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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뮤즈노트 Mar 12. 2019

자존감은 높일 수 있는 것인가?

[나의 아저씨] 아이유 삼촌팬 리뷰

자존감을 높이자는 말이 유행이다. 어떤 환경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을 사랑하고 존중하자는 의미다. 이런 처세가 유행하는 이유는 세상이 촘촘해지고 적대적으로 변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날 선 가시에도 다치지 않거나, 금세 회복하는 강인한 내면을 만들면 되지 않을까? 란 것이다. 그럴듯한 발상이긴 한데, 보다 직접적인 질문을 던져보자.

자존감은 과연 스스로 높여질 수 있는 것일까?


철학에선 자아를 둘 이상으로 나누어 살피는 데 익숙하다. 나를 존중하고 사랑하기 위해선, 자아가 현실 속에 살아가는 '나'란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 이런 평가는 자신을 대상화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나'를 주체가 아닌 객체로 바라 본다는 이야기다. 타인의 눈으로 '나'를 들여다보는 태도와 유사하다. 타인은 언제나 자신을 보는 정확한 거울이기 때문이다.


타인이 인정도 하지 않고, 우스꽝스럽거나 싫어하는 행동을 내면의 자아가 사랑하기는 어렵다. 설사 사랑한다 주장해도 루쉰이 쓴 <아큐정전>의 '아큐'처럼 자기기만, 정신승리와 구분이 불가능해진다. 그래서 자기계발서에 자주 등장하는 심리적 처방은 두 가지로 귀결된다. 작은 것부터 단계적으로 성취를 해나가며 스스로를 (타인에게 인정받고 칭찬받을 만한 사람이야라고) 설득하거나, 혹은 내면의 욕구 자체를 줄이라는 식이다. 그런데 실행이 쉽지도 않고 또한 정확히 어떤 태도를 취하라는 건지 세세한 부분은 이해하기 어렵다.


대개는 그래서 못난 건 못난 것이고 흉한 건 흉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산다. 자신도 자신을 사랑할 수 없는 이유를 안다. 그러니 사랑할 수 없는 것이다. 요컨대 자존감은 기상 후, 다짐이나 스스로 자기 최면을 건다고 높일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렇다면 방법은 아예 없는 것일까?


글쎄... 혹시 드라마를 보는 건 어떨까?


<나의 아저씨>가 주목하는 고통


<나의 아저씨>는 스토리텔링 측면에서 뛰어난 드라마다. 통상의 성장 서사에선 가르침을 주는 '조력자' 캐릭터가 정형화되어 생기를 잃는 경우가 많다. 반면, 이 드라마에선 박동훈(이선균 분)과 이지안(이지은 분), 두 명의 캐릭터가 '조력자'역할로 교차되며 성장한다. 또한 서브 스토리를 구축하는 기훈과 유라, 정희와 겸덕, 지안과 광일, 상훈과 애련의 이야기를 긴 호흡임에도 깔끔하게 완성해내고 있다. 그러나 이 드라마 최고의 장점은 스토리텔링의 구조적 측면과 그 안에 오롯이 담아낸 철학에 있다.



동훈이 사는 세계는 약육강식의 대기업을 배경으로 한다. 야망이 없고 착하기만 하면 이용당하고 팽당하는 처절한 세계다. 그 속에서 동훈은 자주 사람들로부터 '착해 빠졌다.'는 비아냥거림을 듣는다. 파견직 사원인 '지안'도 이 세계에 어울리지 않는 동훈을 '호구'로 생각하고 이용하려 든다. 그 세계 속의 동훈은 고통과 갈등에 휩싸여있다. 출구는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상황은 '지안'도 마찬가지다. 빚쟁이는 시도 때도 없이 그녀에게 폭력을 가한다. 장애를 가진 할머니와 가난은, 지치지 않으면 잠들지 못할 정도로 그녀를 한계상황으로 몰아간다. 이 지옥도는 고통이 가득한 현실에 대한 비교적 정확한 은유이다. 그리고 '지안'이 생존을 위한 '투쟁'의 몸부림을 반복한다면, '동훈'은 일단 '내력'으로 참고 버텨낸다.


