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짜면 더 예뻐 보이는 법
사춘기 소녀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혀 사쏘 룽고에서 리프트 탑승도 트레킹도 실패한 뒤 우리는 카레짜 호수(Lago di Carezza)로 향했다. 카레짜 호수는 브라이에스호수(Lago di Braies), 소라피스호수(Lago di Sorapiss)호수와 함께 돌로미티 3대 아름다운 호수라지만, 그 느낌이 몇 년 전 스위스 여행 때 가 본 블라우제 호수와 비슷할 것 같아 원래 계획에 넣지 않았던 장소였다. 이번 돌로미티 여행에서는 브라이에스 호수를 볼 계획이었다. 하지만 출발 며칠 전 브라이에스 호수에서 보트 타기 체험 가격이 3배 가까이 뛰었다는 정보를 접하게 됐다.
여기서 여행 경비 얘기를 안 할 수 없겠다. 우리 가족정도면 꽤 알뜰하게 여행을 다니는 편이라 자부한다. 비행기 표는 무조건 마일리지를 모아서 충당하고 숙소 예약은 최소 6개월 전에 마친다. 물론 마일리지로 갈 수 있는 도시만 선택해야 한다는 단점이 있다. 준비 초반에 고정한 숙소 때문에 여행 날짜가 다가올수록 변덕을 부리는 마음을 다스려야 할 필요도 있다. 몇 번이나 숙소를 바꾸고 싶어 예약 취소 버튼을 두고 갈등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상쇄할 만큼 경제적 이점은 크다. 여행 일자가 가까워질수록 숙박요금은 부르는 것이 값이 되기 때문이다. 복숭아가 어렸을 때는 여기에 비수기 요건도 하나 더 있었는데, 이제 당분간 비수기 여행은 힘들게 되어 아쉽다.
비행기 표와 숙박이 해결되면 상대적으로 나머지 금액은 자잘하게 느껴진다. 하루 평균 식비, 대중교통비, 입장료, 렌터카, 주차비, 기타 용돈 정도 되겠다. 이 같은 비용은 여행 루트를 짜면서 관련 사이트를 보면 정확한 가격을 알 수 있고, 블로그나 카페를 뒤져보면 할인받을 수 있는 팁도 얻을 수 있다. 급할 것 없이 천천히 알아보면 된다.
하지만 이번 여행을 준비할 때는 지난 3년간 업데이트가 안된 부분이 많아 정확한 정보를 얻기가 어려웠다. 코로나 때문에 도시와 나라가 봉쇄되었던 것이 풀린 지 얼마 안 되었고, 현재는 전쟁과 이상기후변화까지 겹쳐진 상황이다. 몇 년 동안 해외여행에 목말랐던 전 세계인들이 여행을 떠나고, 물가는 급등하고, 식재료 수급은 불안정하다. 한마디로 난리 블루스?
밀물처럼 몰려드는 관광객들로 바쁜지 관광지의 공식 사이트에는 3년 전 가격이 올라와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일일이 구글 후기나 카페 후기를 검색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TV에서 <세계테마기행 - 스위스 편>을 봤다. 요즘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에서 현빈이 피아노를 쳤던 이젤트발트에 관광객이 모인단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피아노가 있던 호숫가 나무다리를 걸어보는 데 입장료 5 CHF을 받기 시작했다. 조용하던 시골마을에 관광객이 몰려와 몸살을 앓게 되니 마지못해 내린 결정이었다고 한다. 문득 브라이에스 호수가 떠올라 검색해 보았다. 이곳도 예외가 아니었다. 호수에서 보트 타기 체험을 하려고 했는데, 바로 며칠 전 가격이 오른 것이다. 로마에서 꼭 가보고 싶었던 판테온도 7월부터 입장료를 받기 시작했다. 다른 것들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자잘한 경비, 로 치부했던 것이 결코 자잘하지 않게 되었다.
이탈리아 물가가 싸다는 것도 옛말이었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 가서 눈흘긴다더니, 서울 장바구니 물가에 한참 신경질이 올라 있는 나는 이탈리아 놈들 도둑놈 심보라고 욕했다. 아니 판테온은 몇 백 년간 공짜였을 텐데 왜 갑자기 돈을 받고 난리야?
하지만 막상 로마에 내려보니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철저하게 수요공급의 원칙을 따르고 있을 뿐이었다. 7월의 로마는 크리스마스이브 명동시내를 불사했다. 도시 전체가 관광객들과 더위로 터져나가고 있었다. 베네치아도 마찬가지였다. 공급은 일정한데 수요가 많으니 가격은 오를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아무튼 이 같은 이유로 처음 계획에 많은 수정이 더해졌는데 이때 브라이에스 호수도 카레짜 호수로 바뀌었다. 안 그래도 이동시간이 애매해서 고민했는데 보트 30분 타는 데 그 큰돈은 너무 괘씸했다. 그까짓 배, 안 타면 그만이다. 만에 하나 견물생심, 동행하는 어린이가 보트를 보고 타고 싶어 할 경우 '아이야, 그것은 너무 비싸 우리는 탈 수 없단다.'라고 말할 수도 없어, 그냥 안 가고 말겠다.
솔직히 내 입장에서는 카레짜 호수 역시 안 가도 그만인 터라, 더더욱 사쏘 룽고에 더 머물고 싶었다. 하지만 관짝 케이블카도 돌무더기밖에 안 보이는 바위도 재미없다는 중학생의 양 볼이 퉁퉁 부어오르는 것을 보고 있기란 더 피곤했다. 그래서 카레짜 호수로 향했다. 요정들이 춤을 춘다는 그곳.
빙하가 녹은 물이 고이면 신비한 에메랄드빛을 띤다. 여기에 호수 주변을 감싸고 있는 전나무 숲과 산의 반영이 비치면서 절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나는 카레짜 호수가 눈에 들어온 순간 감탄을 금치 못했다. 워터하우스의 오필리아가 그대로 떠올랐다(하지만 이 생각은 블라우제에서도 했다). 내내 뾰롱통했던 복숭아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남편도 전날 비가 온 덕에 물이 깊어져 더 예뻐 보이는 것 같다고, 오길 잘했다며 만족했다.
예쁘다, 엄마 여기 너무 예쁘다!
연신 사진을 찍으며 폴짝폴짝 뛰어가는 복숭아의 뒤를 따라 천천히 호수 한 바퀴를 돌았다. 끝이 안 보일 만큼 높이 솟은 전나무 숲길 사이사이로 호수가 언뜻언뜻 보였다. 신화가 충분히 만들어질 법한 풍경이었다. 입장료를 받기 전에 여기를 와봐서 다행이라고도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