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바조와 요한 리스의 "참수 씬" in 런던 내셔널 갤러리
보티첼리, 루벤스, 페르메이르, 터너, 등의 "꼭 봐야 할 작품들"이 차고 넘치는 런던 내셔널 갤러리. 르네상스부터 인상주의까지 들려야 할 많은 방들 중 여기, 32번 방은 모네나 고흐만큼 누군가의 "최애"는 아닐지라도 흥미로운 작품들이 많이 걸려있는 곳이다. 바로 이탈리아 바로크 관으로 내셔널 갤러리에서 가장 규모가 큰 관이기도 하다.
짙은 분홍색 벽에 나란히 걸린 두 작품은 크지 않은 크기에도 불구하고 섬뜩한 주제와 생생한 묘사로 관람객의 지친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도파민을 자극한다.
쟁반으로 받쳐진 한 남자의 머리
목이 잘린 채 뒤틀린 남자의 몸
이 둘은 무슨 이유로 이토록 잔인한 죽음을 맞이한 걸까?
왼쪽 그림은 그 이름도 유명한 카라바조의 작품.
Salome receives the Head of John the Baptist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받는 살로메) 다.
*참고로 현재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카라바조 전시가 진행 중이다.
이야기의 내용은 대략 이렇다.
세례자 요한(잘린 머리의 주인공)은 헤롯 왕이 자기 동생을 죽이고 동생의 아내인 헤로디아와 결혼하는 것을 비판했다가 감옥에 갇혔다. 헤롯 왕의 생일잔치 때 헤로디아가 딸 살로메에게 춤을 시켜 헤롯 왕을 감동시키고, 그 대가로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요구했고, 그로 인해 세례자 요한은 목이 잘리며 죽음을 맞게 된다.
*세례자 요한은 사도 요한과 다른 인물이다. 세례자 요한은 John the Baptist라 부르며 예수보다 먼저 활동하며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증언하는, 구약에서의 마지막 예언자로 등장한다. 사도 요한은 예수의 열두 제자로 요한복음의 저자인 John the Apostle을 말한다.
요한 리스(Johann Liss)의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디트(Judith in the Tent of Holofernes)는 구약성경 제2의 경전 즉, 외전인 유딧기에 나오는 이야기(역사에 기반한 소설이라 볼 수 있다)를 묘사한다.
유디트는 베툴리아의 신앙심 깊고 아름다운 과부였다. 홀로페르네스는 아시리아의 장군으로 군대를 이끌고 베툴리아를 포위한다. 함락하기 직전 유디트는 거짓으로 항복하고 홀로페르네스의 환심을 사 연회에 참여한다. 그가 만취한 틈을 타 시녀와 함께 그의 침대로 가 홀로페르네스의 칼로 그의 목을 벤 뒤 곡식자루에 잘린 머리를 넣어 가지고 나온다. 이렇게 유디트는 나라를 구한 영웅이 된다.
살로메와 유디트 이야기는 오랫동안 많은 화가들에게 사랑받아 온 주제인데, 이렇게 나란히 놓고 감상할 수 있는 경우는 흔치 않다. 내셔널 갤러리는 두 작품의 같이 걸어놓고 재밌는 비교를 유도한다.
그렇다면 이 두 점의 "참수 씬"은 어떻게 비슷하고 어떻게 다를까?
요한의 머리를 베어달라 부탁한 살로메는 막상 요한의 머리로부터 시선을 피하고 있다. 왜일까? 보기 거북해서? 혹은 두려워서? 그녀의 표정은 자랑스러워 보이지도, 두려워 보이지도 않으며, 감정을 내비치지 않는다.
붉게 상기된 사형수의 얼굴은 격렬했던 참수의 과정을 암시하면서도, 그의 표정은 역시 수수께끼 같다.
살로메 옆 노인만이 손을 모으고, 잘린 요한의 머리를 뚫어져라 보고 있다.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요한을 추모하는 걸까? 요한이 예언했듯 그리스도의 등장을 그녀만이 꿰뚫어 보는 걸까?
카라바조의 그림에서 노인은 종종 혜안과 지혜를 가진 인물로 표현되기도 한다. 하지만 젊고 아름다운 여성과 함께 있을 때, 아름다움은 곧 추해질 것이며 순수함 뒤에 가려진 악함을 표현하기도 한다. 이 그림에선 전자일까 후자일까 혹은 둘 다 일까?
요한 리스의 그림은 유디트가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잘라 주머니에 골인하기 직전의 순간을 묘사한다. 머리를 들고 있는 그녀의 팔 뒤로 곡식자루를 들고 있는 하녀의 얼굴이 언뜻 보인다. 유디트의 볼은 역시 붉게 닳아 올랐고, 그녀의 피부는 땀으로 빛나며, 곱실거리는 머리카락이 터번 아래로 흘러내려 치열한 순간을 보여준다. 그녀의 옷도 흘러내려 어깨와 등의 3분의 1을 드러내고, 맑은 피부 위로 드러난 근육은 이러한 행위를 수행할 수 있는 신체적 능력을 증명한다. 그림자 진 홀로페르네스의 상체는 화면 아래로 곧 떨어질 것 같고, 잘린 목에서 터져 나오는 피는 그의 오른쪽 팔을 흥건히 적시고 있다.
