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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후자르의 사진, 공감과 연민의 시선으로

런던에서 열린 뉴욕의 사진작가 피터 후자르 전시 리뷰

by 이서정 Mar 24.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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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후자르, "Orgasmic Man", 1969, pigmented ink print, image, © The Peter Hujar Archive피터 후자르, "Orgasmic Man", 1969, pigmented ink print, image, © The Peter Hujar Archive

한야 야나기하라의 베스트셀러 소설 "리틀 라이프"의 표지로 유명해진 이 사진은 미국의 사진작가 피터 후자르(1934-1987)가 찍은 "Orgasmic Man"(1969)이라는 작품이다. 정직한 시선으로 강렬하고도 감성적인 사진을 남긴 피터 후자르의 전시 <Peter Hujar: Eyes Open in the Dark>가 런던의 레번 로우(Raven Row)에서 열리고 있다.


레번 로우는 비영리 전시 공간으로, 주로 외부의 스페셜리스트 큐레이터들이 전시를 기획하지만 이번 전시는 디렉터 알렉스 세인즈버리와 함께 피터 후자르의 전기 작가인 존 더글러스 밀러(John Douglas Millar)와 후자르의 친구이자 사진작가, 전문 사진 인쇄사인 게리 슈나이더(Gary Schneider)가 맡았다.


피터 후자르는 여러 이유로 한국인에겐 생소한 이름일 수 있다. 그는 미국인이고, 19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짧은 기간 동안 활동했으며, 동성애자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자르의 사진전을 보기 위한 사람들로 토요일 오후의 전시장은 매우 붐볐다. 근처에 위치한 명망 있는 화이트채플 갤러리(Whitechapel Gallery)에 들렸다가 도착한 이곳엔 더 많은 수의 관람객이 전시장을 채웠고, 두세 명씩 함께 온 사람들끼리 작품 앞에서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모노톤의 사진들이 주는 엄숙한 분위기에 생기를 더한 건 관람객들의 대화소리였다. 후자르의 사진이 보는 이에게 말을 걸고 있음을 들어가자마자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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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번 로우는 런던 브릭레인 근처 스피탈필즈에 위치한 18세기 로코코 양식의 주택에 두 개의 현대적인 갤러리가 증축된, 건축적으로 독특한 공간이다. 무엇보다 대규모 화이트큐브 전시장에선 경험하기 어려운 작품과의 가까운 거리 덕에 후자르 작품을 감상하기에 특히 걸맞은 곳이었다. 후자르는 주변인들의 초상 사진을 많이 남겼고, 이번 전시에서도 인물 사진이 주를 이루는데, 관람객으로서 사진 속 인물들과 친밀감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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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뉴저지에서 태어난 피터 후자르는 우크라이나 이민자 조부모 밑에서 자랐고 11살 때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어머니가 후자르를 뉴욕 맨해튼으로 데리고 갔다. 어머니와 새아버지와 함께 원룸에서 생활하는 것조차 버거웠지만 더한 것은 둘 다 알콜 중독자였다. 그렇게 학대에 가까운 환경으로부터 16살 어린 나이에 독립하게 된다.


후자르는 1950년 맨해튼의 인더스트리얼 아트 스쿨에 등록해 본격적으로 사진을 배웠고 영문학 선생님이었던 데이지 알든(Daisy Aldan)의 권유로 사진 기술을 배우기 위해 상업 사진 스튜디오에서 일하게 된다. 이때 조셉 라파엘(Joseph Raffaele), 폴 텍(Paul Thek)과 같은 후자르의 인생에서 중요한 인물들을 만나는데, 특히 폴 텍과는 각별한 관계로 발전한다.


이번 전시에서 둘 사이의 관계를 보여주듯 폴 텍의 사진 한 점이 후자르의 자화상 두 점과 나란히 걸려 있었다. 다른 방에는 두 사람이 이탈리아 시실리와 로마를 오고 가며 함께 살 때 폴 텍이 그린 후자르의 유화 초상화도 전시되어 있었다. 후자르가 죽을 때까지 이스트 빌리지 아파트에 가지고 있었던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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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 후자르의 자화상 두 점과 함께 걸려있는 폴 텍의 초상. (오) 폴 텍, "Portrait of Hujar", 1963-64, 캔버스에 유채


후자르의 인물 초상 앞에 서서 사진이 찍힌 찰나의 순간과 그 순간을 위해 쌓인 이야기들을 상상해 본다. 후자르 사진의 힘은 사진 속 인물들과의 내면의 대화를 이끌어낸다는 것에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눈을 마주치며 이들 눈이 담고 있는 사연에 주목하게 된다. 사진 한 장 앞에 오랜 시간 서 있게 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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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전 손택, 프랜 레보위츠 등 지금도 아이코닉한 인물들의 얼굴도 알아볼 수 있었다. 1960년대 뉴욕에서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둔 후자르는 앤디 워홀, 수전 손택 등과 교류하고 뉴욕 예술계의 중심인물이 된다. 전시장을 채운 이들의 사진들은 마치 70-80년대 뉴욕 다운타운의 커뮤니티가 재현된 풍경 같았다. 후자르의 사진들을 온라인이 아닌 전시장에서 봐야만 하는 가장 큰 이유였다. 이곳에선 이들이 함께이기 때문에.

