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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보라 May 10. 2024

오늘도 내 목소리를 남겼다

못생겨도 괜찮아

수업시간, 한 학생의 과제를 채점하는데 특정 문제에 눈길이 갔다. 풀이과정과 답까지 모두 정답이었다.

정답인데 수상하다. 너무 매끈해서 수상하다. 언젠가 내가 풀어준 풀이방법 그대로다.

풀이과정에서 아이의 목소리가 느껴지지 않는다.


"이 문제 나와서 설명해 보자."


자신 있게 나왔으나 시작부터 쩔쩔매는 아이. 내 느낌이 정확했다는 씁쓸한 결론에 이른다.


"집에서 어떻게 푼 거야?"

"저번 교재에 비슷한 문제가 있어서 보면서 했어요."

"모르는 문제가 나왔을 때 찾아보는 건 잘했어. 그런데 다시 풀어보니까 어때?"

"..."


모르는 문제가 나오면 별표치고 넘어가는 아이들이 많다. 전에 공부했던 문제라는 것을 기억하고 찾아보는 학생은 그래도 숙제에 대한 성의는 보여준 것이다. 그 점은 칭찬해주고 싶다. 그렇다면 이 학생은 무엇이 문제일까?


요즘처럼 정보가 넘치는 시대에 아이들은 핸드폰에 손만 뻗으면 문제풀이를 쉽게 얻을 수 있다. 학생들은 예전처럼 부모님께 물어볼 필요도 없다. 아이들이 못 보게 해설지를 숨기는 것도 소용없다. 하지만 모르면 결국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사실이다. 학원에 와서 모르는 문제를 질문하는 것도 강사의 도움을 받는 것이니까. 모르는 문제에 대한 풀이를 언제, 어떻게 손에 넣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도움을 받아서 문제를 해결한 후에는 두 종류의 학생으로 나뉜다. copy 하는 학생과 remind 하는 학생. copy 한다는 것은 겉모습을 그대로 베끼는 것이다. 겉모습만 써놓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은 필요 없다. 쓰면서 착각한다. '다음에는 기억할 수 있을 거야'라고. 하지만 copy에는 자신의 목소리가 없기 때문에 기억으로 형성되기 힘들다. 틀리는 문제를 반복해서 틀리는 이유다.


그렇다면 remind는 무엇일까. 어원은 're-(다시)+mind(생각하다)'라고 한다. 나는 여기서 mind는 '마음, 정신'이라는 뜻이 있다는 것에 주목했다. remind는 자신의 마음과 정신을 총동원하여 반복해서 생각하는 것이다. 즉, 자신의 목소리가 담겨야 할 수 있는 것이 remind다.


copy 한 풀이식은 매끄럽고, remind 한 풀이식은 울퉁불퉁하다. 타인이 미리 닦아놓은 길을 걷는 것은 빠르고 편하다. 반면에 내가 직접 잡초 뽑고 돌멩이 골라내며 길을 만드는 작업은 매우 더디고 힘들다. 하지만 쉽게 얻으면 쉽게 잊고, 힘들게 얻으면 잊기 힘든 법. 자신의 목소리를 담아서 힘들여 공부한 학생이 수학을 더 잘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




그 학생에게 remind의 방법과 중요성을 한참 잔소리(?)하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글쓰기가 이와 같구나.'

나는 이런저런 상상과 잡생각을 쉼 없이 하는 편이다. 내 안에 공존하는 많은 목소리를 글이라는 형태로 나타내서 내 눈으로 확인하면 난잡하기 이를 데 없다. 쉽게 하고 쉽게 잊었던 생각을 붙잡아 글로 다듬는 작업은 고달프다. 잠 줄여가며 이렇게 노트북 앞에서 시뻘건 눈으로 잡초 뽑고 돌멩이 골라내고 있다. 내가 뽑은 그것이 잡초인지 아닌지 알 수도 없는 환장의 콜라보. 책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던 매끈한 문장 하나 갖기가 이렇게 힘들다니.


오늘 그 학생에게 내가 한 말.

"처음부터 매끄럽게 풀어내면 네가 선생이지 학생이겠니? 사실 나도 너희들한테 잘 설명해 주기 위해서 얼마나 연습했는데. "

이 말을 나에게 돌려줘야겠다.

"글쓰기 시작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유려한 문장을 써제끼길 바래? 꾸준한 연습이 실력을 만드는 거야. 지름길은 없어."

하기 싫어도 해라.
감정은 사라지지만
결과는 영원히 남는다.
-니체-


울퉁불퉁한 수제쿠키 같은 내 글을 오늘도 이렇게 하나 남겼다.




(*대문사진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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