활동 이전이나 이후의 이야기는 대체로 찾기 어려워서 단적으로 언제 태어나 언제 죽었는지 같은 기본 정보도 알기 어려운 경우가 의외로 많다.  

안톤 마르틴 펠러의 경우는 다행히 출생 연도와 사망 연도는 알려져있다. 이번 글에서는 안톤 마르틴 펠러가 조선 땅에 등장하기 전까지 알려진 일들을 정리해보려고 한다.


1. 출생

안톤 마르틴 펠러 Anton Martin Feller는 1892년 오스트리아 티롤 지방에서 출생하였고 1973년 미국 뉴저지주에서 사망하였다. 출생연도는 그의 미국 인구통계조사 자료에 의하면 1892년이 확실한데 출생지에 대해서는 약간 다른 정보가 존재한다. 김정동(2007)과 김영재(2013)가 모두 펠러에 대한 기본 정보 소스로 사용한 니시자와 야스히코 西澤泰彦의 책 "海を渡った日本人建築家-20世紀前半の中国東北地方に おける建築活動"(1996)에는 1892년에 오스트리아 티롤지방의 보양지 "サンクト·イン·ヨハン” (산쿠토·인·요한)에서 태어났으며, 몰년은 미상"이라고 기록되어있다. 이 출생 정보는 김영재의 ''나카무라 요시헤이의 서양건축양식의 수용과정과 그 의미'(2013) 논문에는 그대로 전재되었지만, 김정동은 논문 "라이트와 극동 아시아, 그 연관성에 대하여"(2007)에서 펠러가 "오스트리아인으로써 알프스 산중에 있는 시골 마을 쿠르휘르스타인(Kurfirstein)에서 태어났다"고 별도 출전 표기없이 기록하고 있다. 미국의 공식 기록 데이터베이스들에 남아있는 그의 데이터에 의하면 그는 1892년 4월 17일 오스트리아의 잔크트요한 St. Johann 출신이다. 잔크트요한은 오스트리아 서쪽, 남독일 바이에른 지방과 가까운 작은 시장도시이다.   

표시된 지점이 잔크트요한의 위치이다.

김정동의 논문에 나오는 '쿠르휘르스타인' Kurfirstein은 현재 해당하는 지명을 검색할 수가 없다. 한가지 추정하기로는 쿠르휘르스타인이 Kurfirstein이 아니라 Kurfürsten(쿠르퓌르스텐)일 가능성이다. 이 단어는 지명이 아니라 신성로마제국의 "선제후"라는 의미이다. 잔크트요한은 당시 선제후령은 아니었지만 오랜 기간 신성로마제국의 영토에 해당되었고 펠러가 태어난 잔크트요한 지역 내의 마을이 어떤 선제후령이었을 가능성이 하나있다. 김정동은 논문에서 미국의 "일리노이 주 인근 오크 파크 그리고 애리조나 주 피닉스 시에 있는 라이트 재단 본부를 찾아보았다"며 "안톤 필러의 자료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단 한 줄짜리 기록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고 하고 있다. 논문의 참고자료 목록을 봐서는 이 출생지에 대한 출전은 그 '한 줄짜리 기록"이었던가 하는 추정을 하고 있는 중이다. 딱히 출전을 밝혀야 할 정도로 메인 테마가 아니어서 그랬나 싶기는 하지만,  하지만 다른 자료에서 '쿠르휘르스타인'으로 추정할 수 있을만한 내용을 찾았다. 펠러는 1921년부터 1922년 초까지 나카무라 요시헤이와 함께 구미 여행을 다녀온다. 이때 나카무라가 남긴 여행 일정의 장소들에 오스트리아에는 다음의 5개 지명이 등장한다; 인스부르크, 쿤후스타인, 잘츠부르크, 린츠, 비엔나. 다른 곳은 유명한 곳이지만 "クンフスタイン"이라고 적힌 곳은 사실 여전히 검색이 되지 않는 지명이다. 하지만 바로 잔크트요한의 바로 인근, 그리고, 나카무라가 지도에 그린 동선 상에 티롤 지방의 중요 거점 중의 하나인 쿠프슈타인 Kufstein 이 있으며, 이곳을 김정동의 논문에서 언급한 '쿠르휘르스타인'을 의미한다고 보아도 충분히 합리적일 것 같다. 이 여행동안 나카무라는 펠러의 고향에서 그의 가족들을 만났다고도 하고 있다. (이 부분은 2022/10/28에 해당 단락을 삭제하고 전체적으로 수정 보완하였습니다)

오스트리아 지도상의 동선이 티롤의 쿠프슈타인을 지나간다

아무튼 일단 필러의 출생지는 본인이 미국의 공식 서류들에 출생지로 밝힌 오스트리아 티롤지방의 잔크트요한으로 확정을 하는 것이 가장 정확한 것 같다.  

