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라 May 17. 2024

소개팅에서 길을 잃다

2007년 7월의 어느날

드디어 그날이다. 그동안 목소리만 듣던 그 남자를 만나는 날. 요즘 소개팅 유행이 '선통화 후만남'이라길래 대세에 따라봤는데, 이게 의외로 나한테 맞는 방법이었나. 꼬박 일주일 동안 얼굴도 모르는 남자와 밤마다 통화를 하다니. 별 내용 없는 수다를 떨어도 편하고 재미있었다.


그동안 그 사람에 대해서 제법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책대여점에서 책(주로 무협지)을 자주 빌려 읽는다, 퇴근 후 저녁식사 겸 회식을 거의 매일 한다(만취할 정도로 술을 마시지는 않는 것 같다.), 친구와 동업 중이고 과학을 가르친다, 혈액형은 B형이고, 6남매 중 막내다. 주선자인 윤미쌤 말에 의하면 적당한 키에 마른 편이고, 밝고 친절하다고 한다. 그리고 형이 있는데 사이가 좋아보이더란다.


이제껏 여러 번의 소개팅을 했지만 오늘처럼 미용실에서 머리까지 하고 나간 적은 처음이다. 느낌이 좋으니 이 정도 투자는 해야지. 비록 다이어트에는 실패했지만, 머리발 화장발로 승부를 보겠다는 심산이다. 오늘 약속장소는 홍대에 있는 A레스토랑. 윤미쌤 말로는 정통 이탈리안 레스토랑인데 요즘 데이트 장소로 뜨고 있다고 한다. 홍대는 몇 번 안 가봐서, 길을 잘 찾을 수 있을까 걱정이 되기는 한다. 그래도 유명한 곳이라고 하니까 눈에 잘 띄겠지. 일단 출발.


날씨가 무지하게 덥네. 저녁에 만나자고 할걸, 이런 날씨에는 땀으로 화장이 지워질 텐데. 아직 시간은 충분하니 천천히 걸어야겠다. 여기 사거리에서 우회전하고 두 번째 골목으로 들어가서... 어, 어, 여기쯤 있어야 하는데. 여기가 어디지? 엉뚱한 데로 온 것 같다...

"윤미쌤, A가 안 보여요. 쌤이 알려준 대로 간 것 같은데."

"쌤, 아직 도착 안 한 거예요? 약속시간 30분 지났는데. 원장님 많이 기다리겠다. 원장님한테 전화해 봐요."

"안 돼요. 창피하단 말이야. 그냥 내가 찾아볼게요."


벌써 1시간이나 늦었다. 나는 완전 길을 잃었다. 그냥 집으로 도망갈까.

따르릉. 그 사람이다.

"여보세요..."

"어디쯤이세요? 근처에 뭐가 보여요? 제가 그쪽으로 갈게요."

"죄송해요. 여기가 어딘 줄 모르겠어요. 눈앞에 OOO이 보여요."

"아, 어딘지 알 것 같아요. 내가 그쪽으로 가고 있으니까 전화 끊지 말고 있어 봐요."

너무 창피하고 미안하고, 내가 한심하다. 아무리 길치라지만 이런 날에는 정신 차려야지. 나는 왜 이럴까. 눈물이 나오려고 한다.

순간 허공에서 어떤 눈과 마주쳤다. 사람이다. 처음 보지만 있다. 그도 나를 알아보는 같다. 부리부리한 눈이 웃고 있다. 그의 재미있어하는 표정이 나를 더욱 수치스럽게 한다.



한 여름, 한낮에 우리는 약속시간보다 1시간 늦게 만났다. 길을 잃었던 나도, 나를 찾으러 다니던 그도 땀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날이 우리의 1일이었고, 1년 반 열애 끝에 내 생일날 결혼식을 올렸다. 그 남자는 지금도 간혹 길을 잃는 나를 찾으러 다닌다.


@pixabay


매거진의 이전글 마음이라는 과목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