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란 무엇인가?
박사가 흔한 세상에, 박사라는 게 뭐 대단하냐고 되묻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일단 영화를 보자.
세상을 무너뜨리려는 악당도 박사고, 세상을 지키는 영웅도 박사라니까요?
태권브이의 악당은 카프 박사, 태권브이를 만든 사람은 훈이의 아빠이자 로봇공학을 전공한 김박사. 어벤저스에 나오는 닥터 스트레인지도 박사, 브루스 배너도 박사, 한국의 헬렌 조도 박사. 그런데 대개의 영화에서 박사들은 공학박사나 생물학, 의학박사가 대부분이어서 인문학 박사 입장에선 아쉬웠는데 <컨택트 (원제: 어라이벌)>에서 루이스 뱅크스 언어학 박사가 출현해서 반가웠다. 그 전에는 <다빈치 코드>의 종교기호학 교수 로버트 랭던 박사, 고고학 박사인 <인디아나 존스> 등이 유명했던 인문학 박사님들이었다.
영화에서 박사들의 유형은 몇 가지로 나뉘지만 공통점은 패션센스가 엉망이라든지 사회성이 부족하게 그려진다. 그중에서 제일 흔한 묘사는 영화에 자주 나오는 전형적 박사 조크에 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케이시 : 그러니까 직업이 일기 예보관(weatherman)이란 거죠?
윌 : 하아~ (깊은 한숨) 박사!, 기상학 박사!
케이시 : ㅎㅎㅎ 눼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박사들의 특징은 자신이 박사라는 걸 늘 강조하거나 내심 박사로 기억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학교 강의에 들어온 노교수님조차 자신이 박사학위를 받을 때 경험담이나, 박사논문 이야기를 한다는 걸 떠올려본다면 남자들의 군대 이야기만큼 강렬한 기억을 남긴 인생의 이벤트라고 할 만하다. 나 역시 처음엔 그런 박사님들의 심리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박사학위 논문을 쓰고 졸업을 해보니 알게 되었다. 그들의 마음을...
박사는 Ph.D.(Doctor of Philosophy)라고 부른다. 유럽 중세시대 전통에서 나온 말로, 박사는 사실 모두 철학박사로 해석된다. 세상 모든 학문은 철학의 분과라고도 할만하니 지금도 틀린 표현은 아니다. 박사는 졸업 때 특이한 졸업의상을 입는다. 졸업의상은 가운과 목에 거는 긴 후드, 그리고 박사모로 구성된다. 중세 교회가 대부분의 교육을 담당했던 전통 때문에 박사 가운은 교회 목회자 의상과 비슷한 디자인이다. 양쪽 팔에는 계급을 나타내듯 세줄이 선명하게 표시되어 있다. 참고로 학사는 줄이 없고, 석사는 두줄이다. 긴 후드는 어떤 전공을 했느냐에 따라서 다른 색을 착용한다. 인문학은 흰색, 과학은 금색, 약학은 초록색 계열 식이다. 졸업식에 가보면 알겠지만 총장부터 주요 간부들은 대개 자신의 출신대학 박사가운을 입는 전통이 있다. 국내 박사졸업자는 일단 빌려 입고, 교수가 되어 필요하면 그때 맞추면 되지만 해외 졸업자들은 여의치 않기 때문에 박사가운을 아예 구매해서 귀국하는 경우가 많다.
박사학위는 일종의 자격증이다. 단순하게는 교수가 될 자격증이기도 하고, 깊이 이해해보면 단독적으로 이론을 만들고 연구를 수행할 수 있는 연구자란 의미도 갖는다. 그도 그럴 것이 박사학위가 있어야 유명 학술지에 연구를 투고할 수 있고 동료 연구자 평가(peer review)라는 엄정한 심사과정을 거쳐 공식적인 연구발표를 할 수 있다. 뭔가 007면허처럼 혼자서 임무를 계획하고 세계를 구하는 활약을 펼칠 수 있는 사람의 면허증이란 이야기다. 물론 특수차량을 제공받거나 스파이 로맨스 따위는 없이, 연구실에 틀어박혀 있어야 한다는 소소한 차이는 존재하지만.
