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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뮤즈노트 Mar 26. 2020

당신의 뮤즈는 어떤 모습인가요?

너무 쉬운 창조적인 삶

그림 그리기와 글쓰기를 좋아하는 아들에게 뮤즈란 존재를 알려준 적이 있다.


"창작을 하는 사람들은 뮤즈란 창조의 신이 있다고 믿었어. 네가 그림을 그릴 때 새로운 아이디어가 막 떠오른다면 그건 아마 뮤즈가 찾아온 걸 거야."


그랬더니 어느 날은 하루 종일 그림을 그리다가 푸념하듯이 말했다.


"아빠, 뮤즈 때문에 힘들어. 자꾸 새로운 생각이 나서 멈출 수 없이 계속 그리게 돼."


그림과 이야기 만들기를 좋아하니 아빠 입장에서 흐뭇해하다가도, 가만히 나의 뮤즈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됐다. 미국 소설가 스티븐 킹은 <유혹하는 글쓰기>란 책에서 자신의 뮤즈를 지하실에 살며 거만하게 시가를 물고 있는 아저씨 모습으로 묘사했다. 뮤즈는 자신의 볼링 트로피를 흡족하게 바라보며, 작가의 존재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그의 곁에는 작가를 성공으로 이끌 수 있는 마법가루가 담긴 자루가 놓여있는데도 말이다. 스티븐 킹은 매번 정해진 시간에 지하실에 내려가는 수고를 감내하며 뮤즈의 환심을 사야 한다고 말한다. 그때서야 뮤즈는 시가를 씹어대며 작가의 펜을 움직여 준다고 말이다.


뮤즈는 실존하는 누군가가 될 때도 있지만, 창작이 늘 외롭고 수고롭다는 봉준호 감독의 말만 봐도 유령처럼 지하실에 틀어박혀 있는 스티븐 킹의 묘사가 훨씬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나는 대학시절 처음으로 글다운 글을 썼다. 소설이었다. 당시 나의 뮤즈는 검은 눈동자를 가진 미모의 여신이었다. 그녀는 어쩐지, 반 정도는 슬픔의 강에 몸을 담그고 있었고 내가 다가가려 할 때면 살짝 밀쳐내며 모래언덕에 머물게 했다. 그 강의 수위는 급격히 차오르지 않고 늘 일정했던 것으로 기억난다. 펜을 들 면 살짝 강물을 밀쳐내 발끝을 적셔주는 은혜를 베풀었다. 그 정도만으로도 가끔씩 빛나는 문장을 쓸 수 있었다. 처음 쓴 소설과 두 번째 소설로 각각 대학교 문학상을 받았다. 우울하긴 했지만 인정도 많은 뮤즈였던 듯하다.


뮤즈가 찾아올 때는 펜이 가벼워진다. 타자를 치고 있었다면 손가락의 타격감이 가볍다. 그리고 몰입하게 된다. 쓰려는 이야기의 정경이 떠오르고 그 무드에 완전히 빠져든다. 그것을 받아쓰는 것만으로도 이야기가 되곤 한다. 그런데 몸뚱이가 제대로 버텨주질 못한다. 글을 쓰다 보면 관절들이 소리를 내며 아우성친다. 그래서 잠깐 글쓰기를 멈추면 안개가 찾아오고 뮤즈가 있는 곳은 가리어진다. 참 곤란하다. 매번 수고로운 과정이 필요하다.   


요즘은 이야기를 자주 쓰지는 않는다. 대신 이러저러한 목적의 글쓰기를 하는 편이다. 최근에는 뮤즈의 존재를 찾기가 더 까다로워진 느낌이다. 게다가 아름다움과 슬픔이 공존하는 젊은 시절의 뮤즈는 가고 피라미드 주춧돌 위에 올라타 회초리를 휘두르며 빈정거리는 뮤즈가 나타날 때가 대부분이다.


"빨리 써. 변명하지 말고. 이마로 키보드를 눌러대도 너보다 빨리 쓰겠다."


그러면서도 창작의 가루는 거의 뿌려주지 않는다. 뭔가 불합리하고 인색하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긍정적 불안감과 떨림, 그 나이에 걸맞은 슬픔을 갖고 있던 청년시절의 나와 현재 모습은 변했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싶다. 그 고결한 뮤즈가 계속 돌보기엔 현재의 나는 풍족하기에 부족한 인간이 되지 않았나 싶다. 그렇다면 피라미드 돌 위에서 회초리를 휘두르는 뮤즈나마 감지덕지할 따름인 것이다.


전에 드라마 PD를 하고 있는 동기가 정신과에 들른 이야기를 해줬다. 우울함과 무력함이 지나쳐 병원에 갔다고 한다. 그때 의사는 말을 다 듣고는, '창조적인 일을 안 해서 그런 것 아닐까요?'라고 조언했다고 한다. '창조적인 사람은 창조적인 일을 하지 않으면 병이 나요.'라고 말이다. 인간성에 스며든 예술성과 미적 감각이란 창조의 형태로 발현되기 마련이다. 따지고 보면 누구나 창조성을 지니고 있다. 다만 그것을 스스로 믿지 않거나 예술가의 전유물 따위로 생각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 친구는 이후에 낡은 단독주택을 사서 공사업자들과 실랑이를 하며 다양한 창조성을 발휘했고 상태가 좋아졌다고 하니 다행이다라고 할지...


고양시에 있는 포마 자동차 디자인 박종서 미술관장님의 이야기도 재밌다. 상암동에서 가까워 회사 지인들과 방문을 한 적이 있다. 현대자동차 디자이너 1세대로 지금은 개인 박물관을 운영하며 후학을 양성하고 있지만, 디자이너로서 산타페 등 멋진 차종의 디자인을 하신 분이기도 하다. 그분이 디자인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아주 작은 일화 때문이었다고 한다. 초등학교 시절 태극기 그리기 수업시간이 끝나고 선생님이 불러 교무실에 갔다고 한다. 대개 교무실은 혼나서 불려 가는 곳이니 잔뜩 주눅이 들었다. 그런데 선생님이 자신이 그린 태극기 그림을 보여주며 다른 선생님께 칭찬과 박수를 유도하셨다고 한다. 어린 박관장 님이 그린 태극기는 다른 아이들의 것과는 조금 달랐다. 바로 바람에 휘날리는 태극기였다고 한다. 그 이후 자신이 그림과 디자인에 소질이 있다고 믿게 되었다 한다. 박관장 님의 뮤즈는 아마도 그 선생님과 닮지 않았을까?


인간은 창조적이다. 그런데 창조는 늘 모방과 함께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인간이 지닌 모방 본성이 창조의 근원임을 <시학>에서 강조한다. 그런데 모방에서 새로운 창조로 나가는 지점은 아주 미묘하다. 바닥에 놓인 태극기인가, 아니면 바람에 나부끼는 태극기인가 정도의 차이다. 따지고 보면 지리멸렬한 우리 일상에 창조성을 부여하는 행위도 마찬가지 아닐까? 아주 작은 변화를 주거나 관점을 달리 하는 것만으로도 삶에는 창조적 에너지가 스며들어 쿵쾅쿵쾅 엔진이 작동하게 된다.


봄을 맞아 집안 소파 위치를 바꾸고 인테리어를 새롭게 하는 일이나, 생전 안 사던 생화를 사서 식탁에 꽂아 놓는 일이나 모두 창조적인 행위다. 그렇게 우리의 삶엔 다른 관점이 생기고 향기가 깃든다. 모두에겐 창조성이 있고 마찬가지로 뮤즈가 있다. 나의 뮤즈는 어떤 모습일까를 가끔 상상해 보는것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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