투쟁 vs. 내력 혹은 니체적 초인 vs. 불교적 해탈


니체와 불교의 공통점은 이 세계를 고통이 가득한 장소로 생각한다는 점이다. 당연히 고통을 어떻게 컨트롤할 것인지가 사상의 핵심을 이룬다. 결국 해답을 찾고 사람들을 설득하려면 논리가 필요하다. 불교는 '윤회'를, 니체는 '영원회귀'란 말로 유사한 사고 실험을 제안한다.


타인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불교, 즉 대승불교에선 윤회를 거듭하여 모든 업을 다 해소하면 비로소 다시는 윤회하지 않는 해탈의 경지에 이른다고 말한다. 이는 박동훈이 '현실이 지옥이야. 이 세상이 천국인 줄 알아? 벌 받고 있는 거야. 벌 다 받고 가면 되겠지 뭐...'라는 자세와 유사하다. 세상의 고통은 모두 나의 업보로 인한 것이요, 그 업보를 현세에서 (참고 감내하며) 최대한 해소하는 길이 다시 태어나지 않는 방법이란 의미다. 또한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습관적으로 읊조리는 그의 말은, 불교가 현상적 삶 자체를 무상한 어떤 것으로 보는 태도와 꼭 닮아있다. 그렇게 동훈은 버티지만, 그는 해탈에 이르지 못하며 더욱 큰 고통에 놓인다.



반면 니체의 영원회귀는 불교보다는 훨씬 능동적으로 보인다. 다시 태어난다 해도 네가 힘에 대한 의지를 가지고 도전하거나 성취하려 노력하지 않으면, 그 삶은 (다시 태어나봤자) 영원히 반복(영원회귀)되지 않겠느냐? 그러니 고통을 받아들이고 강한 인간이 되라고 격려한다. '지안'은 적어도 고통을 당하고 있지만 않는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투쟁한다는 점에서 다분히 니체적이다. 그러나 결과는 같다. '동훈'과 마찬가지로 '지안'의 지긋지긋한 고통은 자꾸만 연장된다. '왜 자꾸 태어나는 걸까?', '나는 삼만 살'이란 상념 어린 대사는 그녀의 마음이 조금도 니체적 초인에 가까워지지 못했음을 반증한다.


불교적인 동훈과 니체적 지안은 과연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사상적 변증법으로 고통 극복하기


불교는 전통을 가진 위대한 종교답게 세상에 만연한 고통의 세목에 집중하기보단, 인간의 마음이 만들어낸 허상이 萬苦의 근원임을 설파한다. 극의 중간에 '동훈'의 친구인 겸덕 스님이 설법한 '내심외경(내 마음이 결국 세상을 비춘다)'에 담긴 의미가 바로 그것이다.


반면 니체의 초인 사상은 기독교적 전통이나 민주주의와 같은 근대 계몽주의의 허위에 대한 반발에서 출발했다. 종교적 사랑이나 착한 마음, 계급적 평등 같은 주장이 과연 고통을 몰아낼 수 있는가? 현실에선 전혀 아니지 않나? 그러니 투쟁을 통해 강인한 힘과 권력을 성취할 때 영원회귀의 나락에서 구원받을 수 있다는 현실론이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내력을 강조한 불교철학의 동훈이나 니체적 지안이나 고통의 굴레를 벗진 못한다. 동훈은 권력을 지향할 수 있는 입지에 있지만 타고난 성품 탓에 쉽사리 니체 쪽으로 기울진 않는다. 반면 지안은 투쟁하지만 권력 자체를 소유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있다. '나(지안)를 네 번 이상 도와준 사람들'이 없는 이유도, 구제될 수 없는 인생이 실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사람은 서로를 알아본다.


동훈이 지안에게 '네가 왜 나를 좋아하는지 알아? 내가 불쌍해서 그래. 너처럼 불쌍한 나 끌어안고 우는 거야.'라고 말하는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두 사람이 연결되자 서로의 철학이 시나브로 흘러든다.


