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과 만주에서의 건축 경력의 시작에서 일본으로 가기까지
*이 글은 안톤 마르틴 펠러를 찾아서 (III) (brunch.co.kr)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참고하십시오. 본격 안톤 마르틴 펠러의 건축가 경력을 들여다 보기로 하겠습니다. 참. 그리고 앞의 글들에서 제가 잘못 기록한 부분이 있어서 일부 수정을 하였습니다. 참고해서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917년 혹은 1919년에는 안톤 마르틴 펠러는 조선의 경성에 자리를 잡고 기독교계의 소개를 받아 나카무라 요시헤이의 나카무라 건축사무소에서 건축일을 시작한다. 현재 전해지는 그의 건축가로서의 경력은 몇가지 그가 설계에 참여 혹은 전담하였다고 기록이 전해지는 건물들을 통해 볼 수 있다.
나카무라 요시헤이의 고향 하마마쓰(浜松)에서 있었던 1989년 나카무라요시헤이전 中村與資平展의 자료집 중에서 실행위원회 実行委員会에서 발간한 나카무라 요시헤이 연표 中村與資平年表에 나오는 그의 기록을 먼저 보면 그의 이름은 1917년에 등장하는 것은 이미 저번 편의 글에서 언급했지만, 이게 어느 건물의 건축에 관여했는지가 약간 불분명하다. 다만 다른 항목의 패턴을 적용하면 대전의 한성은행 漢城銀行 대전지점의 설계에 관여한 것으로 추정된다.1
1917년에는 나카무라 건축사무소가 만주 다롄에 출장소를 만들고 본격 진출을 시도했을 때 그는 만주로 파견을 나가 특이하게도 "구조 공학사 構造工學士"라는 직함을 명함에 걸고 일을 한다. 2
1920년에는 랴오닝성의 카이위안시의 카이위안 공회당 開原公会堂의 설계를 담당한다.
그 다음은 1922년 준공된 조선은행 군산지점의 설계 담당으로 기록이 남아있다. 조선은행 朝鮮銀行 군산지점은 문화재청에서 2009년 실시한 조선은행 군산지점의 기록화 조사 보고서에 상세하게 자료가 정리되어있다. 상당수의 연구들에서 나카무라 요시헤이의 건축에서 당시 독일·오스트리아의 유겐트슈틸 Jugendstil 혹은 시세션 Secession 의 영향이 이때 등장했다고들 평가하고 이를 설계를 담당한 안톤 마르틴 펠러의 영향으로 평가하고 있다. 3
니시자와 야스히코는 나카무라 요시헤이의 경성 시대 건축 경향을 조선은행 다롄지점(1920)같은 서양고전양식, 다이이치은행 경성지점(1920)같은 다쓰노 긴고의 양식을 의미하는 다쓰노식 辰野式, 그리고, 천도교 중앙대교당같은 시세션 양식의 세가지 양식으로 나누는데, 마지막 시세션 양식의 건물로 카이위안 공회당(1920), 천도교 대교당(1921), 조선은행 군산지점(1922)과 대구지점(1922)을 들면서 이 모두가 안톤 마르틴 펠러가 설계를 담당하였다고 하면서 펠러가 조선반도에 시세션 양식을 도입했다고 해도 될거라고 평가하고 있다. "それだけでなくフェラーによって朝鮮半島にゼツェッシオン様式が持ち込まれたと言うことができる"4
위의 두 양식과 니시자와가 "시세션 양식"으로 분류하고 모두 "펠러가 설계를 담당했다"고 한 나머지 건물들의 사진을 비교하여 보자. 천도교 대교당이나 위에서 소개한 카이위안 공회당이나 조선은행 군산지점은 이미 알려져 있지만 니시자와는 조선은행 대구지점도 그의 설계로 소개하고 있다. 확실히 같은 시기의 다른 두 양식보다 군산지점의 양식이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조선은행 대구지점의 경우 실제 준공 연도는 필러가 조선에 더 이상 있지않았던 시기라서 그동안 주목을 받지못한 것 같은데, 그 보다 이 건물은 1929년 12월 18일 독립운동가 장진홍이 폭탄을 터트려서 더 유명한 곳이다. 이 폭탄으로 건물 일부와 유리창 70여장이 파손되었다고 보도되고 있다.