리스의 그림에서 홀로페르네스와 유디트의 몸, 하녀와 홀로페르네스의 잘린 머리는 고리처럼 연결되어 있다.
특히 홀로페르네스 몸과 유디트의 옷은 완전히 엉켜있어 누구의 몸이 어디서 끝나는지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 둘은 대각선으로 거울처럼 대칭을 이루고 있고, 엉킨 몸은 크게 타원형을 그린다.
흘러내리는 옷, 떨어질 듯 말 듯 한 홀로페르네스의 몸, 흐르는 피, 이 모든 것들이 움직임을 만들어낸다.
반면, 카라바조의 그림은 인물들끼리 물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분리되어 있는 것 같다. 살로메와 사형수의 포즈는 평행을 이루고(평행선은 영원히 만나지 않는다), 노파의 얼굴은 어둠 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와 마치 저승에서 온 귀신같다. 한마디로 이들 모두가 같은 공간에 있긴 하지만 다른 시공간에 속한 것처럼 이상할 정도로 분리된 느낌이다.
이는 일정 부분 카라바조의 작업 특성에서 기인한 것일 수 있다. 카라바조는 모델 각각을 따로 그린 뒤 한 면에 옮겨 그리는 방식으로 작업했다. 그의 또 다른 그림 The Musicians에서도 어린 연주자들이 한 폭에 그려져 있지만 서로 별로 안 친한 것 같기도, 서로 관심이 없는 것 같기도 하다. 즉 인물들 사이의 정서적 연결이 약한데, 전체적으로 어색한 느낌이 드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또 다른 이유는, 서사를 이해할 때 필수적인 배경이 삭제되었기 때문이다. 인물들은 온통 검은 바탕에 상반신만으로 캔버스를 꽉 채우고 있다.
사실 카라바조는 같은 이야기로 그림을 세 점이나 남겼다 (폭력을 일삼고 살인까지 저지른, 난폭하기로 알려진 그는 역시 이런 폭력적인 이야기에 끌렸던 걸까?). 몰타에 있는 1607년의 버전과 마드리드에 있는 1608년 버전. 이 두 그림과 함께 보면 배경과 구도의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다.
마드리드 버전은 런던 버전과 같이 완전히 연극적이다 - 연극적이라 하면, 인물들이 실제 인물이 아닌 연기를 하는 배우 같고, 배경도 실제 장소가 아닌 무대나 스튜디오 같다는 것. 인물들은 관객 앞에서 포즈를 취하는 듯 부자연스럽고, 특히 오른쪽의 사형수는 스포트라이트 아래서 잔근육의 몸매를 뽐내고 있다.
이 그림은 몰타의 성 요한 공동 대성당에 소장된 그림이다. 앞선 작품과 비교하면 차이점이 확연하다.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한다면 이처럼 그럴듯한 배경을 그려 넣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야기는 단순하다. 장소는 감옥이고, 방금 한 남자의 목이 잘렸다. 위의 두 그림보다 훨씬 덜 미스터리하다. 다만 높이가 370센티로, 캔버스 반절을 차지하는 인물이 실제 사람크기 정도라 앞에 서면 그 크기에 먼저 압도될 것이다.
이 그림과 비교했을 때, 앞의 그림은 인물의 상체까지만 크롭 해서 혹은 클로즈업해서 그렸기 때문에 이야기의 진행보다 인물들의 감정상태와 심리에 집중하게 된다. 관객들은 이 그림보다 앞의 두 그림 속 인물들과 물리적으로, 심리적으로 가까워진다.
마찬가지로 리스의 그림에서도 디테일한 배경이 삭제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상상력은 오히려 자극된다. 인물들이 특정한 시대적 배경에서 동떨어져 21세기를 사는 우리들과 시간적 공간적으로 더 가까이 연결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주인공 살로메와 유디트와 연결될까?
우선 리스의 그림 속 유디트는 우리와 눈을 마주친다. 아니, 우리를 보고 있는 걸까? 아니면 우리 너머의 무언가를 보고 있는 걸까? 우리는 그녀와 한 공간에 있는 동조자일까? 아님 침입자일까? 이러한 질문이 그림 속 인물들과 우리 사이의 거리를 지정한다. 그림 속 인물들은 이런 식으로 우리와 관계를 맺고, 또 그들 세계의 경계를 표시한다.
