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 케이블카를 탄다는 것
돌로미티 서부 지역에서 관광객들에게 인기 있는 명소를 하나 꼽으라 하면 '알페 디 시우시(Alpe di siusi)'일 것이다. 이탈리아 알프스 지역에서 가장 넓은 초원지대인 데다 유명 산맥의 봉우리로 둘러싸여 있어 조망이 좋기 때문이다. 돌로미티 여행 첫날, 우리는 오르티세이로 향했다. 아침 일찍 세체다라는 봉우리에 오른 뒤 알페 디 시우시 초원에 앉아 점심을 먹을 계획이었다. 하지만, 비가 왔다.
그렇다. 비가 왔다.
세체다로 출발할 때는 구름이 좀 꼈나 싶은 하늘이었다. 2,000m가 넘는 고도라 케이블카 한 번에 다 오르지 못하고 두 번에 나눠 가야 하는데, 두 번째 케이블카로 갈아탄 순간부터 빗방울이 떨어졌고, 내릴 때는 폭우가 쏟아졌다. 쏴쏴. 쏴쏴...
세체다 케이블카 정상의 승강장 옆에는 역시 세체다라는 이름의 카페가 있고, 비는 그칠 기미가 안 보인다.
찹쌀떡처럼 뽀얗고 묵직한 구름이 세체다를 포함한 오들산군은 물론이요 셀라산군등 아름다운 봉우리들을 완벽하게 가렸다. 한 치 앞이 안 보일 정도로 김이 잔뜩 오른 사우나 안을 바라보는 기분이다.
홀은 개와 유모차, 사람으로 가득 찼다. 사람들은 각자의 스타일로 비가 그치길 기다린다. 개들은 얌전히 주인의 발밑에 배를 깔고 누워있고, 유모차 속 아기들은 자다 깨어 운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일행과 앉아 수다를 떨거나 카드게임을 하거나 책을 읽는다. 모두 딱히 비가 그치기만을 기다리는 것 같지 않아, 그냥 이 시간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 가족은 비가 오니 망했고, 내일도 계속 이러면 큰일이다,라고 투덜거리며 인터넷이 왜 이렇게 느리냐고 짜증을 냈다. 답답해진 나는 비옷을 꺼내 입고 카페를 들락날락하며 자발떨었다. 앞으로 몇 발자국이라도 디뎌보고 싶어 나가 봤지만 도무지 방향을 잡을 수 없어 도로 들어오기를 반복했다. 반팔에 반바지 차림으로 올라와 홀딱 젖은 채 처마 밑에서 겨우 비를 피하고 있는 청년과 눈이 마주쳤다. 어쩌다 저렇게까지 젖었는지 모르겠다. 비옷도 우산도 없으면서 어지간히 촐싹거렸나 보다. 많이 추운지 밖으로 드러난 팔다리가 빨갰지만 카페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는다.
문이 열리고 한국인 단체가 들어왔다. 그들은 장비발로 식당을 압도했다. 준비물에 적혀있었는지 모두 완벽한 방수를 자랑하는 고어텍스 재킷을 입고 발목까지 올라오는 등산화를 신고 100% 자외선 차단 모자를 쓰고 양손에는 등산 스틱을 든 K-등산객들은 비바람이 불어도 쌩쌩 불어도 정말 괜찮을 것 같았다. 얇은 바람막이 하나 입고 추워서 비옷까지 겹쳐 입은 채 덜덜 떨며 따뜻한 음료를 주문한 우리와 달리 그들은 앉자마자 맥주와 안주를 통일해 주문했다. 자연스럽게 연장자로 보이는 한 사람이 돌로미티 산군의 역사와 지형을 자신의 경험에 빗대어 설명하면서 어디가 무슨 특징이 있고 어떻게 좋은지에 대한 강의를 시작했다. 나머지는 공손하게 말씀을 새겨듣는, 뭐 그런 익숙한 분위기.
