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경이냐 대화냐 그것이 문제로다
사쏘(Sasso)는 돌, 암석.
룽고(Lungo)는 아메리카노... 가 아니라, 긴(long).
사쏘 룽고는 긴 암석이라는 뜻을 가진 거대한 돌산이다. 사쏘 룽고에 가기 전 우리는 Hotel Chalet Gerard라는 카페 겸 호텔에서 커피를 마셨다. 샬레 제라드는 사쏘 룽고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장소로 유명해 이곳에 투숙하지 않는 관광객도 많이 찾는다. 부지런한 한국인답게 9시 전에 카페에 도착하니 한쪽에서는 투숙객들의 조식 서비스로 분주했다. 우리는 위풍당당 카페 개시 손님.
아직 이른 시간이었나 보다. 봉오리를 미처 피우지 못한 테이블 위의 꽃들이 새벽 비가 갠 아침을 한층 청량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게르만족(나는 여기 온 뒤로 유럽인들의 종을 제멋대로 구별하는 놀이에 재미 붙였다)이 틀림없을 법한 아가씨가 와서 밝은 웃음으로 아침 인사를 건넨다. 우리는 커피와 홍차, 핫초코를 주문했다. 음료를 마시며 창밖의 사쏘 룽고를 바라봤다.
"울산바위 같네."
"어... 그러네."
"좀 그런 면이 없다고 할 순 없군."
사쏘 룽고를 올라가는 케이블카는 2인용 coffin lift다. 1970년대에 만들어진 리프트인데, 하얀색 직육면체 캔 같이 생긴 리프트에 2명이 점프하며 올라탄다. 내부는 움직이기 힘들 만큼 좁아서 coffin(관)이라 불리는 것 같다. 높이는 성인 키만큼 높고 폭은 두 명이 간신히 서있을 만큼 좁으니 당연히 흔들거림이 심할 것이다. 이 케이블카는 높이 3,000m의 사쏘 룽고의 거대한 바위 계곡 틈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진다.
바로 전날, 우중 케이블카의 공포를 맛본 복숭아는 절대 저것을 탈 수는 없다고 버텼다. 우리는 셋인데 둘만 탈 수 있는 것도, 누군가 한 명은 혼자 타는 것도, 서서 타는 것도, 좁은 것도, 바위틈으로 흡수되는 것도, 흔들리는 것이 뻔할 저 알량한 형태도, 무엇 하나 용인할 수 있는 사항이, 아이에겐 없었다.
무슨 말로 사춘기 예민한 소녀를 꼬실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승강장 주변을 맴돌았다. 아침부터 어슬렁거리는 사람들 옆으로 소들도 어슬렁거리며 되새김질을 한다. 돌로미티의 뽀얀 소들은 낯선 사람을 무서워하지도 않고 피하지도 않는다. 어떤 어린이가 다정하게 소를 쓰다듬고 있길래 나는 마을 소년이거나 목동의 아들인 줄 알았다. 하지만 아이의 엄마가 목동의 아내일 경우 그 모습을 저토록 열심히 사진에 담지는 않을 것이다. 어디선가 지프차를 타고 나타난 목동은 승강장 주변의 소들을 순식간에 그러모아 조금 더 깊은 초원으로 몰며 사라졌다.
그리고 남편은, 그들이 남긴 똥을 밟았다.
"아니, 이게 색깔이 진하고 넓적하더라고! 나는 돌인 줄 알았지!"
세상 깔끔쟁이 결벽증 아빠가 소똥을 밟고 울상인 채로 흐르는 개울물에 신발을 담근 것을 본 복숭아의 표정이 조금 펴졌다. 우리, 소들을 따라 저 길을 걸어 볼까.
돌로미티에 대해 공부할 때, 나는 당연히 케이블카를 타야 하는 것으로 알았다. 어떤 후기를 봐도 케이블카를 타고 오를 뿐이었다. 트래킹을 한다 해도 일단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 정상의 주변을 1~2시간가량 걷다가 다시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오는 코스였다(세체다의 콜 라이저 코스도 마찬가지다). 구글에서 얻었던 정보도 케이블카를 타는 장소와 운영시간, 요금제 정도가 전부였다.
하지만 사쏘 룽고를 어슬렁거리다 보니,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케이블카를 타지 않음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저 이상하고 아름다운 관 속으로 들어가 편안하게 오르는 대신 걷는 것을 택했다. 등에는 배낭을 메고 손에는 개 목줄을 잡았다. 등산화 끈은 단단히 묶었고 얼굴 위로 머리카락 한 올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바싹 추켜올렸다. 한 젊은 커플을 봤다. 남자는 갓 돌이 될법한 아기를 업었고, 여자는 배낭을 멨다. 손은 서너 살 된 아이의 한 손과 연결되어 있다. 나는 이 가족의 언어를 모르므로 그들의 대화 내용을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표정과 눈빛으로 사쏘 룽고 트래킹에 대해 얘기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여기가 어디쯤이고, 오늘 코스는 어디로 갈 것이며, 예상 시간은 얼마쯤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했다.
