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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갱이 Jul 30. 2023

도로 2

이탈리아 알프스 도로를 달린다는 것


렌터카를 빌리기 위해 베네치아 공항으로 향했다. 로마에서 이틀을 보내고 삼 일째 되던 날이었다. 로마에서 베네치아까지는 기차로 4시간 정도 걸렸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거리가 400km인데 로마에서 베네치아까지 550km 정도 된다 하니, 이탈리아는 생각보다 큰 나라다.


기차 안은 세계 각국에서 몰려온 관광객들로 가득했다. 파업이 잦다는데(바로 전날도, 그 다음다음날도 파업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럴 경우 이 많은 사람들은 낯선 나라에서 어떻게 하나 걱정되었다. 하지만 나처럼 현실로 닥치지 않은 일을 걱정하며 긴장한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 웃으며 카드게임을 하거나 수다를 떨었다. 혼자 온 배낭여행객은 책을 읽었다. 나와 남편, 학생 복숭아 우리 가족 셋만 각자 핸드폰에 얼굴을 묻고 말없이 조용했다.


오후 한 시가 좀 넘은 시각, 베네치아 메스트레 역에서 내려 버스로 갈아타고 공항으로 갔다. 렌터카 업체를 찾아가니 3시, 차를 받아서 출발한 시간은 4시. 무슨 이유인지 우리가 예약한 차가 아닌 포드 하이브리드카를 받았다. 끝없이 밀려오는 관광객들 사이에서 수난 시대를 경험하고 있음이 분명해 보이는 직원에게 왜 이렇게 늦게, 게다가 예약과 다른 차를 주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랬다가는 그 장황했던 사연을 너도 나도 짧은 영어로 주고받느라 한 번 더 속이 터져 서로에게 만두만 날리게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우리가 돈을 낸 차보다 업그레이드되었으니 1시간 대기는 참을만했다.


렌터카는 800km밖에 안 달린 새 차였다. 솔직히 서울의 내 자동차보다 좋았다. 지하주차장에서 노쇠한 몸을 뉜 채 오랜만에 쉬고 있을, 14년 된 나의 윌. 평소 윌이 듣는 데서는 차가 오래됐네 낡았네 같은 말은 절대 안 하지만, 새 차를 타고 보니 '오오, 차 좋다~'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묵직한 것이 안정감이 있고, 미끄러지듯 스르륵 나가는 것도 조용하고 편안한 느낌이지 않아? 우리 윌은 달달달 달구지 소리 내면서 덜컹거리는데 말이지, 아유 불쌍한 우리 윌, 돌아가면 잘해줘야지... 같은 수다를 떠는 남편과 내가 한심하다는 듯 뒷좌석의 복숭아는 말한다.


"나는 이 차보다 윌이 더 좋아. 윌이 훨씬 더 편해."


렌터카는 렌터카일 뿐 정 주지 말자고,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다. 그래도 앞으로 5일 동안 우리랑 잘 지내보자.


베니스 공항에서 최종 목적지인 돌로미티 셀바까지는 200km 정도 거리다. 우리 오늘, 부산에서 서울 찍고 평양 아니 신의주까지 달리는 격인가.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돌로미티가 이탈리아에 온 이유다.


돌로미티(dolomites)는 이탈리아의 북부 알프스 지역을 통칭한다. 워낙 지역이 넓기 때문에 편의상 동부와 서부로 나눠서 관광하는데, 동부는 코르티나 담페초(Cortina d'Ampezzo), 서부는 오르티세이(Urtijëi) 마을이 그 중심이 된다. 우리는 서부에서 동부로 이동하며 돌로미티를 여행하기로 계획했다. 그리고 오르티세이에서 차로 15분 거리에 위치한 작은 마을 셀바(Selva Val Gardena)에 숙소를 예약했다. 메인 도시 외각에 숙소를 잡는 이유는, 상대적으로 숙박비가 저렴해서지만, 무엇보다 조용하고 깨끗하기 때문이다. 많지 않은 경험에서 얻은 우리만의 여행 노하우랄까. 이번에 가게 된 셀바 역시 예상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연간 관광객 천만이 넘는 대도시인 로마와 베네치아를 뚫고 돌로미티 산골짜기까지 들어가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다. 말이 200km 거리이지, 쉬지 않고 차를 달리는데도 남은 거리가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우리는 출발 후 1시간 남짓 달렸을 때 왕복 8차선이었던 고속도로의 중앙선은 어느새 사라지고 도로는 좁아졌음을 깨달았다.


일방통행 길인가... 중얼거릴 때쯤 맞은편에서 트럭 한 대가 부아앙 달려와 남편은 급히 핸들을 오른쪽으로 꺾고 숨을 몰아쉬었다. 받지는 못했지만 왕만두가 열 개쯤 뱃속에 들어간 기분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보니 자동차 두 대가 간신히 지날 폭의 도로는 엄연한 왕복 차선이었고, 하얀색 중앙선은 군데군데 나타나거나 사라지거나 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내비게이션은 치밀한 곡선을 정성껏 그리기 시작했다.


셀바로 가는 찌지지지직 길



돌로미티에 머무는 5일 내내 찌지지직 길은 계속되었다.