1시간쯤 지났을 때 우리는 도저히 못 참고 하산을 결정했다. 내려가서 뭐 다른 거라도 하자는 내 말에 남편이 옆 테이블 한국인 단체 관광객의 가이드 의견을 염탐하고 왔다. 가이드는 30분 더 기다린다고 했단다. "그 사람들은 비가 좀 와도 장비가 빵빵하니까 괜찮지만 우리는 옷도 없고 신발도 미끄러질 수 있어서 비 오면 꼼짝 못 해, 그냥 내려가." 나는 일단 여기를 벗어나고 싶었다.
우리 셋 다 우중 케이블카를 타보기는 처음이었다. 산 중턱에 낀 비구름 안에서는 바람이 많이 분다는 사실을 과학 교과서에서 읽었던 것 같기도 하다. 줄에 매달린 케이블카가 바람에 흔들리는 것 역시 진자의 운동 같은 사진으로 본 기억이 있다. 작동 중인 케이블카가 멈춘다는 사실은 놀이동산의 어트랙션이 멈춰 40분 혹은 두 시간 동안 공중에 매달린 채 공포에 떨다 구출되었다는 기사로 봤다. 하지만 정지된 채 흔들거리는 케이블카 안에서 앞뒤의 텅 빈 케이블카가 더 세게 흔들리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지는 그 어디에서도 알지 못했던 일이었다.
남편은 안 무서운 척 제법 점잖게 괜찮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봤다. 그의 두 눈이 바닥에만 꽂혀 움직이지 않고 있음을. 꽥꽥 거리는 복숭아는 조용히 좀 하라는 내 말에 울먹울먹 잦아들더니 폰을 꺼내 느닷없이 J팝을 틀었다. 이해할 수 없는 중학생이다. 하지만 음악을 통해 심신의 안정을 꾀해야 한다나. 비행시간까지 합치면 이곳까지 오는데 거의 스물세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오자마자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려 이 시끄러운 일본 노래를 듣고 있어야 하다니. 뒷골이 땅기고 가슴이 답답해 나마스떼, 창문 좀 살짝 열었다. 빗방울이 샤워기처럼 쏟아져 들어오고 몰려오는 돌풍 때문에 더 세게 흔들린다고 아우성이다. 창문을 닫고 복식호흡을 했다. 요가 강사의 목소리를 떠올리려 애썼다. 배꼽 위에 양손을 포개 얹고 숨을 들이마시면 배가 뚱뚱해지고 후 내뱉으면 배가 홀쭉해집니다... 흐읍 후우욱 흐읍 후우욱 흐읍... 덜컹, 하는 소리와 함께 케이블카는 움직였다.
케이블카가 승강장에 도착함과 동시에 J팝은 멈췄다. 비도 그쳤다.
오르티세이 마을 골목을 걸으며 기념품샵 구경을 하는데, 남편이 산 위의 구름이 많이 걷힌 것 같아 보인다고 말했다. 자기는 케이블카 포비아에 걸렸다며 징징대는 청소년을 끌고 알페 디 시우시로 올라가는 케이블카에 탔다. J팝을 들어야 했지만 구름이 물러가고 하늘이 개어갈 때마다 내 마음에도 여유가 스며들어와 괜찮았다. 이 어처구니없는 음악이, 들을 만하게 느껴졌다. 승강장에서, 아침에 나와 눈이 마주쳤던, 팔다리가 빨간 청년을 또 만났다. 슬쩍 눈인사를 건넸다.
알페 디 시우시에 올라가기 위해서는 오르티세이에서 Seiser Alm 케이블카를 타야 한다. 정상의 승강장 옆에는 Mont Sëuc이라는 이름의 레스토랑이 있다. 처음에 공부할 때 나는 Seiser Alm을 타고 Alpe di siusi에 올라가 Mont Sëuc에서 점심을 먹는다, 고 썼다. 이 단어들을 뭐라 발음해야 할지도 몰라 여기저기 물어보기도 했는데, 명확한 답을 얻지 못했다. 한참 후에야 Alpe di siusi의 독일어 버전이 Seiser Alm, 라딘어(돌로미티 토속어) 버전이 Mont Sëuc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의 계획은 알페 디 시우시를 타고 알페 디 시우시에 올라가 알페 디 시우시에서 점심을 먹는다, 였다.
