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웨스 앤더슨을 만나는 법
코르티나 담페초에서 점심을 먹고 미주리나 호수(Lago di Misurina) 로 갔다. 미주리나 호수는 코르티나 담페초에서 돌로미티 여행 최종 목적지인 트레치메 디 라바레도까지 가는 길목에 있다.
미주리나 호수는 브라이에스 호수나 카레짜 호수처럼 몽환적인 풍경의 예쁜 호수는 아니다. 호수 자체만 놓고 보면 좀 현실적인... 한쪽에서는 모험과 환상이 가득한 매직아일랜드가 보이고 벚꽃이 머리 위를 뒤덮는 봄날의 석촌호수보다도 더 현실적인... 아, 백운호수. 넓은 백운호수와 비슷한 느낌이다.
그런데 이 미주리나 호수와 백운호수와의 차이점은 미주리나 호수 주변에는 그랜드 호텔이 있는 반면, 백운호수 주변에는 장어와 백숙 맛집이 있다는 것. 투숙할 일도 없는데 호텔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냐, 상관이 있다.
지난겨울, 나는 성수동의 한 갤러리에서 <우연히 웨스 앤더슨>이라는, 웨스 앤더슨의 사진전을 관람했었다. 거기서 한 사진을 봤다.
전시 포스터였는데 사진전 자체가 인상 깊었는지 몇몇 사진과 함께 아직도 내 기억에 남아있었나 보다. 어쩌면 돌로미티에서 머무는 내내 사진 속 이 길과 비슷한 길을 달렸기 때문에 무의식에서 소환되었을 수도 있다. 미주리나 호수의 구글이미지는 나로 하여금 이 사진이 떠오르게 만들었고, 그렇다면 어디, 거 호텔 한 번 가 봅시다.
호텔이 어딨나...
닮았나?
당겨봅시다.
쟤가 더 닮았나?
또 슬쩍 당겨 봅시다.
잘 모르겠다...
엄마, 호텔 타령 그만하고 이거 좀 봐! 애기 오리들이야!!!
그래, 너네가 훨씬 예쁘구나...
이탈리아에서 우연히, 웨스 앤더슨을 만날 뻔했지만 구름 낀 하늘의 방해로 못 만난 셈 쳤다. 한 시간 정도 호숫가 주변을 걸었다. 미주리나 호수의 둘레는 약 3km. 한 시간이면 걸을 수 있을만한 거리였다. 우리는 놀멍쉬멍 절반을 채 못 갔다. 게다가 앞서 걷던 예의 등산복과 스틱 차림의 사람들이 호수 주변을 걷다 순식간에 밀림처럼 우거진 숲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고 여기는 지금 우리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생각에 정신 차리고 왔던 길을 돌아 나왔다.
지금 우리가 가야 할 곳은 트레치메 디 라바레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