동훈은 싸워낼 것 앞에서 '파이팅'이라고 응원하는 지안을 보며, '행복해지겠다!'라고 다짐한다. 상무이사 자리에 올라서기 위해 투쟁한다. 반면, 지안은 자신의 끔찍한 상처들까지 보듬어 안으며 지지해주는 동훈이, '네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야. 편안하게 살아...'라는 말에 담긴 철학을 떠올린다. 그리고 처음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성찰한다.



결국 동훈은 도덕적 내력을 쌓는데서 떠나 투쟁으로, 지안은 투쟁일변도의 삶에서 도리어 내력을 쌓는 성찰로, 자신의 부족함을 메꾸는 사상적 변증법을 따라간다.


내가 널 안다는 것, 윤회와 영원회귀에서 벗어나 자존감을 찾는 길


니체의 초인과 불교의 해탈은 언뜻 상반된 입장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대승불교의 논리를 살피다 보면, 놀랍게도 니체의 영원회귀와 유사한 이야기를 다른 측면에서 이야기한다. 붓다가 현현한 것으로 알려진 '파드마 삼바바'가 남긴  <해탈의 서>에서, 연못 옆에 앉은 목마른 까마귀가 물을 찾아갔다가 자꾸만 되돌아오는 우화가 등장한다.


사람들은 모두가 권력을 찾아 현세를 오르락내리락 분주히 오간다. 그러나 결국 초인이 되어 권력을 움켜쥔다 하더라도 큰 의미에선, 니체가 말했던 영원회귀와 다를 바 없다. 왜냐하면 목이 말라 날아가는 도전을 했지만, 궁극적으론 여전히 목이 마른 상태에 머물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깨어있지 못한 사람은 권력을 추구하여 성취한다 하더라도 궁극적으론 영원회귀의 수레바퀴에 갇힌 사람이다.


물은 바로 곁에 혹은 내 안에 있었다.


하지만 대개는 깨닫지 못한다. 목마름을 해결할 물이 내 곁에 있다는 걸 아는 방법은, 누군가 일깨워주는 것이다. 불교의 고승이 그러했듯, 현세에선 나를 온전히 아는 자가 일깨워야 한다. 그렇게 지안은 곁에 있던 동훈을 일깨우고, 동훈은 지안을 깨운다.


그리고 동훈을 도청해온 잘못이 드러나 자신에게 화나지 않느냐 묻는 지안에게 동훈은 말한다.


"사람 알아버리면... 그 사람 알아버리면... 그 사람이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어."

"... 내가 널 알아."


누군가에게 온전히 받아들여진 사람은, 그 순간 해탈의 계기를 맞는다.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실망하지 않는 사람,

내 모습을 한결같이 아름답게 비춰줄 거울을 갖게 된 사람은


자신을 온전히 긍정하게 된다.  


만남, 나를 아름답게 비춰 줄 타인이란 거울을 갖게 된다는 것.


동훈도 지안도 인간이기에 혼자서 '윤회'를 끊어내긴 어렵다.

다만 두 사람이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상반된 인생을 살아도 우리의 고통이 한결같다면,

두 사람이면 아니, 세 사람이면 가능할지 모른다.

그런 만남이라면 가능하다.


결말에 이르러, 동훈이 투쟁을 통해 쟁취한 상무이사 자리를 내던지고, 고통을 감내하며 가정사를 그대로 품어낸 일. 지안이 투쟁을 접고 스스로의 행복에 집중하며 살아가게 된 일.


우린 니체의 초인과 파드마 삼바바의 해탈 사이, 어느 지점에서 균형을 찾아가야 한다.


속 편히 살기위한 자존감이 아니라 누군가를 아름답게 비춰줄 거울이 되기 위해 욕망을 내려놓아 보는 일,

마찬가지로 나는 부족하지만 누군가의 인생을 통째로 끌어안을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일.


그러한 자세를 스스로 돌아보고 결심하는 일이

어쩌면 나의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이란 걸


가끔은 이렇게 드라마에서 배우게 된다.

  


너 자신이 너의 등불임을 알라.
너 자신이 너의 안식처임을 알라.  

 - 붓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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