예전에 스위스 갔을 때도 지역에 따라 불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로망슈어가 공식 언어로 쓰여서 재미있는 나라라고 생각했는데, 이탈리아는 한술 더 뜨는 것 같다. 소설 <나폴리 4부작>에서 주인공이 고향인 나폴리에서 교양 있어 보이기 위해 표준어로 말하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이때 다른 가족들과 친구들이 사용하는 말을 '사투리'라고 번역되었는데, 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사투리와 좀 다른 성격이다. 우리나라의 사투리는 하나의 언어에 기반을 두고 있어 듣기에 어색하더라도 제반의 뜻을 이해하는 데에 큰 무리가 없다. 하지만 이탈리아 같은 나라는 아예 언어 자체가 달라 지역 간 의사소통이 힘들다.
이동하는 기차 안이었다. 우리는 4인 가족석 중 세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고, 남은 한자리와 옆 칸의 두 자리는 이탈리아 10대 청소년, 남은 두 자리는 이탈리아 40대 두 명이 앉았다. 우리야 핸드폰만 보는 한국인들이니까 조용했지만, 다른 여섯은 각자의 일행과 신나게 수다를 떠느라 시끌벅적한 상황이었다. 나는 막연하게 청소년들은 독일에서 놀러 온 아이들이고 40대 둘은 이탈리아 아줌마들이라고 짐작했는데, 내릴 때쯤 이 여섯 명이 친구가 되어 영어로 대화하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알고 보니 아줌마들은 남부에서, 청소년들은 북부에서 살고 있었고, 청소년들의 메인 언어는 (부모님이 독일 출신이기 때문에) 독일어이며 이태리어는 거의 할 줄 모른단다. 이들은 아주 간단한 영어만 사용하며 신나게 수다를 떨었다. 아주 간단한 영어이니 어쩌면 설명을 정확하게 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내가 이해를 잘 못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이들은 모두 이탈리아 사람들이고, 아무도 말이 통하지 않는 이 상황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냥 그런가 보다, 하면서 식당칸에 가서 빵까지 사 와 같이 나눠먹으며 놀던, 그런 상황이었다.
아무튼 파파고도 모른다는 단어를 알페 디 시우시에 있는 Mont Sëuc 레스토랑의 웨이터는 알 것 같아 라딘어인 Mont Sëuc 발음을 물어보고 싶었는데, 아침에 세체다에서 카페를 간 바람에 배가 불러 알페 디 시우시의 Mont Sëuc에 갈 일이 없어졌다.
케이블카 문이 열렸고, 사람들은 모두 만세의 양팔을 벌리고 감탄을 외치며 초원으로 달려 나갔다. 7월 초순, 소들은 방울을 바쁘게 딸랑거리며 비 갠 풀밭을 뜯고 있었다. 손가락 하나보다도 작은 야생화들은 아침 내 쏟아진 비바람에도 하나 꺾임 없이 얼굴을 빼꼼하게 들어 올리며 멀리서 찾아온 관광객을 맞이했다. 저 멀리 회색의 간달프 아니, 회색의 알프스는 거대하고 육중한 파도처럼 느릿느릿 넘실대고 있었다.
여기가 알페 디 시우시구나. 남편의 말에 나는,
아니, 몽쇽이야, 어쩌면 세이져앎일 수도 있지만.
혀를 요리조리 굴려봐도 발음하지 못하는 신기한 이름 외에는 이토록 광활하게 평화롭고 아름다운 자연을 어떻게 표현할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