그렇다 보니 박사가 되는 건 쉬운 게 아니다. 예전에 우연히 박사과정을 포기한 이유에 대한 통계를 본 적이 있다. 2위인가 3위에 해당하는 이유가 기억에 남는다. '복잡한 (행정) 절차'. 박사를 그깟 행정절차 때문에 포기한다고? 이해가 안 되겠지만 사실이다. 일단 박사과정에 들어가기 위해선 석사를 마쳐야 하고, 연구계획서를 작성, 박사과정의 지도교수가 될 분을 미리 만나 이야기도 나누게 된다. 박사과정에 들어와서는 학점이수 틈틈이 영어 시험 패스, 프로포잘, 종합시험을 치러야 하고, 학교에서 정해놓은 논문 점수를 착실히 쌓아야 한다. 이 모든 과정을 패스해야 비로소 박사 논문을 쓸 '자격'이 주어진다. 그런데 자격만 있다고 다가 아니다. 본 게임은 이제부터다. 논문을 쓰기 시작하면, 학교에서는 어마어마한 서류와 절차를 요구하기 시작한다. 지도교수와 학과장 사인을 수시로 받아와야 하고, 서약서에 논문 표절 검사, 도서관과 행정실에서 요구하는 다양한 절차까지... 그러다 문득 이런 절차엔 어떤 적의가 숨겨져 있구나란 깨달음(?)을 얻었다.
학교는 박사학위를 주기 싫어하는구나!
따지고 보면 박사과정이란 연구를 수행하여 세상에 없던 앎을 단 1인치라도 넓혀 놓을 수 있는 학자의 생산을 목표로 한다. 하산하여 무림에 자립할 수 있는 한 명의 무사가 되기 위해서는 접시를 닦고 소림사 18 동인을 통과하고 스승님의 선문답 같은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그렇게 지난한 수련의 과정을 거치듯 도제식으로 학자가 만들어진다. 그렇기에 박사논문 역시 과연 이 친구가 학자의 싹수가 보이는지, 다시 말해 전공분야에 대한 지식뿐 아니라 주제의 신선함, 연구결과를 도출해내는 데 필요한 논리적 정합성, 합리성, 문장력, 심지어 커뮤니케이션 능력까지를 살펴보는 걸 목표로 한다. 그리고 논문을 포함, 이 모든 요소를 점검하는 파이널 스테이지로 디펜스라는 과정이 존재한다.
통상 5명의 교수님이 심사위원으로 디펜스에 들어오고, 박사나 석사과정생은 그 과정을 방청한다. 논문 작성과 행정절차로 지칠 대로 지친 박사생에겐 참으로 가혹한 시간이자 집중력을 짜내야 하는 시간이다. 내 논문의 개요를 일목요연하게 프레젠테이션하고 마음의 칼을 갈고 본격적인 심사와 질의응답에 들어간다. 방청객도 있으니 심사교수님도 허허실실 응할 수 없다. 중간중간 그나마 지도교수님이 구원의 손길을 내밀려 하지만, 심사위원장님은 모질게도 '어허, 지도교수님은 나중에 나중에...'하시는 바람에 구원의 손은 구름 속에 가리어지고... 그때 지도 교수님과 논문에 대해 나눈 대화가 생각났다.
교수님 : 자네 논문 주제에 대한 정치적 입장은 어떻게 되나?
나 : 네? (교수님이 헷갈리시나) 주제가 콘텐츠 창작연구쪽이라 정치적 입장 같은 게 있을 리가...
교수님 : 콘텐츠 교역에 대한 자네 입장을 묻는 거야. 찬성이야? 반대야? 그렇게 생각한 근거는 뭐지?
처음엔 이해할 수 없었다. 이건 마치 스테이크 레시피를 설명하려는 셰프에게 동물 권리에 대해 묻는 셈이랄까. 그런데 막상 논문과 연구에 깊이 빠져들다 보니 이내 그 의미를 알게 되었다. 매뉴얼에 따라 타성적으로 고기를 굽는 프랜차이즈 셰프라면 모르겠지만 인생을 걸고 요리에 천착하는 누군가라면 결국은 식재료가 어떤 식으로 내 앞까지 오게 되었는지, 또 그 과정에 윤리적이거나 철학적인 문제는 없었는지 반드시 되묻게 되는 시점이 온다는 걸 말이다.
