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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라보다 Feb 23. 2024

미뤄둔 숙제와 행복지수

딸과의 데이트는 언제나 100점


'겨울방학은 기니까...' 하며 미뤄놨던 일 중 하나가 딸아이 치과 정기검진이었다. 딸은 만 14세, 아직은 엄마가 병원을 데리고 다녀야 할 나이다. 여태껏 그 일을 미뤄둔 이유는 시간이 안 맞기 때문이다. 겨울방학 동안 나는 아침 10시부터 저녁 6~7시까지 수업을 한다. 내가 퇴근할 시간이 되면 치과는 이미 문을 닫았다. 딸내미 병원 데리고 간다며 휴강할 수도 없는 일이고 어쩌나 하며 1월을 다 보냈다. 2월이 되자 다행히(?) 시간표에 변동이 생겨 목요일 마지막 예약시간 오후 5시에는 시간을 맞출 수 있었다. 그렇게 예약은 3주 전에 해놨다.




"숙제를 전날에 몰아서 하지 말고, 미리 조금씩 하면 되잖아."

숙제를  안 해오는 학생에게 내가 자주 하는 말이다. 숙제를 해야 하는 그날, 그 시간에 꼭 일이 생기기 때문이다. '갑자기 아팠다, 스마트 기기가 고장 났다, 스마트폰 잠금을 엄마가 풀어줘야 하는데 엄마가 잠들어버렸다' 등등 다양한 사건들이 꼭 그 시간에 일어난다.


어제 나도 학생처럼 미뤄둔 숙제를 못 할까 봐 노심초사, 전전긍긍의 시간을 보냈다. 여느 때와 같은 저녁 시간이었다. 딸아이는 저녁 잘 먹고 좋아하는 '골때녀'까지 잘 본 후 갑자기 머리가 아프다고 했다. 순간 '공부하기 싫어서 꾀부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어... 어... 얼굴이 진짜다.


잠시 후 화장실 변기를 붙들고 토하는 딸아이의 등을 두드려 주면서 "내일 치과 갈 수 있겠어? 내일 못 가면 다음 주에 예약 잡을 수 있을까." 이런 말이 나도 모르게 나왔다. 머리가 아픈 이유를 알아서 다행이긴 하지만 아픈 애한테 할 말은 아니었다.


밖은 계절에 어울리지 않게 쉼 없이 눈이 내린다. 개학을 코앞에 두고 대설주의보라니.

'다들 나한테 왜 이러니.' 만일 내일 숙제를 못한다면 누군가의 탓으로 돌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나도 아이들과 다를 바 없음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오늘 오후가 되면서 딸의 몸상태는 좋아졌고, 폭설도 멈추어서 치과 숙제는 계획대로 완료하였다. 다행이다. 검진결과도 좋은 편이라 또 다행이다. 개운한 기분으로 딸아이가 원하는 마라탕집으로 향했다. 마라탕과 꿔바로우를 주문했고 음식이 나오자 딸아이는 행복해 보였다. 중2의 행복한 얼굴은 꽤 귀하다. 그래서 이렇게 물어봤다.


"지금 행복지수는 몇 점이야?"

"80점."

단호하고 냉정한 대답. 당연히 100점이 나올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80점이 마치 내 점수 같아서 당황했다.

"20점은 왜 빠진 거야?"

"아직 안 먹었으니까."

어차피 채워질 20점이었는데 마라탕 다 먹은 후에 물어볼걸. 숙제를 끝냈다는 내 기분에 취해서 오버했다. 내 속으로 낳은 내 자식이라도 나와 다르다는 것을 또 잊었다.





배불리 먹은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또 물었다. 그렇다, 나는 뒤끝이 길다.

"딸, 이제 100점이야?"

"아니, 99점."

"왜 또 1점을 빼는데?"

"이제 집에 가서 이불 속에 들어가면 100점 될 거야."


눈이 다시 내리기 시작한다. 그래, 이불 안에서 뒹굴기 딱 좋은 날씨다. 얼른 집에 가서 남은 1점 채우자.


아프지 마. 내 새끼.



(사진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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