*한가지 흥미있는 것은 티롤지방에는 Schützenkompanie 쉬첸콤파니 라는 일종의 민병대 혹은 사냥클럽이 뿌리인 문화 전통 조직이 있다. 그런데 잔크트요한에 조직된 쉬첸콤파니의 이름은 "펠러-쉬첸콤파니 잔크트요한 인 티롤" Feller - Schützenkompanie St. Johann in Tirol인데 흥미롭게도 18세기 민병대를 이끈 안드레아스 펠러와 그의 아들 안톤 펠러의 이름을 따서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는 것이다. 안톤 마르틴 펠러 역시 이 펠러 집안과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중이다.

 

2. 교육 - 취리히 고등공업학교

펠러는 이후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가 아닌 알프스 산 너머 취리히로 유학을 떠난다. 위의 지도에서 보면 잔크트요한에서 수도 비엔나와 스위스의 취리히가 거의 같은 거리만큼 떨어져있다. 나카무라 요시헤이는 그의 미발표 자서전 '自傳'에서 '그는 취리히의 고등공업학교를 졸업하고' (氏はチューリッヒの高等工業学校建築科を卒業し)라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니시자와는 해당 취리히 고등공업학교의 후신인 스위스연방공과대학에 조회하여 학무국장 베루토싱가(ベルトシンが)씨로부터 "1914년부터 1년간 휴학, 15년 이후는 행방불명으로 취급되어 20년에 동교에서 제적되었다"라고 확인했음을 밝히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펠러가 학교를 졸업한 것이 아니라면 몇년간 어느 정도의 교육을 받았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1914년의 휴학은 그가 참전하여 포로가 된 사실을 고려하면 세계 1차 대전의 징집이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그가 나온 취리히의 '고등공업학교' 즉 오늘날 취리히연방공대(ETH)의 전신인 이 학교는 펠러보다 조금 이른 시기인 1896년에 아인슈타인이 입학하여 졸업한 학교이다. 같은 학교틀 두고 아이슈타인의 약력에서는 대부분 취리히 연방공대를 나왔다고 하는데, 왜 펠러의 약력은 취리히 고등공업학교라고 알려졌을까? 나카무라가 고등공업학교라고 소개한 것은 당시 학교의 정식 명칭 Eidgenössische Technische Hochschule가 독일어를 직역하면 연방 Eidgenössische 기술Technische 고등학교Hochschule 이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구 일본제국의 학제에서는 대학과 고등공업학교가 확실히 다른 위계의 학교이지만 취리히 고등공업학교는 펠러가 재학하였던 시기에 실은 이미 정규학사 학위를 부여하는 대학교였었다. 먼저 이 학교에 대한 소개를 간단히 하면, 원래 취리히 대학과 같은 스위스의 대학교들은 주정부 칸톤의 학교들이었다. I9 세기 스위스 연방에 대한 정치 사회적 요구가 거세지면서 I854 년 연방 기술전문학교 Eidgenössische polytechnische Schule가 취리히에 설립되었다. 지금도 스위스의 연방대학은 독일어권의 취리히공대와 한 해 전에 설립된 프랑스어권의 로잔공대(EPFL) 두 군데뿐이다. 1900년대에 학제 개편을 통해 대학으로 승격되었으며, 1911 년 정식으로 이름을 연방 기술전문학교 polytechnische Schule에서 연방고등공업학교에 해당하는 Eidgenössische Technische Hochschule 으로 바꿨다. 학제는 원래 3 년제로 시작하였다가 1882 년 7 학기제로 확장되었고 다시 1904 년에는 학위 논문 과정이 정규 학기 7 학기와 별도로 규정되었다. 1909 년부터는 박사학위틀 부여하기 시작했으니, 1910 년대에는 동아시아적 관념으로 보는 이름과는 달리 이미 명성을 날리는 정규 대학교의 지위에 있었다고 할수 있다. 아니 사실 펠러가 재학 중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기간에 동문 졸업생 아인슈타인이 이곳의 물리학과에서 교수로 물리학 세미나를 이끌며 해석역학과 열역학을 가르치고 있었을 정도였다.