실제로 심사위원 교수님 중 두 분은 신자유주의로 날개를 단 문화제국주의에 강한 반감을 갖고 계신 분들이었고 포맷 교역에 대한 나의 입장을 치밀하게 논박했다. 나는 나대로 스토리텔링과 놀이 이론처럼 인류 보편적인 문화이론에 기반한 포맷의 교역은 인종과 문화적 차이보단, 같은 장면에서 함께 웃고 눈물을 흘리는 과정을 통해 인간의 동질성을 확인하게 될 것이며, 이는 네트워크로 연결성이 강화된 현시대에 우리는 다르지 않다는 긍정적 메시지를 내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잘 된 대답인지 어떤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지도교수님의 선견지명과 깊이 있는 가르침에 새삼 감사함을 느꼈다.
그렇게 치열한 디펜스와 논문 수정을 거쳐 마지막 심사 날이 되었다. 한가한 토요일 오후였다. 최종적으로 패스 오어 낫을 결정하기 위한 시간이었기에 나는 심사장을 나와 어두컴컴한 복도 끝까지 걸어갔다. 노을이 지고 있었다. 운동장엔 소수의 학생들만이 느릿느릿 걸어가며 풍경을 만들고 있었다. 지쳐있었고 어쩐지 몹시 외로운 느낌이 들었다. 왜 이렇게 외로운 걸까? 논문이 통과되든 안되든 이미 그런 차원의 걱정은 저만큼 멀어져 있었다. 그저 우물처럼 투명한 외로운 감정의 밑바닥을 신기한 듯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때, 저 멀리 살짝 열린 문틈으로 빛이 비쳤다. 지도교수님의 손짓이 보였다. 문 앞에 왔을 때 지도교수님이 내 손을 꼭 쥐며 말했다.
축하해! 김박사!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와 아직 초등학교 입학도 하지 않은 아들과 춤을 췄다.
"아빠, 박사 됐다!"
아들은 아빠가 기뻐하니 함께 쿵짝쿵짝. 씰룩씰룩 한참을 같이 신나게 춤췄다.
춤을 추며 생각했다. 마흔이 될 때까지 이렇게 무언가에 몰입한 적이 있었던가. 궁극에 가까운 고독감과 외로움을 느낀 적이 있었던가. 이런 순수한 기쁨을 느낀 적이 있었던가.
박사를 하길 참 잘했다.
이즈음에서 박사과정은 그럼 어떤 사람에게 적합한지 궁금해 할 수 있다. 그 기준은 분명하다.
或生而知之 或學而知之 或困而知之 及其知之一也. 어떤 사람은 나면서 알고 어떤 사람은 배워서 알고, 어떤 사람은 애를 써야 비로소 아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앎이란 점에선 모두 같다. <중용>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사람, 즉 천재는 박사에 적합하다.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도 박사에 적합하다. 그런데 머리가 나빠서 낑낑대며 알게되는 둔감한 사람도 있다. 그런데 그 사람도 박사에 적합하다. 왜냐하면 결국 알게 되면 모두 같아지기 때문이다. 박사는 앎을 탐구하는 자들이기에 여전히 중요한 것은 앎에 대한 추구다. 그래서 박사과정은 학사나 석사와 달리 전공선택에 신중할 필요가 있다. 내가 정말 알고 싶고 좋아하는 분야를 선택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앎에 대한 열정이 떨어지고 배움에 실패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뉴턴의 말로 알려진, 실제로는 그전에 존재했던 멋진 경구가 있다.
If I have seen further, it is by standing upon the shoulders of giants.
내가 더 멀리 보았다면, 그건 거인의 어깨에 올라탄 덕분이다.
학문과 앎의 세계는 우뚝 선 거인과 같은 위대한 인류의 유산이다. 박사는 거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낑낑대며 올라 자신이 본 것을 사람들에게 외칠 수 있는 면허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나는 가끔 거인의 어깨에 올라탄 난쟁이가 되어 구릉의 경계선을 보는 상상을 한다. 서쪽 숲은 사람들의 발자국이 어지럽고, 동쪽으로 누군가 외로움을 버티며 끝까지 걸어간 흔적이 남았다. 그러다 고개를 돌린 순간 사람의 흔적이 잘 보이지 않는 땅이 보인다. 저곳까지 내가 걸어갈 수 있을까? 그 근처에서 길을 잃어 어지러운 발자국만 남기는 게 아닐까? 하지만 걱정에 앞서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 두근거림은 하나뿐인 인생에 느껴볼 만한, 독특한 외로움만큼 멋진 감정이다.
박사과정을 꿈꾸거나 망설이는 분이라면 한번 믿어봐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