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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뮤즈노트 Mar 23. 2020

일단 완독, 나의 독서 방법론

자가격리가 많은 요즘의 책 읽기

아주 오래전, MBC에서 했던 특집 드라마에서 최불암이 연기한 주인공이 이런 말을 했던 게 기억이 남는다.


"중학생 때는 러시아 문학에 심취해있었지요...."


러시아 문학에 심취한 중학생이라니, 이 친구는 나중에 어떤 인생을 살게 될까?

러시아에서 출발한 엉뚱한 의문이지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에 나오는 형제들 풀네임을 전부 외울 수 있는 지구인은 몇 명이나 될까? 또 엉뚱한 이야기지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완독 한 우리나라 독자는 세 자릿수 이내 일까 그 이상일까? 마찬가지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연관 검색어로 등장하는 게 '줄거리'라는 것에 놀라고, 이 위대한 작업을 아무렇지 않게 해내는 사람들이 많음에 또 놀라고...


이런저런 상념을 억누르며 써보자면, 독서란 짬뽕을 다 먹는 '완뽕'처럼 '완독'을 해야 하는 걸까... 란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할 듯하다. 프로 독서가의 조언을 들어보면, '완독(完讀)'이란 독서에 방해가 되는 완벽한 독(完毒)으로 느껴지곤 한다. 그래서 그들은 맞지 않는 책을 끝까지 들고 낑낑 댈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독서의 즐거움만 해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건 읽고 싶은 책과 읽어야 할 책이 서가 바닥에 두툼하게 쌓인 프로 독서가들의 입장이다.


일반 독서가들은 일 년에 책을 서너 권 읽을까 말까인데 그마저도 끝내지 못한다면 심한 자괴감에 빠지고 만다. 게다가 심사숙고해서 내 돈으로 산 책이라면 더더욱 상처를 받는다. 그래서 최근 출판사들의 경향은 책을 얇게 내고, 또 글자를 키운다든지 해서 누구든 쉽게 완독 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 나쁘지 않다.


독서가는 사실 작가의 또 다른 이름이다. 훌륭한 작가는 모두 프로 독서가다. 이것은 경험적인 동시에 통계적인(누군가 통계를 내진 않았겠지만) 이야기다. 그런데 이론적으로도 그렇다. 초기 커뮤니케이션 이론이 그렇듯 문학론에서도 생산자로서의 작가와 소비자(수용자)로서의 독자로 명확하게 구분되던 시기가 있었다. 그런데 '해체'로 유명한 후기 구조주의 이후에는 미술, 음악, 문학 역시 작가와 독자를 명확히 구분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대학원 출신들이 작품 대신 '텍스트'라는 말을 즐겨 쓰게 만든 롤랑 바르트는 <텍스트의 즐거움>이란 책에서 아예 작가의 죽음, 독자의 탄생을 말한다.


이 세계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는 언어, 정확히는 언어의 구조다. (헬라어 로고스란 말은 이성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언어란 뜻도 있다. 그래서 서구 철학자들은 언어에 매달린다.) 그런데 언어는 사실 본질을 정확히 표현하지 못한다. 아들이란 단어를 보자. 아들은 부모의 남자 자식이고, 부모는 아들을 낳은 사람이고... 뭐 이렇게 돌고 돈다. 아들은 이러저러하다...라고 실체를 규정하기도 어렵다. 효자도 있고 불효자도 있고, 잘생긴 아들도 있고 못생긴 아들도 있고... 데리다는 이를 '의미의 미끄러짐'이라고 표현했다.


이런 식이라면 우리가 사랑하는 어떤 작가의 작품도 그저 의미가 확정되지 않은 상태의 실(언어)을 꼬아놓은 직물(text)에 불과한 게 아닐까? 그 직물의 주인은 누구일까? 작가는 실을 만지작 거렸을 뿐 근본적인 주인은 아닐 테고, 그럼 실일까? 실은 그럼 어디서 온 걸까? 하늘에서 떨어졌나 땅에서 솟았나? 알 수 없다. 즉 텍스트도 언어도 그 기원은 모른다. 짜잔! 그러니 이 작품은 오롯이 내 거다...라고 주장하는 작가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거나 죽은 셈이다. 대신 작품은 텍스트로 텍스트는 언어로, 언어는 미끄러지는 모호한 의미로 그 구조는 스물스물 해체된다. 해체주의는 그렇게 탄생했다.


그렇다면 책(텍스트)에서 중요한 건, 작가라기 보단 독자다. 책이라고 하는 비어있는 공간에 의미를 부여하는 독자가 책의 주인이 된다. 사실 이런 류의 독자 중심론은 비평이론의 근간을 이루는 미학이 탄생할 때부터 예견된 바 있다. 칸트는 '아름답다' 같은 미학의 핵심을 취향으로 규정한다. 그전까지 꽃이 아름답다...라는 건 마녀가 메뚜기 가루를 마녀수프에 첨가하듯, 아름다움 가루 같은 것이 꽃에 묻어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칸트는 아름다움 가루 같은 건 없고, 꽃을 아무런 이해관계없이 바라볼 때 느껴지는 관조적 만족감과 즐거움이 핵심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칸트 미학의 입장에서는 이야기가 어떤 사회적 변화의 계기가 되거나 주제와 사상을 담아야 한다는 헤겔 미학과는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고, 독자가 느끼는 즐거운 만족감을 더 중요시했다. 흰 캔버스에 마구 붓질을 해댄 현대미술 작품을 어떻게 감상해요?라고 물을 때, 그냥 네가 느끼는 게 주제고 답이야~라고 전문가들이 대답한다. 현대미술은 개념미술의 형태로 철학화 되었기 때문이다.

 

책의 주인이 독자고, 책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도 독자의 마음이라는 이야기는 다시 말해 책을 쓰는 진정한 작가는 독자란 이야기가 된다. 그런데 책이나 소설을 쓸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끝까지 쓰는 것이다. 글을 쓰다 보면 어느 순간, 지루해지거나 심술 맞은 창조의 뮤즈가 쌩까고(?) 고개를 돌리는 경험을 누구나 하게 된다. 그때도 묵묵히 쓰다 보면 어느 순간 뮤즈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돌아와 작가를 돌보기 시작한다.


형편없는 책을 불행하게 집어 들었더라도 일단 완독을 하도록 노력해보란 이유도 그 때문이다. 중간중간 두어 줄씩 건너뛰며 읽어도 좋다. 대신 다 읽고 나서는 독서일기를 써보길 권한다. 독서일기를 쓰는 이유는 신랄한 비평과 비판을 쓰기 위함이 첫 번째 목적이다. 당신은 그 책을 완성했으니 욕할 자격이 있다. 두 번째 목적을 따지자면 어쨌든 책을 읽은 만족감과 관조적 성찰을 누리기 위해서다. 누구든 얼마 지나 다시 독서일기를 봤을 때는 성찰하게 된다. "나는 참 똥을 맛있게도 먹었군."이란 깨달음일 수도 있고, "책이 똥인 줄 알았더니 내가 똥이었어."란 깨달음일 수도 있다. 둘 다 나름의 통쾌함은 있다.


요즘은 읽고 싶은 책을 읽을 시간이 생겨 다행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읽었는데 도덕 용어 사전식으로 편찬한 그의 글을 보며, 아들로 알려진 니코마코스는 참 힘들었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론 요즘 아들이 '아빠는 내가 물어보면 왜 이렇게 말을 길게 해~"란 말이 겹쳐 들리는 것이다. 아... 이것도 반성과 성찰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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