펠러는 그럼 언제 입학을 하였을까? 현재로는 학적부를 검색하지 못해 확정을 할 수는 없다. 다만 추정을 해보자면 오스트리아는 프러시아 교육제도를 도입하여 의무 초등교육을 실시하였고 취리히 고등공업학교에 가려면 다시 대학 진학을 위한 중등학교 또는 김나지움을 나와야 했었다. 1914 년에 휴학을 하였다니 이전에 입학하였을 테고, 1892 년 생이면 5-6 세에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대략 12 년의 초등 및 중등학교·김나지움을 마치면 1910 년을 전후로 입학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1910 년 가을 입학이었다면 1913 년이면 정규학기를 마치고 마지막 학위논문을 준비했을 것인데 그럼 1914 년에 휴학을 했다는 것이 안맞으니 대략 1911 년 가을 혹은 1912 년 가을에 입학을 하고 졸업을 거의 앞둔 시점에 1914 년 가을 발발한 세계대전에 징집된 것으로 본다면 합리적일 것 같다. 그렇다면 나카무라가 전하듯이 '졸업'을 했다고 해도 거의 무방할 것 같다. 실은 이후 미국에서 본인이 제출한 인구조사 센서스 기록에는 그가 4년제 대학을 마쳤다고 기록되어있다. 물론 이 추정은 학적부를 찾아볼 수 있다면 한번에 해결될 문제이긴 하지만.


이 학교의 건축학과 교육은 처음 설립 당시 6개 부문 중 하나인 바우술레 Bauschule 즉 조가(造家)학교로 시작되었다. 초창기 학풍을 이끈 것은 초대 학장으로 임명된 고트프리트 젬퍼 Gottfried Semper라는 건축가로 프랑스식 보자르를 추구하는 아틀리에 리브르를 목표로 삼았다고 한다. 원래의 플리테크닉 즉 기술전문학교의 실용적 기능적 성향과 이 조가학교의 운용이 삐걱되기는 했지만 고트프리트 젬퍼가 설계하고 지휘한 현재 취리히 공과대학의 엄청난 학교 건물은 유럽 학교 건물의 표준이 되다시피 했다고 한다. 1881 년 프리드리히 블룬칠리 Friedrich Bluntschli가 새 교장으로 임명되었지만, 고프트리트 젬퍼의 충실한 계승자로 학교의 방향을 더욱 고전 르네상스풍으로 잡게 된다. 이후 1899년 조가(造家)학교 Bauschule 를 건축학교 Architektenschule 로 개칭한 후에도 한참 지난 1915년 신임 교수로 카를 모저 Karl Moser가 부임한 다음에서야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근대 모더니즘 건축이 커리큘럼에 도입되고 기존의 고전적 건축 함께 다뤄지기 시작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펠러는 1914년 학교를 떠났다고 하니 시기적으로 학교 정규 교육에서 시세션이나 유겐트슈틸, 바우하우스같은 우리가 생각하는 19세기말 20세기 초반의 모더니즘 건축의 세례를 받았다고 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이때까지는 비엔나를 중심으로 전개된 근대적 예술사조,특히 시세션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는 접점이 없다. 현재로서는 오히려 동시기 극동의 이훈우처럼 고전 건축에 치중한 교육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1914년 7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계 제1차대전의 동맹국으로 전쟁이 시작되었고, 우리가 현재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가 학교를 휴학하고 전쟁에 나갔다는 것이다. 그리고, 3년이 지난 1917년 즈음 안톤 마르틴 펠러는 지구 반대쪽 조선의 경성에 모습을 드러낸다. 다음 편에서 취리히에서 휴학한 펠러가 경성까지 와서 건축가로서의 경력을 시작하게 된 이야기를 이어나가겠다.


 표지사진: 아마도 안톤 마르틴 펠러가 학교를 다니던 시기의 취리히 연방 고등공업학교 (연방공대)의 모습. 앞의 작은 부속 건물은 헐려서 1919년 증축 및 돔 건물이 세워졌다.
취리히 공과대학의 역사: ETH history - MacTutor History of Mathematics (st-andrews.ac.uk)
취리히 공과대학 건축학과의 역사:  Geschichte des Architekturunterrichts an der ETH Zürich – Departement Architektur | ETH Zürich 

추가 지도와 여행 여정 부분 이미지의 출전: 営業経歴 (trc.co.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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