니시자와는 사실상 나카무라 요시헤이의 만주 진출은 실패로 끝났다고 평하고 있다. 당시 만주 지역의 건축은 남만주철도주식회사의 영향력 아래 장악되어있어서 나카무라같은 독립건축가의 자리가 사실상 없었다는 것이다.5 이 시기에 하필 1920년 12월 조선 경성사무소가 전소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니시자와는 나카무라 사무소의 전 직원과의 인터뷰를 통해 나카무라가 펠러를 사무실에 입주하여 살도록 했다고 하고,6 또한 이 화재 사고가 펠러의 실화로 인해 발생하였다고 하고 있다.7 이에 대해서는 좀더 상세한 자료가 있지않으면 조금 이해가 어려운 상황이긴 하다. 사실 1920년 한해 준공한 건물이 9개 건물, 이후 22년까지 10개가 더 완공이 되었던 시기이고 이 중의 상당 부분이 펠러가 설계를 맡은 건물들이며, 게다가 나카무라는 1921년 3월 25일 펠러를 동반하여 미국과 유럽으로 여행을 떠나 1922년 2월에 일본에 돌아온 다음 경성과 만주 사무소를 철수하고 4월에 도쿄에서 나카무라 공무소를 개설한다. 펠러는 이 기간 동안 나카무라를 수행하여 구미일대를 같이 여행하고 도쿄의 나카무라 사무소에 합류한다. 사실 구미 여행 이전에도 나카무라는 '자전' 自伝에서 펄러와 동행하여 조선, 만주뿐 아니라 교토, 오사카, 나고야, 도쿄 등의 각지와 자신의 고향에도 함께 여행을 하였고 그러면서 펠러를 동행하여 구미지역을 여행할 계획을 세웠다고 밝히고 있다. 오히려 '자전'에는 화재 사건에 대한 언급이 없다.
1922년 4월 나카무라 공무소의 일원으로 도쿄로 옮긴 펠러는 여기서 다시 중요한 전환을 한다. 나카무라의 '자전'에서 해당 부분을 인용해보자: "東京でも最初はアントンフエ氏を雇っていたが、月給600円で、余り高値なので、氏の望に任せて、レーモンド建築会社に入社されることにした。"(도쿄에도 처음에는 안톤 펠러를 고용하였지만, 월급 600엔이 너무 높아서 그가 원하는 대로 레이먼드 건축회사에 입사하도록 했다) 안톤 펠러가 남긴 이야기가 없으니 더 이상은 알 수 없지만 여기서 펠러는 이제 미국으로 진출을 하는 계기가 된다.8
"레이먼드 건축회사"라고 한 곳은 지금도 존재하는 건축회사로(株式会社レーモンド設計事務所 (raymondsekkei.co.jp)) 일본 건축에 영향을 크게 미친 것으로 평가되는 안토닌 레이먼드 Antonin Raymond (1888-1976)가 세운 회사이다. 안토닌 레이먼드는 오스트리아 제국 내 지금의 체코공화국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태어나 프라하의 고등공업학교(Vysoká Škola Technická = 직역하면 고등+학교+기술인데 영어로 일반적으로 polytechnic school로 옮겨진다. 현재의 프라하 체코 공과대학의 전신)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와 건축 경력을 쌓은 후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와 함께 1919년 데이코쿠 호텔의 건축을 위해 일본에 온 다음,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데이코쿠 호텔 건설을 위한 일본 사무소를 맡아 있다가 1920년에 그와 결별하고 1921년 the American Architectural and Engineering Company 혹은 米国建築合資会社를 리온 휘태커 슬랙 Leon Whittaker Slack과 함께 설립한다. 그리고 이듬해 펠러는 여기에 합류하게 된다.
레이먼드 건축회사에서 이후 미국으로 옮겨간 여정은 다음 편에서 계속 이어나가도록 하자.
註:
* 건물 사진 출처: 営業経歴 (trc.co.jp)
* 카이위안공회당 개당식 축사 장면의 출전: 旧満州 開原公会堂開堂式と余興 計2枚(絵葉書)
* 조선일보 1929년 12월 28일자 신문: 네이버 신문 아카이브
1. 中村與資平年表 출전: 浜松が生んだ名建築家中村與資平展 (trc.co.jp)
2. "海を渡った日本人建築家-20世紀前半の中国東北地方に おける建築活動", 西澤泰彦 , 彰国社, 1996
3. 예를 들어 "韓国における中村與資平の建築”、土屋和男、常葉大学造形学部 紀要 第19号、2121。
4. "建築家中村與資平の経歴と建築活動について", 西澤泰彦, 1993, 日本建築学会計画系論文報告集 第450号
5. 西澤泰彦, op. cit. 1996
6. 西澤泰彦, op. cit. 1993
7. 西澤泰彦, op. cit. 1996
8. 나카무라 요시헤이의 "자전" 출전: 浜松が生んだ名建築家中村與資平展 (trc.co.j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