화가는 성경이나 신화의 이야기 중 어떤 장면을 캡처해 정지된 이미지로 그려낼지 선택한다. 그리고 요한 리스는 이러한 장면 선택에도 탁월했다. 왜냐하면 그의 유디트는...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밟고 선 조르조네의 유디트처럼 이미 목을 자르고 난 뒤 한숨 돌리는 것도 아니고,
젠틸레스키의 유디트처럼 목 베기에 한창이라 완전히 몰입한 것도 아닌, 그 사이 어딘가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후자처럼 역동적이지만 뒤를 돌아볼 몇 초의 순간이 있었기에, 우리와 관계 맺기, 소통이 가능한 것이다.
반면, 살로메는 요한의 머리와 관람자 모두로부터 시선을 피하고 있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곧 그림의 액자에 부딪히기 때문이다. 피할 수 없는 운명, 책임져야 할 결과를 암시하는 듯하다.
자연스럽게 인물의 시선을 따라가게 되는 관객은 그녀와 같은 갑갑함을 느낀다.
그림에 몰입하는 동안 그들과 함께였다가, 액자 밖에 존재하는 우리는 머지않아 우리가 속한 곳 = 작품이 걸려 있는 내셔널 갤러리, 런던, 현실 세계를 인지하고는 우리의 세계로 돌아오게 된다.
전반적으로 카라바조의 그림은 정적이고, 요한 리스의 그림은 동적이다. 전자는 참수가 끝난 후를, 후자는 진행 중인 상황을 그리기 때문이다. 여기에 또 하나의 paid actor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들이 흘리고 있는 피다.
세례자 요한의 머리에서 떨어지는 피는 쟁반에 고인다. 그마저도 양이 많지 않은 것으로 보아 시간이 꽤 흐른 것 같다. 남아있는 피가 한 방울씩 천천히 뚝 뚝 떨어지는 모습이 상상된다.
반면에 홀로페르네스의 잘린 목은 정면을 향해 있어 단면이 적나라하게 보인다. 왼쪽 그림에서 요한의 머리가 주인공이라면 오른쪽 그림에선 "머리 없는" 홀로페르네스가 주인공인 셈. 피가 기둥을 만들며 뿜어져 나오는 모습은 그림을 더 역동적으로 만들며 피가 캔버스 위로 흐를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카라바조 그림은 시각적으로 정적인 느낌을 줌과 동시에 청각적으로 고요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네 명의 인물 중 유일하게 요한의 입만 벌어져 있다는 것인데, 이는 섬뜩함을 더한다. 왜냐하면 그만이 유일하게 말을 할 수 없는,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미 죽었기 때문에). 이는 어딘가 억압적인 분위기를 더 강조한다. 비명이 들릴 것 같은 착각, 그리고 소리가 들려야 할 것 같은데 들리지 않는 상황은 마치 공포영화처럼 으스스하고 극적인 효과를 만든다.
그림 속 에너지를 일관되게 이끌어나가는 디테일도 여럿 있는데, 그중 하나는 칼을 쥐고 있는 손.
카라바조 그림의 사형수는 이미 임무를 마쳤기에 칼 위에 손을 가볍게 얹고 있다.
반면에 유디트는 지금 막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었기 때문에 칼을 힘 있게 쥐고 있고, 그로 인해 긴장감이 전달된다.
잠깐 미술사를 들여다보면, 이전까지 이탈리아 또는 유럽에서는 그림을 주로 성당에서 감상할 수 있었다. 그러다 17세기 초, 개인 컬렉터들이 생기기 시작하고 "갤러리아(Galleria)"라고 부르는 개인 컬렉션을 위해 "갤러리아 그림(Galleria painting)"들을 화가에게 따로 의뢰해 제작했다.
갤러리아 페인팅의 특징은 중간 사이즈 정도에, 액자화되고, 이동가능하다는 점이었다. 대체로 대형 사이즈에 성당 안 제단, 천장, 복도 벽 등에 붙박이로 그려지는 성화와 다른 이 그림들은 종교와 관련된 주제를 그리긴 하지만 꼭 종교적 목적을 가지진 않았으며, 구도나 해석에 있어서도 참신하다는 특징이 있다.
카라바조와 요한 리스의 그림은 전통적이지 않은 포맷을 취하고, 재현의 방식도 실험적이며, 종교와 관련된 주제이지만 교조적인 메시지가 없다는 점에서 이 "갤러리아 페인팅"의 전형이라 볼 수 있다.
카라바조는 대상의 움직임을 최소화하고, 인물들 사이의 연결을 제한하고, 화면을 인물의 상체로 꽉 채우고, 서사적인 배경을 없앴다. 요한 리스는 모든 장치를 동원해 움직임을 표현하고, 인물과 관람객 간의 직접적인 아이 컨택을 유도했다. 이처럼 비슷한 소재의 두 작품은 완전히 다른 효과를 가져왔지만 둘 다 관객들에게 깊은 몰입감을 선사하며, 몰입하면 할수록 소름 돋는 그림으로 완성됐다.
17세기의 "갤러리아" 방문객들과 현재 내셔널 갤러리 관람객들에게 시공간을 초월하는 경험을 제공함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백문이 불여일견. 기회가 된다면 잊지 말고 32번 방의 이 두 그림을 직접 보길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