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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갱이 Jul 30. 2023

세체다

엄지발톱의 욱신거림이 남긴 미련 

돌로미티의 세체다(Seceda)는 봉우리 형상이 매우 독특하다. 한쪽 면은 비교적 완만한 경사를, 반대쪽 면은 급격한 경사를 이루는, 뾰족하면서 동시에 납작한 지붕 모양의 봉우리다. 날카로운 칼날에 비유하는 사람도 있다. 이 봉우리를 넘을 때 바람과 공기에는 어떤 변화가 생기는 듯하다. 높은 고도에서 차가워진 공기가 완만한 면 쪽으로 넘어오면서 온화하게 기온이 오른다던가, 세차게 불던 바람이 지친 나머지 미처 봉우리를 넘지 못하고 주저앉아 버린다던가. 현장에서 나침반을 열고 확인하지 못했지만 주입식 교육에 익숙한 한국인의 입장에서 보면 왠지 완만한 경사면은 동남쪽이요, 급격한 경사면은 북서쪽일 것 같게 생겼다. 드넓은 초원으로 덮여있는 완만한 쪽은 따뜻해 보였고, 풀 한 포기 없는 돌산인 반대쪽은 추워 보였기 때문이다. 초원과 돌산, 완만함과 급격함이 동쪽과 서쪽, 남풍과 북풍, 선과 악을 연상시키는 세체다. 세체다는 정확하게 반이 나뉜 산이다.


알페 디 시우시에서 내려온 우리는 바로 세체다에 오르기로 했다.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면서 주전부리를 한 탓에 배가 고프지 않아 점심 생각이 들지 않았다. 세체다에 오르는 법은 두 가지이다. 오르티세이에서 케이블카를 타거나 옆 마을 산타 크리스티나에서 케이블카를 타거나. 나는 오르티세이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 산타 크리스티나 쪽으로 내려와 버스를 타고 다시 오르티세이로 돌아와 주차해 둔 차를 타고 숙소로 돌아올 계획이었다. 산타 크리스티나 마을도 가보고 싶고, 버스도 타보고 싶고, 무엇보다 오르티세이 케이블카 내린 곳에서 콜 라이저(산타크리스티나 케이블카)까지 트레킹을 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가봅시다. 비도 그쳤는데 못 갈 이유는 없지요.

반반 무 많이 치킨 박스 같은 반반 세체다는 구름이 많았다. 아침에 비가 내린 탓이다. 구름은 세체다의 가파른 경사를 넘지 못한 채 웅성거리고 있었다. 힘들게 올라왔는데 못 넘어가니 심통이 잔뜩 나서 볼이 퉁퉁 부은 눈의 여왕의 쌍두마차가 떠올랐달까. <사자와 마녀와 옷장> 같은 판타지 영화 보면 그런 장면이 꼭 나오지 않는가. 악당으로 대변되는 차갑고 어두운 세력을 물리치면 세상이 온화한 초록으로 바뀌고 주인공의 얼굴 위로 승리의 미소가 떠오르듯, 세체다의 초록은 이제 막 차가운 먹구름을 물리치고 있었다.


반반 세체다


세체다 정상의 랜드마크는 나무로 만들어진 대형 십자가다. 왜 십자가가 이곳에 서 있는지 이유는 자세히 알지 못한다. 다만 알프스 봉우리에 이미 4,000개가 넘는 십자가가 있어 더 이상의 십자가를 반대하는 세력과 일부 정치세력이 대립하고 있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있다. 종교가 없는 나는 딱히 정상의 십자가에 감동하진 않았지만 신비로운 주변 경관 탓인지 분위기가 약간 성스럽게 느껴지긴 했다. 


어쨌든 이 십자가는 세체다에 오른 사람들의 집합소다. 모두 십자가 아래 모여 둘로 나뉜 세체다를 조망하고 사진도 찍고 근처에 돗자리를 깔아 도시락도 먹는다. 라이딩도 시작한다. 자전거를 끌고 올라온 예닐곱의 청년 무리는 단독 셀카, 친구와 셀카, 단체 샷 등 사진 수십 장을 찍은 핸드폰을 저지에 꽂고 벌처럼 날아올라 페달을 밟는다. 그리고 나비처럼 여유롭게 산의 능선을 따라 내려갔다.


