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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갱이 Jul 30. 2023

친퀘토리

자연과 동화하는 각자의 방법

남편은 돌로미티 동부지역 여행은 친퀘토리(Cinque Torri)로 시작하자고 했다. 친퀘토리에서 마지막으로 케이블카를 한 번 더 타보고 트레치메로 가자는 것이다. 우리는 아침 일찍 일어나 남은 음식으로 아침을 먹었다. 이탈리아 식당에서 3인분을 주문하면 항상 음식이 남았다. 메뉴판에 에피타이저니 스타터니 메인 디시 외에 음식 리스트가 많기도 하고 이것저것 맛보고 싶은 것도 많아 욕심부려 제 양보다 많이 주문한 탓이 컸다. 피자나 햄, 치즈 등 일부 마른 음식들은 포장해 와서 냉장고에 넣어뒀더니 이삼일 새 한 끼 식사가 가능할 만큼 양이 많아졌다. 마트에서 사 온 요거트를 곁들여 배를 채우고 짐을 챙겨 셀바를 떠났다.


남편은 내비게이션에서 분명 친퀘토리 주차장으로 검색했다고 했다. 하지만 어느새 자동차는 멀쩡한 차도를 벗어나 밭두렁, 초록색 아기 포도가 조롱조롱 매달려있는 포도밭 과수원 길, 안으로 접어들었다. 진흙탕 길은 조금만 벗어나도 밭으로 차바퀴가 빠져버릴 만큼 좁게 느껴졌는데, 그 길의 앞에 사람들이 걸어가고 있었다.


"여기 차가 다니는 길이 맞긴 한 거야?"


우리는 waze라는 현지 내비게이션 앱을 다운로드해 사용하였다. 렌터카 내에도 내비게이션이 내장되어 있어 이중으로 보기도 했는데, 지금 waze에서 안내해 주는 이 길은 내장 내비게이션 상에는 길로 뜨지 않고 화면에는 등고선만 그려져 있을 뿐이었다.


"우린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외길이라 차를 돌릴 만한 공간이 나오지 않는다. 이러다 맞은편에서 다른 차가 오면 정말 큰일이었다. 이럴 때는 조금이라도 빨리 여기를 벗어나는 것이 상책이다. 깊게 생각하지 말고 고고, 흙탕물을 튀기며 앞으로 전진. 이탈리아 사람들이 세차를 안 하고 흙탕물이 묻은 채 다니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런 길이 언제 나올지 모르는 환경이라면 나라도 세차를 안 하고 살겠다. (지금도 자주 안 하지만.) 


다행히 밭두렁 길은 곧 끝나고 빈약하나마 차가 다닐 만하게 아스팔트가 깔린 길이 나왔다. 하지만 이 역시 산속 외길이었고, 마침 우리 맞은편에서 차 한 대가 내려오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당황하는데, 상대편 차가 멀찍이 선 채 움직이지 않는다. 슬금슬금 다가가보니 갓길에 차를 바싹 붙이고 우리가 지나가길 기다려주고 있었다. 남편이 고개를 꾸벅 숙이며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나는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 놀릴까 말까 하다 귀찮아서 관뒀다. 휴가라고 왔는데 연일 상상을 초월하는 이런 산 길을 운전하는 것은 보통 힘들고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다 보면 창문 닫고 고개를 꾸벅 숙일 수도 있고, 한국말도 나올 수 있고 그런 거지.


그래도 착한 운전자를 만나서 천만다행이었다. 한 번은 길을 걷다 비슷한 상황을 목격한 적이 있었다. 맞은편의 차가 지나가기 위해 이쪽 차를 뒤로 빼줘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후진하는 자동차의 운전자는 가차 없이 창문을 내리고 수십 개의 만두를 날렸다. '도대체 어디까지 빼줘야 하는 거야, 이 머저리 같은 놈아!'라고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말하고 있었다. 만약 지금 우리가 이런 사람을 만났더라면 엉엉 울어버렸을지도 몰라. 당연히 감사해야지.


오르막 산길이 계속되었다. 이쯤 되니 혹시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야 하는 길을 차로 오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슬슬 의심이 들었다. 혹시 친퀘토리 꼭대기로 가고 있는 게 아닐까? 주차장이 아니라 케이블카로 검색해야 했던 거 아냐? 내가 케이블카 승강장 주소 적어왔는데 그거 안 보고 그냥 주차장이라고 검색했지? 나의 압박에 남편은 황당하고 억울해했다. 지금까지 케이블카 타는 데 옆에 주차장이 붙어있었단다. 맞는 말이었다.


대체 지금 어디로 가는 거야?

어디로 가긴 어디로 가, 친퀘토리 주차장으로 가는 거지.


