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매를 맺는다는 것
살면서 굳이 결실을 내야 하나요
제목은 기억나지 않는데, 식물에 관련된 어떤 책이었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식물이 열매를 맺을 때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쓰는지 아는가...'
사람 눈에는 식물의 잎이 자라고 꽃이 피고 꽃이 지고 열매가 맺히고 그 열매가 익기까지 일련의 과정이 자연의 당연한 순환처럼 보이지만, 이 식물의 입장에서는 하나하나의 과정에 부단한 노력과 힘이 필요한 일이라는 내용이었다. 특히 꽃에서 열매로 넘어가는 과정은 식물이 그동안 보유하고 있던 영양분을 다 쏟아부을 만큼의 에너지가 필요한 일이라고. 열매를 한번 맺고 나면 이 식물에게 남아있는 양분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고 했던 것 같다.
집에 관상용 꽃과 열매를 맺는 나무가 두 그루 있다. 하나는 십 년이 다 되어 가는 유주 나무이고 다른 하나는 30년쯤 된 오렌지 재스민이다. 분갈이 같은 것은 신경도 안 쓰고 오직 물만 주고 있는데 죽지 않고 살아간다. 아니, 연명하고 있다. 이들의 파리한 모습을 볼 때마다 남편은 아직도 살아있는 건 기적과도 같은 일이라고 말할 정도다. 책을 읽을 때 문득 사람은 때 되면 고기 한 점씩 먹어 주는 것이 인지상정인 법인데, 같은 생명인 나무는 식물이라고 무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꽃을 피든 말든 열매를 맺든 말든 나는 기계적으로 물만 주었다.
검색을 하여 시트러스 나무에 적합한 비료를 주문했다. 고기 맛도 먹어본 자가 안다고 했는데 평생 물만 먹고 산 나무가 탈이 나면 어쩌나 걱정하면서 설명서대로 흙 위에 비료를 놓고 물을 듬뿍 줬다. 1주일이 채 안 돼 이파리들은 전에 없이 윤기를 내며 초록으로 빛났다. 베란다 한쪽에서 누렇게 뜬 얼굴로 시름시름 앓던 유주는 고깃점이 두둑이 들어간 사골국을 한 사발 들이켠 흥부 자식들을 떠올리게 했다. 비료를 준 지 보름이 되지 않아 재스민은 무리를 지어 꽃을 피워 장마철의 꿉꿉한 공기를 뚫고 거실 가득 향기를 뿜어냈다.
한바탕 폭우가 쏟아진 다음 날, 나는 가위를 들고 시든 꽃대를 잘라냈다. 툭, 툭, 가지를 쳐 낼 때마다 바닥으로 꽃잎과 꽃술과 꽃받침과 꽃가루와... 꽃의 사체가 나뒹굴었다. 엄마가 "재스민 열매가 빨갛게 맺히면 꼭 보석같이 얼마나 예쁘냐."라고 말했던 게 생각났다. 남들 보기에 예쁜 게 무슨 소용인가. 내가 편해야 행복하지... 나는 내 재스민이 안 예뻐도 건강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주변 정리를 하고 물을 한 바가지 주었다. 그때까지 동그란 형태를 유지하고 있던 비료가 물살에 깨져서 흩어지는 것이 보였다. 물에 녹아 잔뿌리 곳곳까지 퍼져 쭉쭉 흡수되길. 꽃대를 잘라내고 초록만 남은 나무를 보니 세수한 듯 말갛다.
속이 개운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