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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신 Nov 30. 2023

미워하기에 마땅한 사람


광화문은 언제나 혼란스럽다. 한 곳에서는 서점에서 한 아름 사 온 수험서를 들고 종로 2가를 향하는 사람들, 한 곳에서는 분수대에서 놀기 위해 갈아입을 옷까지 챙겨 온 가족들, 횡단보도 하나를 두고 서로 싸우는 정당 현수막, 직장인들, 광화문으로 향하는 관광객들. 매일 셀 수조차 없이 많은 사람들이 광화문으로 모이고, 광화문에서 출발해서 흩어진다. 나는 그곳에 주에 5일은 가기에 늘, 그런 어지러운 풍경이 익숙하게 느껴진다. 단연코 그 혼란스러움 속에서 평온함을 얻는 것은 아니나, 이제 소란스러움조차 개의치 않아 질 정도로 그런 소음이 내 일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매장에 들어온 지 3개월이 넘은 신입 바리스타가 있다. 그는 아주 특이한 말투를 가졌는데 고객을 응대할 때면 자주 말을 더듬거나, 맞지 않는 단어 선택을 사용하여 듣는 우리의 마음을 졸이곤 했다.  그는 기본적인 레시피와 품질기한조차 거의 아예 외우지 못했고, 설거지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우리 매장의 모두가 그를 미워했다. 나는 그를 보면 딱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늘 웃는 얼굴로 무언갈 알려주려 했으나, 설거지를 할 때 아예 수세미질을 하지 않는 것을 보고는 너무도 화가 나서 그와 말을 섞지 않게 되었다. 그는 우리 매장에 큰 폐를 끼치며 근무했지만, 아무도 그를 해고할 수 있는 권리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행동은 그를 있는 힘껏 미워하는 것이었다.


나는 먼저 그를 욕하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이 그를 비난할 때 강하게 동조를 하곤 했다. 나는 그를 이해할 수가 없었고, 그를 미워했지만, 그가 없는 자리에서 이런 취급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분위기 속에서는 숨이 막힐 때가 있었다. 누군갈 밉다고 생각하는 것과, 밉다고 말하는 것의 간극만큼이나 '그가 미워.'라고 생각하는 것과, '그는 미워할 만한 사람이야.'라고 생각하는 것의 간극은 거대하다. 그러나 그의 험담 속에서 가슴께가 곧장 따끔거리다가도, 내가 하는 행동은 무색하게 한숨 몇 번을 쉬고 나머지 업무를 마무리하는 것이었다.





하루는 오후 네시쯤 퇴근을 하다가, 이 현수막을 든 사람을 본 적이 있었다. 저런 글씨체의 현수막과 복장으로 광화문에서 1인 시위를 하는 사내는 줄곧 보았으므로 그다지 생경한 풍경이 아녔을 테지만, 그날은 이상하게도 그 사내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횡단보도가 두어 개 맞닿아있는 곳에 서있는 사내. 그는 칼도 총도 철망도 두르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모두 그에게 둘러싸인 보이지 않는 경계가 있다는 듯이 행동했다. 그의 눈을 피하고, 그와 몸이 닿을까 근처를 빙 둘러 가기도 한다. 현수막에 적힌 불쾌한 문구에 인상을 쓰거나 혀를 차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신호등을 기다리면서 그 사내를 관찰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저 사람도, 스타벅스에 가서 블랙 글레이즈드 라떼를 먹고자 하는지. 그래서 발음조차 쉽지 않은 메뉴를 쑥스럽게 얘기하는지. 혹은 메가커피에 가서 아이스 카라멜 마끼아또를 먹는지. 그렇다면 저런 복장으로 가는지, 옷을 갈아입고 가는지. 그의 이야기가 너무도 궁금해졌지만, 나는 그에게 다가가서 단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저 사람도 친구를 만나서 카페를 갈까? 하는 생각에서는, 어쩐지 그가 조금 쓸쓸해 보이기도 했다.


10여 분 정도 지나자, 사내는 팔이 아픈지 현수막을 머리에 이고, 팔을 탈탈 털고 다시 현수막을 들었다. 그 순간, 그 사내를 감싼 보이지 않는 투명한 결계가 금을 그으며 완전히 부서지는 것을 느꼈다. 괴이하게 느껴지는 문구의 현수막을 들고 광화문에 나서는 그도 우리와 같이 오래 손을 들고 있으면 팔이 아픈 인간이었다. 그날 오후, 광화문 사거리에서, 그 사내와 나 사이에 그어진 선이 사라짐과 동시에 나는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아마, 인류애라고 불리는 흔한 범주의 사랑이었으리라.


내가 그에게 소위 인류애를 느낀 것과는 관련 없이, 나는 그 현수막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고양이를 기르고, 교회를 다닌다. 그렇지만 나는 내가 믿는 종교의 신에게 부끄럽지 않다. 얼굴도 한 번 본 적 없지만 아프리카의 먼 나라의 굶어 죽는 아이들에게 사랑을 쏟는 사람이 있고, 내가 맞닿아있는 이웃의 어려움에 귀 기울이는 사람도 있다. 가엾이 죽어가는 동물에게 사랑을 쏟는 사람이 있고, 타 죽어가는 식물을 살리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도 있다. 이 모든 사람이 있기에 세상은 돌아간다. 내가 아프리카의 아이에게, 동네의 어려운 사람들에게, 동물에게, 식물에게 동일한 만큼 전부 사랑을 쏟지 않더라도, 누군가는 그것에게 사랑을 주기 때문에. 그렇다면 생각한다. 저 사람도, 누군가는 사랑해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그것이 세상 아니겠느냐고.


미워하기에 너무 마땅해서, 누구도 사랑을 주면 안 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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