친퀘토리의 친퀘(Cinque)는 5개, 토리(Torri)는 탑을 뜻하는 torre의 복수형이다. 즉, 5개의 탑들이라는 뜻을 가진 뾰족뾰족 봉우리다. 전체적으로 조망한 사진을 봤더니 영화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사우론의 탑이 떠오른다. 이 중 하나가 특히 거대한데, 납작한 면만 보면 이는 꼭 광개토대왕릉비 같다. 우리나라 같았으면 분명 기나긴 세월 동안 누군가는 뭐라 뭐라 글을 새겨놓고 싶었게 생겼다. 자동차는 우리를 이 탑 바로 아래로 데려다줬다.


돌로미티에서 마지막 케이블카로 정상에 오르려 했던 우리의 계획은 이렇게 무산되었다. 이른 아침부터 꼬불거리는 산길에 오프로드까지 달린 뒷좌석의 중학생은 멀미와 두려움에 짜증이 한껏 치솟아있었다. 절대 이런 실수를 않는다고 자부했던 남편은 귀신에 홀린 표정이었고, 나는 주차장에 주차된 차들을 보며 이런 이상한 길을 올라온 자들이 또 있음에 안심했다.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을 수 있었다.


"살아서 여기까지 왔으니, 가까이 가 봅시다."


가까이서 보니 이 거대한 토리의 표면은 매우 거칠었다. 마치 비바람에 잘려나간 나무의 단면 혹은 불에 타고 남은 숯처럼 보여 오랜 세월 2,000m의 고산지대의 척박했을 기후 변화를 견뎌낸 우직함이 느껴졌다. 글씨 같은 것은 쓸 수 없겠다. 글씨 대신... 올라가 볼까.


정상인 이곳에 주차장이 있는 이유가 있었다. 사람들은 주차장에 차를 주차한 뒤 트렁크에서 주섬주섬 뭔가를 꺼내 어깨와 등에 멘다. 저것이 무엇인고... 


밧줄로 꽁꽁, 밧줄로 꽁꽁, 단단히 묶어라~ 

여기는 경관을 감상하러 오는 곳이라기보다 암벽등반을 하러 오는 곳이었다. 남자건 여자건 애건 어른이건 (심지어 양손에 못? 을 들고 아장아장 걸어가는 아기도 있었다!) 다들 굵은 밧줄을 업거나 메고 탑으로 향했다.


아직 10시도 안 된 시각이었는데 벌써 탑의 중간쯤까지 올라간 자들도 보였다. 


탑을 타고 있는 사람들


탑을 탈 준비 중인 사람들



아니 도대체 왜! 왜 저런 쓸데없는 짓을 하는 거야!


불평불만이 당연한 사춘기 소녀야, 너는 아직 이해 못 할 것이다. 저들이 자신의 삶에 얼마나 적극적인 자세로 임하고 있는지를. 어제 사쏘 룽고도 마찬가지였다. 사쏘 룽고를 둘러 걷고 친퀘토리를 기어오르는 것은 그 자연물에 동화되고 싶다는 인간의 욕망을 가장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흡수되는 것, 왜 너도 어떤 것이 너무너무 좋으면 그것과 하나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잖아. 트래킹도 암벽등반도 그렇게 녹아드는 각자의 방법인 것 같다. 나도 나이가 마흔이 훌쩍 넘은 지금에서야 이걸 알았다. 일찍 알았으면 저들처럼 더 즐겼을 텐데. 저 아기 봐, 자기도 줄을 매려고 하네, 밧줄이 팔뚝만 한데. 쟤는 앞으로 저 산을 오르며 얼마나 신나는 경험을 하게 될까.


내려오는 길에 올라오는 차를 만났다. 이미 경험이 생긴 남편은 능숙하게 갓길로 차를 붙여 올라오는 자동차에게 길을 내줬다. 뭐든 처음이 어려운 법이다. 올라올 때는 이 길이 어디로 가는지 확신도 없었고, 낯설고 좁은 산길이 두려웠다. 하지만 고작 한번 지나가봤을 뿐인데 그 끝을 가 봤다는 경험이 생긴 지금은 드물게나마 군데군데 있는 갓길도 눈에 들어와 미리 비켜줄 수 있는 여유까지 생겼다. 아침까지만 해도 이번 여행에서는 진짜 별별 경험을 다 해본다고 한숨 쉬던 남편은 어느새 창문을 열고 왼쪽 팔을 턱 하니 걸쳤다. 이탈리아 사람 다 됐다.


저기를 줄 하나 잡고 올라가는 사람도 있는데 고작 이 정도 산길이 뭐 별거라고, 고속도로로 진입한 우리는 어느새 오만해져서 어깨를 들썩이며 코르티나 담페초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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