피터 후자르, "Susan Sontag", 1975피터 후자르, "Susan Sontag", 1975

1960년대는 미국인, 특히 뉴욕 주민이라면 미국 문화의 정치적, 사회적 변동에 무심하지 않을 수 없는 시기였다. 후자르도 정치에 관심 있는 성향은 아니었지만 게이 리버레이션 프런트(Gay Liberation Front)의 포스터 사진을 찍어주기도 하는 등 활동에 참여한다. 해당 포스터도 레번 로우의 계단 벽에 걸려 있었다.


1970년대에는 성소수자 인권 운동과 함께 미술계에서 사진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후자르는 당시 성(性)에 대한 여러 변화들을 사진에 담는다. 그러면서 상업 사진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고 재정적으로 힘들어지지만 그의 주요 작품들이 이 시기에 탄생한다. 앤디워홀의 뮤즈이자 트랜스젠더 배우인 캔디 달링의 사진 "Candy Darling on her Deathbed"(1973)는 지금까지도 상징적인 사진으로 남아있고, 평론가 아서 단토는 20세기 가장 위대한 사진 중 하나라고 평가했다.

후자르, "Candy Darling on her Deathbed", 1973, © Peter Hujar Archive후자르, "Candy Darling on her Deathbed", 1973, © Peter Hujar Arch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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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자르의 카메라는 인물, 동물, 건축, 풍경 등 다양한 대상을 향했고, 그의 모든 사진을 관통하는 미학이 있다. 동물 사진에서조차 심리적인 교감을 이끌어내는 그의 사진에서 공감과 연민이라는 후자르의 타고난 성향이 드러난다. 후자르가 찍은 첫 사진은 11살 때 어머니에게서 빌린 35mm 카메라로 담은 정원과 동물들의 모습인데, 후자르의 친구가 기억하는 바로는 후자르가 자신이 찍은 동물들과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의 일화에서도 드러나듯 그의 시선에 든 대상이 인간이든 동물이든 무생물이든 소통과 교감이 바탕이 된다. 그로써 관람객과 작품 속 대상과도 그만큼의 깊이의 소통이 가능해진다.


그의 작품 중 가장 잘 알려진 "Portraits in Life and Death"(1976) 시리즈의 완성 이후 재정적 어려움, 예술계 내에서 여전히 약한 인지도, 친구이자 안무가인 제임스 워링(James Waring)의 죽음이 겹치며 후자르는 우울증을 겪는다. 이 시기에 의뢰를 받아 뉴욕의 강을 찍은 사진 여덟 점을 제작하는데, 네 점은 허드슨 강을, 다른 네 점은 이스트 강을 담았다. 이 흑백의 물결 이미지들은 감정의 동요를 일으키는 시적이고 멜랑콜리한 추상화 같다.

피터 후자르, "East River (IV)"와 "Hudson River (II)"피터 후자르, "East River (IV)"와 "Hudson River (II)"


제일 위층 방에는 1976년 부활절 하루 동안 뉴욕을 돌아다니며 찍은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하루동안 거닐며 웨스트사이드 피어의 퀴어 커뮤니티, 성 패트릭 성당, 6번 애비뉴의 건물들, 월드 트레이드 센터에서 바라본 뉴욕의 풍경들을 찍었다. 필름 롤에 있는 사진들을 썸네일 크기로 볼 수 있는 컨택 시트(contact sheet)도 전시되어 있어 B컷들을 확인할 수 있었던 점이 참 좋았는데, 이 하루동안의 작가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꾸밈없는 작가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컨택 시트에는 마음에 드는 사진들을 표시한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고, 선택된 사진들은 옆 전시장에 액자에 담겨 전시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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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 컨택 시트. (오) "New York: 6th Avenue (I)", 1976


1980년, 예술가이자 인권운동가 데이비드 워나로위츠와의 첫 만남 이후 둘은 죽을 때까지 서로에게 각별한 사이였다. 후자르는 스무 살 어린 워나로위츠가 스스로를 시각 예술가로 인지할 수 있게 해 준 스승이자 친구였고, 워나로위츠는 후자르를 우울증의 늪에서 꺼내준 은인이었다.


1981년 에이즈가 처음 기사화된 이후 '게이 암'이라고 불리며 많은 성소수자들에게 신체적 정신적 타격을 크게 입혔다. 1986년 2월 후자르 인생의 마지막 갤러리 전시는 워나로위츠의 도움으로 열리게 되고, 거의 정확히 1년 뒤 1987년 1월 후자르는 에이즈 판정을 받아 11월에 숨을 거두었다. 워나로위츠는 후자르의 죽음 직후 그의 신체를 23장의 사진으로 남겼고, 사진을 넣은 봉투에 이렇게 썼다: "피터의 사진 23장, 23쌍의 염색체, 1423호 방 (23 photos of Peter, 23 genes in a chromosome, Room 1423)". 레번 로우 전시장에선 이 중 세 점의 사진이 후자르가 찍은 워나로위츠의 사진과 함께 전시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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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 데이비드 워나로위츠, "Untitled (Peter Hujar)", 1987. (오) 피터 후자르, "David Wojnarowicz (II)", 1981.


후자르가 본 워나로위츠와 워나로위츠가 본 후자르, 후자르가 본 폴 텍과 텍이 본 후자르. 서로의 시선을 통해 본 서로의 모습은 애틋한 감정을 우리에게까지 전달한다. 그리고 그들 주위의 사람들과 그들이 활동했던 환경을 50여 년이 지난 지금 후자르의 시선을 빌려 우리가 바라보고 있다. 시공간을 넘어 존재와 존재를 이어주는 후자르의 사진이 그 어느 때보다 큰 울림을 준다.




*원문은 아트인사이트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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