우리도 사람들을 비집고 앞으로 나가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나는 경사진 풀밭에 앉아 아기와 소풍 온 엄마의 뒷모습을 구경했다. 복숭아는 연습장 표지에 어울릴 법한 감성샷을 찍기 위해 핸드폰 카메라의 채도를 한껏 높이고, 남편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세체다 주변을 둘러싼 봉우리들의 이름을 맞혀보고 있었다. 각자의 방식으로 시간을 보낸 뒤 말했다. "콜 라이저로 가야 해. 사람들이 내려가는 길이 분명 콜 라이저 방향일 거야. 콜 라이저까지 한 시간 정도 걸린댔으니 천천히 가보자."


사람들이 걸어가는 방향으로 따라 내려가던 중 산장이 눈에 띄었다. 우리나라는 주로 산 아래 식당이 몰려있는데, 돌로미티는 워낙 산이 높아서 그런가 이렇게 산 중간중간에 산장 겸 식당이 있다. 점심을 건너뛴 탓에 출출해져서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슈니첼과 와인으로 허기를 채웠다. 슈니첼은 처음 먹어봤는데, 상큼한 레몬즙과 바삭하고 쫄깃한 돈가스가 잘 어울려 집에 가서 냉동 돈가스를 먹을 때 레몬즙을 뿌려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음식과 와인, 산과 소들의 방울 소리에 취한 나는 자울자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콜 라이저로 가야 해.

이미 세 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돌로미티의 케이블카는 5시~5시 30분이면 끊기는 관계로 서둘러야 했다. 후기는 1시간 10분 코스라고 했지만, 산속에서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정신을 차리고 후다닥 일어나 다시 사람들이 가는 길을 따라갔는데 어째 사람들이 점점 줄어드는 것 같다. "올라오는 사람들은 많잖아, 이 사람들은 콜라이저에서 내려서 1시간을 걸어 올라와 오르티세이로 내려가는 사람들일 거야." 불안해하는 남편에게 나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이 사람들은 올라오는 거고, 우린 내려가는 거야. 조금만 더 가면 된다구."


이제 자전거도 안 보이고 내려가는 사람은커녕 올라가는 사람도 안 보인다. 네 시가 다 되어가지만, 케이블카 승강장은 있을 기미가 없고, 계속 경사로만 걸은 탓에 엄지발톱과 허벅지가 아파져 온다. 화장실에 가고 싶다는 복숭아를 데리고 눈에 띈 아무 산장으로 뛰어가 콜 라이저를 외치니 여기서 한 시간은 더 가야 나온다나. 아니 왜? 난 이미 한 시간이나 내려왔는걸? 네가 내려온 그 길로 한 시간은 더 가야 나와. 그 길 따라가.


콜라이저 가는 길이 그렇게 예쁘댔는데, 남편은 결국 산속에서 구글맵을 켰고 의기소침해진 나와 지친 복숭아는 땅바닥만 보고 걸었다. 앞장서서 맵을 따라 걷던 남편이 경악한다. "남은 시간이 다시 한 시간 이십 분으로 늘어났어!"


"으아악, 콜 라이저~ 콜 라이저 타야 하는데!"




내 인생의 첫 번째 트레킹은 22살 유럽 배낭여행 중에 있었다. 물가 비싼 스위스에 도착한 학생 배낭여행자답게 나는 융프라우가 아닌 쉴트호른 전망대에 올랐다. 당시 융프라우 전망대 요금은 10만 원 남짓, 쉴트호른 전망대는 6~7만 원 돈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돈도 돈이었지만 쉴트호른에 올라가야 융프라우를 볼 수 있대, 융프라우에 올라가면 융프라우가 안보이잖아?"라고, 함께 간 친구를 설득했다. 쉴트호른에 올라간 나는 융프라우를 본 기억이 없다. 007 화장실도 기억에 없다. 케이블카를 타고 정상에 오른 나는 홀린 듯 전망대 문을 열고 나와 눈바람이 몰아치는 만년설을 뚫고 네 시간 반 동안 걸어 그 산에서 내려왔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그냥 그러고 싶어서였겠지.