복숭아가 아기였을 때, 나는 여행은 언감생심 집 앞의 놀이터에 나가는 것도 힘들었다. 아니, 힘들지 않은 일이 없었다. 밥 먹이는 일도, 기저귀 가는 일도, 목욕시키는 일도, 책 읽어주는 일도, 재우는 일도. 아침에 눈을 뜨면 왜 또 눈이 떠진 건지 서러워 울기도 했다. 침대에서 나오기도 전에 온몸의 관절에서 뻐근한 통증을 느꼈다. 매 순간 모든 상황이 어렵고 힘들기만 했던 이유를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나에게도 저 부부와 같은 나이가 있었고 저 아기만큼 예쁜 아이가 있었는데, 흘러간 그 시간의 결이 아주 많이 다르게 느껴질 뿐이다.
가족의 뒷모습을 보며 우리도 슬슬 따라가 보았다. 거대 바위의 초입은 울퉁불퉁한 잔챙이 바위로 가득했는데, 그 돌무더기 사이로 길이 나있고, 그 길을 따라 꽃과 풀이 빈틈을 메꾸고 있었다. 마치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 반지 원정대인 호빗들이 모험을 떠나며 지나가는 숲 속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오르락내리락 경사를 따라 신비로운 돌 길 깊숙이 들어가면 한쪽으로 사쏘룽고 자전거 파크 길이 보인다. 그 길은 오직 자전거만 진입할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소똥과 돌길을 뚫은 자전거가 등장했다. 바퀴 두 개의 자전거는 ATV처럼 씩씩하고 강하게, 빠른 속도로 달려갔다. 독수리 같다.
힘들었는지 약간 펴졌던 복숭아의 표정은 다시 굳어지고, 남편 역시 그만 돌아가자 한다. 이미 한 시간을 넘게 걸은 데다 이 길로 계속 가면 사쏘 룽고에 걸어서 올라간다는 뜻인데, 앞으로 여행 일정이 많이 남은 지금, 굳이 힘을 뺄 필요는 없단다.
나는 케이블카를 타고 정상에 오르는, 정상에서 구경하는 여행은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인증 외에 의미가 없었다. 그런 식으로는 서너 군데만 다녀도 돌아서면 어디가 어디였는지 헷갈릴 나이다. 구글 이미지가 실존함을 두 눈으로 확인한다는 의미 외엔 없다.
대학교 때 교양수업인 서양미술사 시간이었다. 강사는 여행 중 한 미술관에 방문했던 경험을 들려주었다. 친구가 미술관 전체를 돌아보는 동안 자신은 Flaming June이라는 작품 하나 앞에만 앉아있다 나왔단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 친구는 그 미술관에서 본 작품을 단 하나도 기억하지 못한 반면 자신은 Flaming June 하나만큼은 완벽하게 기억했을 뿐만 아니라 몇 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의 감동을 잊지 않고 있다고 했다. 당시 나는 화면에 뜬 오렌지빛 드레스의 화려함과 그 아름다움에 빠져 넋을 놓고 멍하기만 했는데, 그 말뜻을 이제는 알 수 있을 것 같다.
돌로미티 여기저기를 찍고 다니는 것은 사람들의 "거기까지 가서 여기도 안 가봤어?"라는 말을 듣기가 두려워 일단 찍고 보자,라는 심리가 더 강하게 작용했기 때문은 아니었는지.
사쏘 룽고가 주는 감동은 샬레 제라드의 창가에 앉아 차를 마신다거나 코핀 리프트를 타고 바위 사이로 들어간다 해서 완전히 느낄 수는 없을 것이다. 시간을 들여 두 발로 소똥과 돌과 풀을 밟으며 길을 걸어야만 느낄 수 있다. 그것이 사쏘 룽고와 대화를 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가족이라도 내 마음과 같진 않기에 돌아 나왔다. 내가 아쉬워하는 게 보였는지, 이날 숙소로 돌아올 때는 사쏘 룽고를 넘어오는 길로 접어들었다. 해가 질 무렵 우리는 예의 찌지지지지직 길을 달렸다. 파쏘 셀라(passo sella)라는 사쏘 룽고를 둘러가는 도로다. 자동차를 타고 파쏘 셀라를 지날 때 나는 두 팔로 우람한 사쏘 룽고를 꼭 안아주었다.
만나서 반가웠어. 다음에 꼭 다시 만나자. 그때는 우리 오랫동안 수다를 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