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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뮤즈노트 Sep 11. 2016

휴가 나온 군인과 놀이기구

보문산의 휴가군인

옛날에 내가 살던 곳에는 보문산이라는 제법 큰 산이 있었다.

고사리를 캐러간 할머님은 가끔 그곳에서 토끼털이 섞인 똥을 발견하셨다고 한다.


"호랑이나 표범이 살고 있는게 분명해..."


아마 그랬을 것이다. 호랑이든 표범이든 그때는 뭐든 있을 수 있는 시절이었다.

해가 뉘엿뉘엿 질 때면 산등성을 타고 뛰는 노루의 그림자를 간혹 보곤 했으니까 말이다.


초등학교 입학전이니까 예닐곱살 정도 된 나는, 겁이 많았지만 제법 호기심도 많은 아이였다.

옆집에 살던 또래 친구가 뒷산을 타고 보문산을 가자고 했고,

우리는 가을 낙엽에 몇번인가 미끄러지며 얕트막한 구릉을 넘었다.


좀 무서운 기분이 들때쯤 어디선가 음악소리가 들려왔다.

보문산에 있는 작은 놀이동산이었다.

익숙한 곳이 보이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산중턱에 있는 놀이동산에는 회전목마도 있었고, 작은 관람차도 돌아갔다.

내가 좋아하던 놀이기구는, 아마 지금은 그 어디에도 없겠지만,
좁은 수로를 따라 둥그렇게 원을 그리며 회전하는 보트였다.

보트는 중앙의 모터에 팔이 연결되어 있어서 앞차와 언제나 일정한 간격을 두고 돌아갔다.


지금 시각으로보자면 딱히 흥미진진한 놀이기구라고 할 수도 없지만,

좁은 수로 밑바닥에 비단잉어들이 살고 있는 점이 근사했다.  

견고한 범선을 타고 돌고래와함께 물위를 달리는 기분이 든달까...


친구와 비단잉어를 물끄러미 보기도 하고, 유원지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시간이 어느정도 흘렀을 때쯤 집에 가자고 말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집으로 가는 길을 당연히 안다고 생각했던 친구가 자기도 정확한 길은 모르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게다가 아까 내려왔던 곳을 올려다보니 비탈이 너무 심해서 도저히 다시 기어올라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친구는 일단 큰 길을 따라 산을 내려가 보면 집으로 가는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말했다.

나는 까딱하다 길을 잃을 수 있으니 그건 너무 위험하다고 말렸다.

결국 친구는 혼자서 길을 내려가 버렸고, 나는 혼자 남겨졌다.


보문산의 놀이동산...

가끔씩 버스를 타고 놀러 왔기에 익숙한 곳이지만 집에 돌아가는 방법을 모르기에 낯선 곳이었다.

익숙하지만 낯선 곳에 홀로 남겨진 것이다.


시간은 가고 뉘엿뉘엿 오후의 해는 길게 늘어지고 있었다.


"길을 잃으면 경찰아저씨나 군인아저씨를 찾아서 이야기하렴~"


엄마의 말씀이 떠올랐다.

마침 주변에는 머리를 짧게 깎고 단색의 군복을 입은 젊은 군인이 서 있었다.

그는 빙글빙글 돌아가는 놀이기구를 바 보고 있었다.


"군인아저씨, 길을 잃어버렸어요. 집에 데려다 주세요."


그는 내게 집이 어디냐고 물었다.


"어디 사니?"


울먹이는 소리로 내가 사는 동네를 이야기했을 때, 그는 이내 어느 곳인지 알아차렸다.

인근에 군부대가 없으니, 아마 이 근처가 고향인 군인이었을 것이다.

그는 '아저씨가 알고 있으니 데려다 줄게'라고 말한 뒤, 나를 보며 물었다.


"아저씨도 시간 많은데, 우리... 놀이 기구 함께 타고갈래?"


그는 아까부터 바라보던, 그리고 내가 가장 좋아하던 회전보트를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잠깐 망설였지만, 두려움은 쉽게 즐거움을 억눌렀다.


"그냥 집에 갈래요."


그는 아마 두어번 더 물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내 손을 꼭 잡고, 큰 길을 따라 산을 내려갔다.

15분쯤 내려가자 도로가 나왔다.

그 길을 따라 다시 10여분쯤 걷자, 거짓말처럼 내게 익숙한 골목길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아마도 제대로 인사도 못했던 것 같다.

반가움과 안도감, 길을 잃었다는 두려움에서 벗어나자

그의 손을 놓고 쏜살같이 골목길을 달려 집에 들어갔던 기억만이 선명하다.


시간이 흘러

가끔씩 그 일을 떠올리곤 했다.  


처음엔 아마도 두려움이 기억에 새긴 흔적 때문이었겠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배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는 휴가를 나온 군인이었을 것이다.

복귀하기 전이었을까? 아니면 막 휴가를 나왔던걸까?


딱히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같지도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시간에서 한걸음 빗긴채 서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장교였던 그 시절의 삼촌처럼 절도있고 힘있는 말투를 쓰지도 않았다.


익숙한 낯섦...


군인이지만 군인같지 않던 그의 목소리가 떠오를때면

그는 그저 가을날의 놀이기구를 타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세월이 갈수록,

그와 함께 놀이기구를 탔으면 좋았겠다...란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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