산에서 내려오는 동안 별걱정도 안 했던 것 같다. 길이 있었고, 그 길을 따라 걸었다. 무섭거나 걱정된다거나 빨리 가기 위해 지름길을 찾아봐야지 같은 어려운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냥 한 사람이 걸어갈 수 있는 너비의 황토색 길만 따라갔다. 그러다 산 아래에서 어떤 가족을 만났고, 어디서부터 왔냐는 질문에 쉴트호른에서 왔다고 대답하니, 그들은 와우,라고 했다. 무섭다고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간 친구도 케이블카 승강장에서 만났다. 네 시간이 넘게 나를 기다리던 친구는 울먹거렸고 그 모습을 본 승강장 직원이 다가왔다. "거봐 내가 내려올 거라 했지, 얘가 너 실종됐다고 신고해 달라고 했었어." 피식피식 웃던 아저씨의 얼굴도 기억한다.



"그러니까 이 길로 그냥 가면 콜 라이저가 나오긴 나올 거라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지금 우리는 콜 라이저 하행선 승강장으로 가야 했는데, 이 길은 상행선 승강장으로 가는 길 같아. 산타 크리스티나 마을로 가는 길이라고."

"아까 산장에서 이 길 따라가면 콜 라이저가 나올 거랬는걸."

"그러니까 그 사람도 산타 크리스티나 마을에서 출발하는 콜 라이저를 말한 것 같다니까. 아까 세체다에서 출발할 때부터 길을 잘못 든 거야. 아무튼 더 이상 이 길로 가면 안 돼. 잘못했다가는 아무 케이블카도 못 타고 여길 헤매게 될 거야. 다섯 시면 다 끊긴다고."


남편은 다시 세체다로 올라가 오르티세이 방면 케이블카라도 타야 한다고 했다. 쉴트호른 하산 경험이 있는 나는, 이 길만 따라가면 어디든 마을에 도착하게 될 것임을 알기 때문에 굳이 다시 올라가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실랑이할 기운도 없고 무엇보다 애가 있으니. 내 욕심에 괜한 불안을 조성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다시 왔던 길을 올라갔다. 케이블카 막차 시간에 맞추려면 서둘러야 했다. 콜 라이저로 향하는 아름다운 트래킹 길 따위는 이미 사치가 되어버렸다. 언덕을 달렸다. 가장인 남편은 여자 둘의 안전에 책임이 있다는 듯 소리를 지르며 빨리빨리를 외쳤다. 슈니첼을 먹었던 산장 근처까지 올라왔을 때 비로소 세체다의 능선이 보였고, 아 저기 저 위가 콜라이저 하행선 승강장이구나. 십자가 전망대 앞 갈림길 중 경사면을 따라 완만하게 난 능선 길을 따라갔으면 정말 흥얼흥얼 한 시간 걸어 콜 라이저에 도착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까만 해도 구름이 잔뜩 낀 탓에 길이 잘 보이지 않았고, 내려가는 것만 생각한 우리는 그만 잘못된 길을 선택했다. 덕분에 산장에서 슈니첼을 맛있게 먹긴 했지만, 예쁘기로 소문난 세체다의 콜 라이저 트래킹은 결국 놓쳤다.


"콜 라이저, 콜 라이저."

케이블카를 탄 남편이 귀에서 콜라이저가 환청처럼 들린다고 투덜거렸다.

"아쉽지? 내려가서 차를 갖고 산타 크리스티나로 가서 콜 라이저 타고 다시 올라와 볼까?  뛰어가면 가능할 것 같은데."

내 말에 복숭아는 격하게 반항했다.

"아니!!! 절대 싫어!!!"


밤늦도록 엄지발톱이 욱신거렸다. 나는 미처 콜라이저 승강장이든 산타 크리스티나 마을이든 아니면 그 어디라도 아래까지 걸어 내려오지 못한 세체다 산길이 못내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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