한국 사람들처럼 이탈리아 사람들도 성격이 급하다던데, 그 성질의 결은 확연히 달랐다. 서울에서 속초로 갈 때 우리는 수십 개의 터널을 지난다. 한국 사람들은 최단 거리를 계산하여 그냥, 뚫는다. 이탈리아는 뚫지 않는다. 여기에서 어떤 정치적 기술적 문제를 논할 필요는 없다. 내 눈에 보이는 그 차이점만 언급한다. 이탈리아는 뚫지 않고, 넘는다. 하지만 급한 성격답게 너울너울 넘는 것이 아니라 찌지지지직 넘는다. 알프스는 최대 높이가 4000m에 육박하는 산맥이다. 셀바가 4000m에 위치한 마을은 아니지만 어쨌든 고도 1500m쯤 되는 산길을 자동차로 찌지지지직 올라가야 한다.


자동차 두 대가 간신히 지날 수 있는 도로에서 뻑하면 급커브로 인해 눈앞의 길은 사라지기 일쑤였고, 그러다 맞은편에서 대형 버스라도 달려오면 놀라 비상등을 켜고 갓길에 찰싹 달라붙어야 했는데, 도대체 왜 낭떠러지 추락 방지 난간은 중간중간 끊겨있는 거야.



1시간 넘게 이어졌던 커브길 


이런 길은 태백인가 강원도 어디 산에서 10여 분 운전해 본 경험이 전부라는 남편은 그래도 그곳과 비교가 안된다며 바싹 긴장했고, 나는 혹시라도 맞은편에서 코너링에 미끄러지는 기교를 부리는 오토바이라도 달려올까 넘어진 자전거라도 있을까 미리미리 고개를 빼고 전방을 주시하는데, 한 시간이 넘게 원심력에 시달리던 뒷좌석의 복숭아는 무섭네 어지럽네 꽥꽥거리다가 급기야 속이 안 좋다며 토할 것 같다고.


천천히 가자고 속도를 줄이니 뒤차가 바싹 달라붙었다. 나는 무시하고 우리 속도로 가자고 했는데, 핸들을 잡고 있는 남편은 그 압박을 견디지 못해 다시 낭떠러지 옆 갓길에 차를 붙였다. 우리가 비켜주자마자 뒤차는 부아앙 달려 눈 깜짝할 새 사라졌다. 이것이 바로 이탈리아 사람들의 운전 실력이라고 외치면서.


내 눈으로 직접 보고도 믿기지 않는 운전이었다. 

"저런 건 F1 같은 데서나 볼 수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지 최소한 그건 옆이 낭떠러지는 아니잖아!"

"괜히 페라리, 람보르기니가 나온 나라가 아니었네. 대단하다 대단해..."

어지간해서는 남들 보고 대단하다는 말을 안 하는 남편조차 혀를 내둘렀다.


거리는 50km 정도 남은 상황인데 왜 아직도 남은 시간은 한 시간인지, 이게 대체 시속 몇 킬로 기준으로 예상 시간이 계산된 건지, 이 찌지지지직하는 마의 구간은 대체 언제 끝나는지, 우리가 로마 노천카페에 앉아 커피와 크루아상으로 아침을 먹은 게 정말 오늘이었는지 왜 어제 같기만 한지, 그래도 오늘 중에는 도착할 수 있을 거야, 잠시 차를 세우고 심호흡을 하며 서로를 다독였다.


그래 쉬었다 가면 되지, 천천히 가도 돼, 괜찮아, 역시 산속이라 공기가 좋네.... 

엄마, 토할 거 같아...으앵... 

얘, 점심 제대로 안 먹어서 토해봤자 뭐 나올 것도 없어, 참고 그냥 가... 창문 열고 누우면 좀 나아.


결국 나는 비닐봉지를 들고 뒷좌석으로 넘어가 복숭아 옆에 앉았다가 뒷좌석 멀미력에 압도되어 잠이 들었다. 말은 안 했지만 속으로 잠자다 죽으면 무섭지도 않고 아프지도 않을 테니 다행이다,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이다. 사고를 당하면 혼자 공포심을 느낄 남편은 미안하지만 찰나일 테니 혼자 견디시오.


눈을 떠보니 반짝반짝, 셀바의 등불이 빛나는 것이 보였다.


오, 예스 예스 예스~ 웰컴!
베리 프레시 에어!잇츠 릴리 굿!
유 드링크 아우어 워터! 아이 올소 드링크! 잇츠 릴리 클린!

저녁 7시 반. 

독일어를 쓴다는, 인상 좋고 건강해 보이는 할머니가 격하게 환영해 주는 숙소에, 살아서 도착했다. 우리 셋은 동시에 싱크대에 달라붙어 릴리 클린하다는 물을 받아 정신없이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갖고 간 라면에 꼬마김치를 털어 넣고 끓였다. 얼큰한 국물에 밥도 말아 속을 풀었다. 배부르게 먹고 나니 정신이 든다. 어디 릴리 클린한 공기 좀 마셔볼까? 어슬렁거리며 밤산책까지 하니 종일 팽팽하게 곤두서있던 신경이 나른하게 풀렸다. 지친 몸과 마음을 위로하기에 셀바는 나무랄 데 없이 아늑하고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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